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1789년 발발한 대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였던 루이 16세를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한 프랑스 근대사가 오늘의 프랑스 사회에 남긴 중요한 명제 중의 하나로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를 꼽을 수 있다. 이 명제는 소설 <이방인>으로 1957년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의 말이기도 한데, 그는 좌파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다만 공화주의자라고 부를 만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좌파만이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사를 통틀어 인간에게 강제된 질서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게 신분 질서였다. 왕후장상의 자식은 왕후장상이 되고 노예의 자식은 노예가 되었으며,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었고 쌍놈의 자식은 쌍놈이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신분이 결정된다는 것, 이보다 더 무서운 질서체제가 무엇이겠는가. 지배세력은 이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그들의 언어에서 '질서'와 '명령'이 하나의 단어(ordre, order)에서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과 무질서가 수반되었다면, 그것은 앙시앵레짐(구체제) 아래 사람들에게 강제되었던 가장 강고한 신분질서를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깨뜨리기 위해 필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역사를 가진 프랑스인들에게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명제는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주장이 아닌 것이다.
"사회정의가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이 명제는 오늘 프랑스의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을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이 열쇳말을 가지고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프랑스에서는 질서에 비해 사회정의가 더 중요한 가치인 데 반해, 한국에서는 사회정의보다 질서가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금세 알 수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기초 질서를 지키자!"와 같은 구호나 '안보 이념'을 정의나 자유, 평등의 가치보다 더 강조 받았으며,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언론을 통해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한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전파, 주입되어 다수 사회구성원들한테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그만큼 강력하게 관철되는 질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정의의 요구를 질서의 이름으로 효과적으로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질서 이념
한국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조중동' 등 수구언론들이 나서서 '대란(大亂)' 선동을 벌인다. 화물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물류대란', 지하철이나 기차 노동자가, 또 버스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교통대란',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급식대란'이라고 대서특필한다. 그래서 한국의 수구언론에 따르면 세계에서 한국만큼 '큰 난리(대란)'를 많이 겪는 나라가 없을 정도인데,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힌 질서 의식을 건드려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 공격하도록 이끌기 위함이다. 한국처럼 파업하기 어려운 곳에서 노동자들이 왜 파업에 나섰는지 그 이유와 배경은 말하지 않고 파업의 결과만을 선동적으로 기사화하는 조중동의 획책은 한국 사회에서 아주 잘 먹혀든다. 프랑스 사회 구성원들은 그런 선동에 코웃음을 치며 응수할 것이다.
"질서를 강조하여 사회정의의 요구를 억압하겠다고? 웃기네! 우리에겐 사회정의의 가치가 질서의 가치보다 더 앞서고 중요하거든!"
지배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 농민이나 빈민이 사회정의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것은 사회 변화를 바라지 않거나 두려워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노동자, 농민, 빈민의 처지를 개선하기보다 이를 온존시킬 뿐이다. 이것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다. 실상 한국의 민중들에게 질서 이념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작은책>의 독자이니만큼 나름의 사회 비판 의식을 갖고 있을 터인데, 그럼에도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라는 덫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지 돌아봐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질서 이념을 끊임없이 주입받아 온 데다가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질서나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정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그럼에도 사회정의가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사회정의가 서 있는 곳에서는 기존 질서에 도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가 파업을 즐기겠는가? 불의와 차별, 배제가 관철되기 때문이며,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당하기 때문 아닌가. 사회정의가 있는 곳에서는 파업을 벌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질서가 강조될 때, 사회정의의 요구는 끊임없이 억압된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안정'의 반대말은 '불안'이지만, 한국에서는 안정의 반대말이 '무질서' 또는 '반질서'인 양 작동한다. 미래가 불안한 한국의 '흙수저' 청년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작동을 뒤집는 데 있지 않을까? 오늘 청년들을 옭죄고 있는 불안은 흙수저에서 흙수저로 대물림되는 질서체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무질서, 또는 반질서의 과정 없이는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와 이에 대한 반대 시위, 정치인들의 발언들, 그리고 <르몽드> 신문의 사설은 우리와 달리 '질서보다 사회정의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프랑스 80개 도시에서 시위
지난 2월 4일 파리, 낭트, 툴루즈 등 프랑스의 대도시를 비롯한 80개 도시에서 노조활동가 탄압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노동총동맹(CGT)의 호소에 각지의 노동자 등 시민들이 동참한 것이다. 시위대는 "노조활동에 대한 범죄시를 멈춰라! 노동자들을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웠다.
문제의 발단은 솜므(Somme) 지역에서 자동차 타이어 등을 생산하는 굳이어(GOODYEAR) 노동자 8명에게 2년 징역형을 선고한(그중 9개월은 유예 없는 징역형) 데서 비롯되었다. 2년 전인 2014년 1월 '굳이어' 회사가 공장 문을 닫기로 결정했을 때, 이에 분노한 노조활동가들이 회사의 경영진 두 명을 30시간 동안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감금했을 뿐 물리적 폭력이 가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도 노조활동가들이 경영진을 감금하는 일은 드물게 일어나는데,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무리 노동자들이 절망적인 분노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경영진을 감금한다는 발상 자체를 하기 어렵고 설령 감금행위가 벌어진다고 해도 그 상태가 30시간이나 지속되도록 경찰이나 용역이 두 손 놓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의 투쟁'당의 대변인 나탈리 아르토는 "우리는 노조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노동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은 스캔들이다. 노동자들은 다만 일자리를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부는 해고하는 대기업가의 진영을 택했다"고 말했다. 노동총동맹 소속의 여성노동자 프랑수아즈는 "우리가 수십 년 전부터 지키기 위해 싸워 온 가치들이 배반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우파 정치인이나 좌파 정치인이나 똑같다. 아무도 투표하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라며 프랑수아 올랑드의 사회당 정부를 한목소리로 비판했는데, 이 점은 좌파당의 다니엘 시모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조 활동에 대한 범죄화가 지속되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의 권위적인 일탈은 니콜라 사르코지 때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르몽드>의 사설 : "적절치 않은 형벌"
이번 선고와 관련하여 프랑수아 올랑드의 사회당 정권이 뒤에서 작용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배경이 있다. 굳이어 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는데, 최종 합의문에서 회사 경영진이 감금 사건과 관련하여 문제 삼지 않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진행되었고 급기야 징역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11%의 지지를 받았던 장 뤽 멜랑숑 좌파당 대표는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을 때려눕히기를 바랐으며", "노동자들을 때리는 손에 입을 맞추는 하급임금노동자와 노예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편,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의 마뉘엘 발스 총리는 "부정할 수 없이 무거운" 판결이라고 규정하고, "아무리 사회적 폭력이 엄중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모든 게 허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징역형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노조 활동을 범죄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의심을 일축한 것이다.
나는 <작은책>의 독자들과 함께 마뉘엘 발스 총리의 "아무리 사회적 폭력이 엄중한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게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노조활동을 범죄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국에서 벌어지는 노조활동에 대한 온갖 탄압상을 떠올리며 다시금 짚어 보고 싶다. 경영진을 감금하기는커녕 기껏해야 천막농성을 하거나 철탑에 올라 수백 일을 감옥 아닌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게 노조활동가들의 일상이고, 어쩌다 어렵게 파업을 벌여 보지만 거의 모두 불법 범죄화되어 활동가들이 체포, 투옥되는 일이 다반사인 게 우리 노동계의 현실이다. 그뿐인가. 손배 가압류로 노조활동가들의 삶이 송두리째 유린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르몽드>에 실린 '굳이어, 적절치 못한 형벌'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읽는 중에, 지금 감옥에 갇혀 있거나 철탑에 올라 있는 이 땅의 노동자들과 삼성 본사 앞 강남역 8번 출구 등 곳곳에서 천막농성을 벌이는 활동가들이 떠오르면서 그만 바보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아미앵의 판결은 그러므로 이중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나는 (당사자가 고소하지 않았음에도) 법원이 나서서 재판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는 노조활동가에 대한 징역형이 거의 전례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다. 판결의 가혹함은, 항소심에서 파기되겠지만, 저지른 행위에 비해 균형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판결은 불필요하게 불타는 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의 '나라 밖 이야기'는 <작은책>과 필자의 동의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프레시안>에 소개됩니다. (☞바로 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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