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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가 60대보다 1표씩 더 가진다면 박근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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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40대가 60대보다 1표씩 더 가진다면 박근혜는… [유라시아 견문] 다니엘 벨과의 대화 : 중국 모델 ②
동서 사상의 접목을 통해서 1인 1표의 선거를 절대선으로 간주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모델을 고민 중인 다니엘 벨 칭화 대학교 교수와의 인터뷰가 3월 2일(수요일)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관련 기사 : 다니엘 벨과의 대화 : 중국 모델 ① 히틀러 vs. 홍위병, 민주주의가 낳은 20세기 괴물!)

실사구시

이병한 : 그간 써오신 책들을 다시 살펴보니 사고의 궤적이 엿보이더군요. 처음에는 유교 고전의 정치철학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점점 더 중국의 현실 정치에 주목하고 계시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벨 : 영국에 있을 때는 당대의 중국 정치에는 관심이 덜했어요. 실은 중국에 살던 첫 10년 동안도 비슷했습니다. 제자백가의 정치 이론 연구에 주력했지요. 현실 정치를 경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 중국에 갖추어지지도 않았고요. 아무래도 변화의 계기는 리위안차오(李源潮, 현 국가 부수석)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012년 5월로 기억합니다. 중국공산당 당원들과 외국 학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정치 개혁 포럼에 초대받았어요. 저로서는 중국 고위직 인사를 처음 만난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리위안차오와 직접 토론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죠. 매우 지적이고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병한 : 어떤 얘기를 주고받으셨나요?

벨 : 공산당원의 선발과 승진에 관한 내부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나의 제도를 모든 조직과 단위에 적용하는 것(one-size-fit-all)이 적당하지 않다는 발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병한 : 그 하나의 제도가 선거를 말하는 것이겠죠?

벨 : 그렇죠. 정부의 단위에 따라 그에 적합한 제도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의 간부 평가 항목이 단위별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기층에서는 인민과의 소통과 교감 등 민주적 자질을 중시하고, 지위가 올라갈수록 실력과 청렴성을 더욱 강조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왜 마을 이장부터 국가 수반까지 선거만으로 뽑아야 한다고 여기느냐.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며 서방 학자들에게 훈수도 두었습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부로 올라갈수록 더욱 복잡한 제도적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경제와 과학, 국제 관계, 역사, 정치철학 등 다방면에 뛰어난 견식을 가진 지도자를 걸러내야 한다고요. 게다가 그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자각을 안고 더욱 더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갈수록 지구화되고 변화의 속도가 빠른 현대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강조했죠. 기존의 관습에 물든 이들이 아니라 혁신을 습관으로 길들인 사람들을 뽑는 제도를 정교하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병한 : 흡사 기업의 최고 경영자 선발 같습니다.

벨 : 일견 그렇습니다. 중국공산당은 리더십 교육에 열성이니까요. 반면에 다른 면모도 있습니다. 14억을 이끄는 최고 지도부라면 14억 인민은 물론 중국 밖의 사람들도 고려할 수 있는 안목과 덕성도 겸비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세계의 5분의 1만큼이나 5분의 4에 대한 사고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뜻이죠.

과연 선거제 민주주의가 그런 지도자를 뽑아내는 최선의 제도일 수 있는가? 리위안차오는 아무리 민주주의 국가를 다녀 봐도 그런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로서도 딱히 부정하기 힘들었어요. 그날의 대화가 두고두고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현실 정치 기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병한 : 그래서 제출한 개념이 '정치적 실력주의'입니다.

벨 : 그를 만난 다음해(2013년) 시진핑이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바티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하지요. 중국은 14억 대국이고, 가톨릭 역시 전 세계 14억 신도를 거느린 거대한 종교 조직이에요. 양쪽 모두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대표하는 수장들입니다. 어느 쪽도 1인 1표제로 선출된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그들 권력의 합법성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각각의 조직에 어울리는 기제를 통하여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통치 권한을 부여받았고, 프란시스코 교황은 가톨릭 대표의 임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 다니엘 벨 중국 칭화 대학교 교수. ⓒytimg.com

이병한 : 정치적 실력주의의 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

벨 : 기본 이념은 평등과 차별의 조화에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교육받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다. 하지만 모두가 이 과정에서 동등한 결과를 얻지는 못한다. 그래서 더 합리적인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즉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들을 선발하는 별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당장 떠오르는 나라가 싱가포르입니다.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가 아니라 '유능한 정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리콴유는 노골적으로 '소인의 정치'가 아니라 '군자의 정치'를 지향한다고 말했습니다.

벨 : 중국도 싱가포르에서 착상을 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들 자신의 역사, 즉 과거제에서 영감을 얻고 참조했음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흡합니다. '정치적 실력주의'가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않습니다. 능력과 덕성만으로 승진이 되는 것이 아니죠. 파벌, 연줄, 집안 등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 정치의 개혁 방향이 선거제 민주주의의 도입인가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정치적 실력주의'를 보다 강화하고 한층 더 투명하게 실시하는 것이 정치 개혁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중국의 실정에 맞는 정치 개혁은 정치적 실력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벨 : 대전제를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저는 영국의 정치 개혁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억 인구를 보유하면서 현대 국가로 전환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실체 속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개혁 방안을 탐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병한 : 실사구시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좀 짓궂게 여쭈어도 될까요. 리위안차오와의 만남이 중국의 현실 정치를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그 포럼 자체가 외국학자들의 관점을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한 고도의 기획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요즘 중국에서 외국학자들 초청할 때 대접이 무척 후합니다. 일등석에 고급 호텔에…. (웃음)

벨 : 그랬다면 성공한 셈이지요. 제 마음까지 돌려세웠으니까요. 그런데 그 성과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포럼에 참여했던 외국인 학자들 가운데 저처럼 중국 정치 체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이는 없거든요. 저만 예외적으로 포섭된 것인가요? (웃음)

이병한 : 선생님만이 아니죠. 프린스턴 대학교의 중국학 시리즈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웃음)

벨 : 아, 그렇군요!

선거제와 과거제의 상호 보완

이병한 : 선생님이 궁리하시는 중국 정치 개혁의 현실적 방안을 과거제와 선거제의 적절한 상호 보완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제도화한 것이 선거제이고, 실력주의를 제도화한 것이 과거제였습니다.

벨 :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두 실력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과 유능한 지도자를 선발하는 것 사이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습니다. 1인 1표를 유일한 제도로 고집만 하지 않는다면 대안적 제도 구상의 길은 다양하게 열려 있습니다.

이병한 : 이런 견해를 가장 먼저 개진했던 이 역시 리콴유였습니다. 일찍이 '질적 투표'를 제안했었죠.

벨 : 리콴유는 40~50대에게 가산표를 주자고 했습니다. 살아온 경험이 짧은 20~30대와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60~70대를 40~50대와 등가적으로 한 표씩 행사하는 게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40~50대는 대개 한참 자식을 키우는 부모 세대입니다. 즉 장래의 유권자들을 키우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에게 한 표씩 더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의 정치적 선택을 더 존중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병한 : 저도 그 얘기를 처음 접했던 20대 초반에는 어이가 없었어요. 황당무계하다고 여겼죠. 그런데 30대를 지나고 곧 2표를 행사할 수 있는 40대가 다가오기 때문일까요. 전혀 허황한 얘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20대의 정치적 판단이 얼마나 옳았나 되새겨보게 되는 지점도 있고요. 그러나 당장 청년 세대와 노인 세대들은 크게 반발하겠지요.

벨 :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큰 논란만 초래하고 무산되었지요.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그게 꼭 역차별만도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모두가 결국은 40~50대를 통과하게 되지 않습니까? 현재의 20~30대도 머지않아 2표씩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며, 2표의 책임을 지었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1표로 줄어들게 됩니다. 전혀 불공정한 것만도 아니에요.

어쩌면 인간의 성장과 성숙 단계를 반영한 생물학적 합리성을 투영한 제도일 수도 있습니다. 청년들은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고, 노년들은 지적인 판단력이 쇠잔해집니다. 중국공산당이 최고 지도부의 나이 제한을 두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즉 현재 사회 각 영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청년들과 노인들보다 더 많이 반영하자는 주장이 꼭 정의에 위반되는 것인지 철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정밀하게 토론해볼 여지가 있어요.

현재의 선거제 민주주의는 인간을 질적으로 판단하지 않거든요. 기계적이고 양적인 통계 대상으로만 봅니다. '질적인 판단', 즉 실력주의적 요소를 부가하면 선거제 민주주의의 운영 방식은 얼마든지 유연하게 변용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그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아 보이긴 합니다. 일단 가산 투표제는 유권자의 차원에서 실력주의적 요소를 투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안은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벨 : 최상층부에서의 도입을 생각해 볼 수도 있죠. 이것은 쑨원이 제시했던 방안이기도 합니다. 쑨원이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정치 제도를 집중 연구합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20세기 초 미국 의회의 수준이 너무 낮았어요. 의회가 민의를 반영하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의원들은 자질에 미달한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중화민국의 헌정은 미합중국의 헌정을 그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중화제국의 제도를 통하여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1905년에 폐지시켰던 과거제의 장점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일종의 '자격 심사'입니다. 즉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더라도 곧바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선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자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뽑는 선거 제도는 인정하되, 그렇게 해서 선출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걸러내는 장치를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인기만 있고 능력은 없는 이들이 나라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병한 :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그랬다면 (아들) 부시 대통령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네요. 부시만이 아니라 지금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정치인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웃음)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선거에서 이겼던 부시는 시험에 떨어져 낙방하고, 낙선자였던 엘 고어가 시험에 통과해서 대통령이 된다?

벨 : 그 자격 시험이 꼭 지적인 능력만을 측정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성과 덕성을 두루 평가해야죠. 심지어 쑨원은 당선자뿐만이 아니라 유권자들도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유권자의 자격을 획득하기 전까지 최소한 6년의 정치 학습이 의무적으로 필요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이병한 : 역시나 그는 유교정치, 학자-정치의 전통 속에서 사고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화와 역사적 기반이 미약한 국가들에서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벨 : 흥미로운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원조처럼 간주되는 하이에크도 비슷한 구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1973년에 출간한 [Law, Legislation and Liberty]에서 민주주의적 원리를 적용받지 않는 별도의 의회를 제안해요. 그 역시 선거제로만 작동하는 의회만 있어서는 '다수의 전제'를 견제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 정당과 이익 집단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이들에게 15년의 임기를 보장받는 독립 의회를 구상한 것이지요. 물론 이 또한 실현되지 못합니다. 1인 1표의 민주주의적 상식에 위반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하이에크의 구상은 영미권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주의 전통을 오래 경험한 중국의 문화적 토양에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하이에크와 중국의 결합이라? 흥미롭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번역까지 하신 장칭의 의회 삼원제는 어떻습니까? 하이에크가 구상했던 그 독립 의회가 장칭의 통유원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벨 : 저는 의회 삼원제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지려면 통유원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꼭 유학자들로 한정될 이유가 없어요. 선조와 후세, 외국인, 동식물 등 '비유권자'들의 집합적 의사를 대변하는 기구라는 목표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에 필요한 지식과 자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 기구에 적합한 인물을 선발하는 방법과 평가 지수 등 구체적 논의로 진전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인지 과학 발전을 응용하여 정책 결정자들이 의사 결정에서 범하는 인지적 편향을 줄여갈 수도 있고요. 그러나 제가 의회 삼원제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고 여기는 까닭은 통유원보다는 서민원 쪽에 있습니다.

이병한 : 왜 그렇습니까?

벨 : 세 개의 의회 중에 하나만이라도 1인 1표제가 도입되어 실행된다면, 즉 일부의 중앙 정치인을 선거를 통해 뽑기 시작한다면, 그렇게 선출된 정치인들이 다른 기관의 견제를 받으려고 할까요? 즉 민주 정치를 일단 수용하고 나면 삼원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이상이 작동하기 힘들 것이라는 저의 판단입니다.

흔히 장칭을 '반(反)민주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의회 삼원제는 너무 민주주의적이라서 중국에서 실현 가능성이 덜합니다. 서민원이 득세할 가능성이 크고, 정작 통유원은 주변화될 공산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야먀의 '역사의 종언'은 부분적인 진실을 담고 있어요. 일단 1인 1표제가 시작되고 나면, 제도의 역진이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쿠데타나 혁명이 아니고서야 유권자가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권한을 회수하기가 힘들지요.

이병한 : 그래서 과거제와 선거제의 분리 적용을 제안하는 것이죠?

벨 : 그렇습니다. 기층과 상층을 나누어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풀뿌리 자치는 민주주의를, 국가 통치는 실력주의로 가자는 것이지요.

중국 모델

벨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루소, 몽테스키외 등 많은 정치이론가들도 민주주의란 작은 공동체에 최적화된 제도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 점이 간과되고 있어요. 정치 단위가 작을수록 유권자들도 후보자들의 면면, 실력과 덕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습니다.

마을 학교를 개선해야 하는가, 병원을 더 지어야 하는가 등 생활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유권자들의 관심 또한 자연스레 높아지고요. 토론도 활성화되겠죠. 그리고 나의 선택이 곧바로 나의 가족과 이웃, 내 아이들의 친구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알기에 공공심을 더욱 고양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테네는 아주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병한 : 노자의 '小國寡民(소국과민)'에 빗댈 수 있을까요. 당장 떠오르는 것이 일본입니다. 지방에 내려가면 참으로 모범적인 자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마을이 많아요. 그런데 중앙 정치는 영 딴판이지요. 똑같이 선거제 민주주의로 작동하는데도 규모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벨 : 정치 단위가 커질수록 유권자들의 판단은 이데올로기와 이미지에 좌우됩니다. 인지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병한 : 중국에 지방 자치는 작동하나요?

벨 : 향촌 자치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있습니다. 마을 선거가 도입된 것이 1988년입니다. 1998년에는 촌민 선거가 전면화, 전국화 되었습니다, 마을의 크기에 따라 3인에서 7인까지 3년 임기의 마을 대표자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18세 이상이면 유권자이자 입후보의 자격도 주어지죠. 그래서 2008년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농민들의 숫자가 9억에 이르렀어요.

물론 촌민 선거도 부작용이 없지 않아요. 토착 세력과 유지들의 권력 남용이 빈번합니다. 관권 선거도 많고요. 그런데 이는 선거제 일반의 문제라고 해야겠죠. 그래서 중국 정부는 숙의 민주주의 또한 마을 자치 차원에서 도입하고 있습니다. 촌민들에 대한 정치 교육을 의무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선거제의 결과적 유효성도 증진시키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실험을 외부에서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아요.

이병한 : 상층부의 실력주의란 중국공산당의 운영 체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니 더 여쭐 이유가 없겠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국가적 차원의 선거는 전혀 필요 없다고 보십니까?

벨 : 저는 리위안차오에게 국민 투표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현재의 중국공산당 일당 체제에 대한 선호도 투표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라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현 체제에 대한 지지도와 만족도는 대체로 80%가 넘는 것으로 나와요. 10년에 한 차례 정도 국민 투표를 실시함으로써 대내적인 통치 정당성을 확보할 뿐만이 아니라 대외적인 설득력도 높일 수 있다고 봅니다. 선거를 통하여 일당 통치의 합법성을 확보해가는 것이지요. '내정 불간섭'이라는 소극적 주장보다 훨씬 적극적인 대처 방안 아닐까요,

이병한 : 최고 지도자의 선출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지지도를 선거를 통해 확인한다? 재미있습니다. 기층의 민주주의, 상층의 실력주의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요. 중국의 규모가 워낙 크지 않습니까. 성과 시 등 중간 단위에 대한 고민은 없으신가요?

벨 : 중간 단위에서는 각종 실험과 혁신이 전개됩니다. 개혁 개방의 성공을 이끌었던 경제 특구가 대표적인 경우이죠. 일부 시와 성이 먼저 성공을 거두면 그 도입 범위를 더욱 넓히고, 결국에는 전국적으로 확대합니다. 각 시와 성에 새로운 과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실험과 혁신을 독려하고 중앙 정부와 피드백을 하면서 국가적 어젠다를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성과를 내는 이들이 중앙 진출의 가능성도 높아지고요.

이런 실험과 혁신이 많아질수록 중국공산당 또한 마르크스-레닌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집단이 되어갑니다. 2014년에는 일부 소도시와 마을에서 GDP 성장을 직무 평가에서 제외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신에 빈부 격차 해소와 환경 보호를 평가 항목으로 넣었어요. 중앙에서 '생태 문명 건설'을 표방하자, 중간의 행정 단위에서 경쟁적인 실험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변화 과정은 베이징에만 있어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보다는 미국의 이상에 더 가깝습니다. 존 듀이의 '교육 국가', '혁신 국가'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이병한 : 기층의 민주주의, 상층의 실력주의, 그리고 중간 단위에서의 혁신주의가 '중국 모델'의 골자인가요?

벨 : 그간의 베이징 컨센서스나 중국 모델론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의 결합만으로는 중국의 현재를 설명합니다. 실상과 매우 어긋나는 진술이에요. 경제적으로 자유 시장이 작동하고 있음이 사실이기는 하죠. 노동과 자본, 상품과 정보가 갈수록 자유롭게 교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여전히 기간산업의 중심을 틀어쥐고 있어요. 통신과 교통 등 주요 산업과 금융도 장악하고 있지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는 거대한 국영 기업, 지방 기업과 외국 기업 그리고 중소 규모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복합 경제입니다. 정치적 권위주의 또한 부분적 진술에 그칩니다. 일당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광범위한 안보망을 구축해 두고, 미디어 규제도 수시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공산당이 앞장서서 끊임없이 제도 개혁을 추진해가는 중추 기관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독재의 단순 조합으로 중국 모델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평면적인 접근입니다. 기층의 민주주의, 중간의 혁신주의, 상층의 실력주의로 작동하는 독특한 기제를 '중국 모델'이라고 불러주는 게 더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병한 : 장칭이 政道(정도)의 차원에서 天地人(천지인)을 두루 대의하는 제도를 궁리하고 있다면, 선생님은 治道(치도)의 차원에서 上中下(상중하)에 적합한 개별적 제도를 연구하고 있다고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벨 : 저는 상층에서 의회 삼원제를 도입하기보다는 상중하의 단위에서 가장 최적화된 제도를 입안하는 편이 중국에서 더욱 실현가능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 그 중국 모델은 중국에만 해당하나요? 다른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까?

벨 : 1인 1표의 선거제 민주주의의 대안을 고안하는데 유력한 참조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주목받게 될 것입니다. 중국은 싱가포르가 아니거든요. 싱가포르보다 150배나 큰 나라입니다. 다시 한 번 마르크스를 상기하자면, 한 시대의 지배 이념은 지배 국가의 이념을 따르기 쉽습니다.

남유라시아로

나는 '중국모델'을 존 듀이에 빗대는 것이 얼마나 적합한지 다소 의문이다. 차라리 '중화제국의 근대화'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향촌 자치의 전통은 송나라까지 거슬러 오른다. 지방의 자발적 마을복지를 골똘히 궁리했던 이가 주희였다. 향교와 사창 등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 전통을 20세기도 계승했던 이가 '최후의 유학자'로 불리던 량수밍이었다. 그가 주도했던 운동 역시 '향촌 건설 운동'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시기의 강제적인 합작사(꼬뮨)들이 해체되면서 그 오래된 마을 자치의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야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유산 또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즉, 마을 자치에 참여할 수 있는 문호가 만인에게 개방되는 의미로서의 혁명=대민주를 통과해온 것이다. 그래서 어느덧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을 자치 국가'가 되어가는 역설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역사는 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다. 구불구불, 울퉁불퉁, 태극의 운동에 가깝다.

2015년 또 하나의 '민주화' 물결이 일었다.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이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행기에 들어섰다. 그녀의 마지막 유세 연설을 현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는 못했다. 다만 기운만은 전해졌다. 단아한 표정에 단호했던 목소리가 지금껏 생생하다. 그러나 '민주 대 독재'는 미얀마의 현재를 짚기에 너무나도 단순한 구도이다. 문명화-근대화-민주화의 단일 서사, 단순 서사는 정중하게 사절한다.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이 만나는 밀레니엄의 길에 미얀마가 자리한다. 20세기 대영제국과 대일본제국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했던 전장이 바로 미얀마였다. 아시아 최초의 유엔(UN) 사무총장을 배출하고 비동맹운동을 주도하다가 돌연 쇄국정책으로 돌아서서 은둔의 길을 선택한 나라가 미얀마이기도 하다.

이 복잡다단한 사정과 사연을 삭제해서는 미얀마의 현재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대서사로는 담아낼 길이 없다. 유라시아 사관을 담금질할 수 있는 유력한 장소였다. 동유라시아에서 남유라시아로, 인도양 세계로 남하한다. '유라시아 견문'도 2년차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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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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