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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군주 정치'가 차악? 최선을 택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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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종인 '군주 정치'가 차악? 최선을 택해달라" [인터뷰] '날라리' 대학생에서 국회의원까지…정의당 비례 1번 이정미
4.13 총선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 이후 새로 짜여질 20대 국회에는 어떤 이들이 등원하게 될까? 의외로 가장 먼저 차기 국회 입성을 결정지은 이들은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들이다. 현재 의석수 5석으로 원내 4당인 정의당은 지난 11일 이미 당원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확정했다. (☞관련 기사 : 정의당, 비례 후보 1번에 이정미…김종대 2번) 정당 지지율을 고려하면, 이 명단 가운데 2~3번까지는 당선권으로 예측된다.

비례대표 경선에서 1번을 받은 이정미 후보를 21일 서울 여의도 정의당 당사에서 만났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2003년부터 진보정당 당직자로 일해온 이 후보는 늘 웃는 표정이 인상적인 정치인이다. 살아온 이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노동운동 시절) 구사대에게 6개월 동안 너무 맞아서 그 후로 1년 동안 월경이 끊겼어요", "(노무현 정부 때 민주노동당 지도부로서) 단식을 너무 해서 심각한 수술까지 받았어요"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이 후보는 13년간의 정당 활동 경력에도 지역구가 아닌 비례대표 출마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당에서 차출할 때마다 지역구 선거에 나갔지만 결과적으로 지역에 기반을 갖지 못했다"며 "이번에는 제가 비례대표로 의회에 입성하는 게 당에 더 기여할 기회"라고 했다. 그는 20대 국회에서 자신이 원내에 있으면서, 자신처럼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훈련을 쌓은 중간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왜 정의당을 지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한때는 '최악(새누리당)을 피하기 위해 차악(더불어민주당)을 선택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차선이 차선조차 안 되고 있다"며 "최선이 선택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제1야당인 더민주나 국민의당도 정신을 차린다. 정의당을 그 도구로 써 달라"고 호소했다.

더민주에 대해 그는 "우리 당은 정당 민주주의를 통해 후보를 선출했다"며 "더민주는 정의당이 받는 정당 교부금 20억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받지만, 정책은 만들지 않고 후보도 키워내지 못해 외부 수혈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특히 더민주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스스로를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선출한 것과 관련해 그는 "'군주 정치'의 결과물로 나온 비례 후보 명단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당원들이 민주적 의사 결정을 통해 선출한 명단을 선택할 것이냐"라고 야권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공장에서 구두약과 통신기기 냉각팬을 만들던 노동자 출신인 이 후보는 짐짓 이렇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원래 제품은 공정(工程) 과정이 좋아야 완성도가 높은 좋은 제품이 나와요." 정의당제(製) 제품의 품질에 대해 한때의 생산직 노동자는 "김종대 후보의 선출은 보수의 영역으로 여겨 온 경제와 안보에 대해 현 정부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후보들도 각자 정당에서 성장하고 실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 후보는 더민주의 비례대표 논란에 대해 "당내 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져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외주로 들어오신 분이 '군주 정치'를 하는 것 아니냐"며 "김종인 대표가 2번을 받은 것보다도, 어떤 취지로 비례대표를 선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비례대표가 '당 대표의 쌈짓돈'은 아니지 않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국민의당에 대해서도 그는 "새로움을 표방했지만, 당의 시스템이나 이념은 기존의 제1야당과 비슷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며 "'이삭 줍기'라는 말이 왜 나왔겠느냐. 새로운 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패잔병 모임 같다"고 혹평했다.

야권 연대 문제에 대해 그는 "야당의 소명 의식"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에게 이렇게 못된 정부는 역대(를 통틀어도) 없었고, 새누리당은 그 못된 정부의 하청 정치를 하고 있다"며 "그런데도 그와 맞붙어 싸우는 야당은 역대 가장 무능력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야권 지지층은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나?', '못된 정부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 있나?'라고 묻고 있다"며 "그 (유권자의) 호소에 답을 하면서 각 당의 독자성도 세워 나가야 하는데. 국민의당이나 더민주나 여기에는 귀도 눈도 닫고 있다"고 거듭 비판했다.

그는 또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 대표가 기자들과 만나 '정의당과의 정책 연대는 없다'고 말한 데 대해 "정체성이 안 맞아서 연대를 안 한다는데, 그러면 더민주의 정체성은 어디와 맞느냐"고 꼬집었다. 그는 '더민주의 정체성'과 관련, 전날 더민주에 영입된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김종인 대표가 과거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 캠프에 몸담았던 이력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김 대표에 대해 "역대 야당 지도자들 중 이 문제(야권 연대)에 대해 이렇게 소명 의식이 없는 지도자는 처음"이라며 "야권 연대는 정당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2017년 대선을 향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정미 정의당 부대표가 21일 오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살아온 이력과 의정 활동 포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의당(최민석)

날라리 대학생, 학출 노동운동가, 진보정당 당직자, 그리고 국회의원

국회 입성을 앞둔 그에게, 살아온 이력에 대해 물었다. 이 후보는 스스로 "날라리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입시에 너무 찌들어서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여대생들이 취업을 준비하는 3~4학년 때부터 화장도 하고 꾸몄는데, 저는 1학년 때부터 화장하고 다녔다. 학생운동 같은 건 있는 줄도 몰랐다. 운동하는 선배들도 '쟤는 날라리라 운동 같은 건 절대 안 할 것 같다'고 꼬시지도 않았다. (웃음)"

하지만 '잘 나갔던' 시절은 길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서에서 구류 5일을 살았다. 어머니는 이 후보에게 '대학이냐 데모냐,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고, 이 후보가 "데모를 그만둘 수 없다"고 하자 등록금을 주지 않았다. 이 후보는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 신청을 했고,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들도 그를 이해하고 지지한다고 그는 말했다.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1992년 대선 때 가족 회의를 소집해 "이번에는 2번을 찍어야 정미가 감옥에 안 갈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평생 '1번'만 찍어 왔고, 당시 가족 회의의 결정을 '보이콧'하기까지 했던 이 후보의 아버지도 2008년 총선 서울 영등포갑 선거 사무실 개소식에 찾아왔고, 사람들 앞에서 지지 발언을 하며 "이정미 사랑한다"고 손으로 하트까지 만들었다고 했다. 이 후보는 "부산 남자인 아버지에게 태어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84학번인 그는 입학 이듬해인 1985년에 노동 현장으로 갔다. 유명한 '말표 구두약'을 만드는 회사였다. "잔업에 철야에, 일을 정말 많이 했는데도 월급이 10만 원이 안 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듬해에는 노동 현장을 떠나 민주화 운동 단체로 갔다. 1986년 인천 지역 대학생들과 '인천지역 카톨릭 대학생회'에서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시기가 지나고 그 이듬해 다시 노동 현장으로 갔다. 이번에는 냉각팬을 만드는 300여 명 규모의 통신 기업이었다. 1989년, 취업 다음해에 결국 노조를 만들었지만 노조 설립 한 달만에 회사는 그를 해고했다.

"현장에 구사대들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우리 회사에도 구사대가 수십 명 조직됐다. 출근하려 하면 노조 만든 사람들은 회사 앞에서 (구사대가) 정문에서 막고 출근을 안 시키고, 다른 데로 데려가서 때렸다. 제가 6개월을 엄청나게 맞았다. 아침에 출근하려다가 맞고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이후에 1년간 생리를 못 했다. 복부를 너무 맞아서. 공장 담장 밖에서 노조 총회를 지켜보는데 소방 호스로 저한테 물을 쏘아서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그때 왜 노동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 느꼈다. 회사 바로 앞에 파출소가 있었지만 여자가 두드려 맞아도 경찰은 팔짱만 끼고 말리지도 않았다."

이 후보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에 띈 웃음은 지우지 않았다. 구사대에게 맞았을 당시 이 후보는 25세였다. 이후 그는 1992년까지 해고 노동자 신분으로 인천 주안공단에서 다른 기업의 노조 설립을 돕는 등 노동활동가로 일했다. 인천민주노동청년회를 거쳐 1994년 한국노동단체협의회라는 전국 단위 노동운동 조직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2003년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는 고위직 당직자 중 여성 비율이 너무 작다며 여성 정치인을 수소문하다 이 대표를 찾았다. 권 대표를 만나고 사흘 후 민주노동당에서 당직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그의 직업은 13년째 '정당인'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 부대표 시절 이라크 파병 반대 단식 28일, 같은해 겨울 국가보안법 철폐 단식 24일을 하며 건강을 해쳐 심각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천호선 대표 시절 이 후보는 당 부대표 겸 대변인으로 천 대표와 호흡을 맞췄는데, 공교롭게도 천 대표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 출신이다. 이 부대표는 천 대표에게 "그때 정말 죽을 뻔했는데, 어쩌다 천 대표가 나와 같은 당에서 진보 정치를 하는 관계로 만나게 됐다"며 웃었다고 한다.

때아닌 '공산주의자' 논란과 정의당의 현주소


ⓒ정의당(최민석)
2008년 일심회 사건 후 진보신당 창당으로 민노당이 분당됐을 때 그는 당에 남았지만, 2012년 이른바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 사태' 때 그는 민주노동당 출신임에도 심상정·노회찬·강기갑·유시민 전 대표 등과 함께 탈당을 선택했다.

계파로 보면 구 민노당계 내에서도 인천연합 출신이지만, 그는 자신이 이번 경선에서 비례 1번을 받은 것이 어떤 '조직적 선택'의 결과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예전에 계파가 가졌던 (당원) 숫자를 이제 일반 당원들이 압도하고 있다"며 "2014년부터 2015년 10월까지 2만 명에 가까운 당원이 들어왔다. 계파의 결정이 전체 당의 결정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최근 서울 서대문갑 지역구 국민의당 후보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당원들 내에서도 이 후보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데 대해서도 그는 "소통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수준 높은 정당이 됐다"는 점을 이 사태의 의미로 꼽았다. 그는 인천연합 활동 전력 때문에 '공산주의자' 소리를 들어야 했던 데 대해 "황당한 사건"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 철 지난 구태 정치를 방치한 국민의당이 매우 걱정"이라고 했다. (☞관련 기사 : 국민의당 예비후보, 색깔론 내세운 노이즈 마케팅 물의)

그는 "북한은 보편적 민주주의와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국가이며, '3대 세습'도 보편적 상식에서 볼 때 납득할 수 없다"면서도 "단지 북한을 독재국가라고 비난하고 그곳의 지도자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인권 문제를 포함한 북한 내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후보는 '계파의 결정이 당의 결정이 되지 않는' 정의당에 대해 "우리 당이 정당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3년간 우리가 실험을 해 봤다"며 "'당 위의 정파' 체제도 걷어냈고,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하나의 가치와 지향으로 응집시키는 것도 해 봤다. 경쟁하면서 상대방을 칭찬하는 당 문화도 만들어 봤다. 다음으로는 대안적인 정당 시스템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다만 "이번에 정의당이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를 70명밖에 못 냈다. 당이 '허리'층이 약하다"고 걱정하며, 20대 국회에서 자신이 할 일 가운데 첫머리에 "정치적으로 단련되고 지역 유권자들을 조직할 수 있는 간부층을 만드는 것"을 꼽았다. 기자가 '그건 국회의원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당 대표 출마 선언인가?'라고 묻자 그는 답하지 않으며 "좋은 정당을 만들기 위해 더 큰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며 "그런 일(간부층 양성)을 책임질 만한 위치에 도전은 해보고 싶다"고만 했다.

그는 20대 국회에서 자신의 꼭 발의하고 싶은 법으로는 '생활동반자법'을 들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되다 보니 사회적 최약자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혐오까지 나타났다"고 지적하면서 "19대 국회에서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가 차별금지법을 입법 발의했다가 기독교계의 반발에 입법을 철회했는데, 진보 정당이 혐오·차별·배제에 시달리는 사람을 대변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소수자 대변이라는 상징적 의미 뿐 아니라, 전체 가구 4분의 1이 1인 가구일 만큼 시대적 문화적 변화가 큰 상황에 맞춰서도 생활동반자법을 입법 발의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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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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