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착시
사상 최강의 대북 제재국면이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공조체제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일견 미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등 유관국들도 북핵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여 대북 제재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분석적인 시각에서 볼 때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는 유관국들은 각자 한반도 문제를 넘어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대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월 29일 0시를 기해 일본에서 '존립위기 사태', '국제평화공동대처사태' 등 전수방위 원칙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안보법이 시행되었다. 이제 일본은 군사력 투사범위도 본토와 근해를 넘어 일본 해상보급로(sea lane)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대전략'을 담은 안보법이 한반도를 넘어 남중국해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중국해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장이며, 따라서 이들 3국의 '대전략’ 구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지역에 해당한다. 남중국해는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출발점이자 중심이며,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의 핵심인 해군전력 재배치가 집중될 지역이다.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남중국해의 도서들에 대한 군사기지화가 완성될 경우 미항모함대의 작전은 심각하게 제약받으며, 일본의 해상보급로 역시 중국의 군사위협에 노출되게 된다. 반면 강화되고 있는 미일 동맹체제를 기반으로 일본의 적극적 군사력 투사 정책이 전개될 경우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미일의 군사력 확장이라는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이 경우 중국은 베트남과 필리핀 등 남중국해 전역에서 군사적으로 포위되는 형국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중국은 남중국해의 안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전략’의 충돌이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군사적 긴장이 첨예하게 높아지는 이유이다.
최근 워싱턴에서 개최된 핵안보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대북제재의 전면적이고 엄격한 이행’을 약속했지만, 방점은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 반대에 있었다. 시진핑 주석은 핵안보정상회담에서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강력히 반대한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면서, “지역의 전략적 균형에 영향을 주는 조치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시주석이 사드와 관련하여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접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처음이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군사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반접근지역거부(A2AD)전략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미국 항모함대의 접근을 저지하는 것이다.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서해와 백두산 북쪽지역에 배치된 항모저지 대응수단의 상당수가 미국의 레이더망에 노출될 수 있다. 중국이 사드배치를 강력히 반대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시선은 한반도와 북핵문제에 집중되어 있지만,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주요 관심사는 남중국해지역 주도권 장악에 있다. 이 국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북핵이 아니라 자국의 핵심이익이며, 경우에 따라 북핵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북핵문제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미·일과 중국의 안보전략 구사를 위한 구실과 명분으로 활용될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해야 한다. MIT 명예교수인 노엄 촘스키가 지난 2월 국내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북한에 무관심하고 별로 걱정도 하지 않는다"고 한 말의 진의를 곱씹을 때다.
한미동맹에 대한 착시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 등 북핵 위기가 심화될 때마다 B-52 전략 폭격기와 F22 전투기와 같은 최첨단 군용기를 한국에 급파하여 이를 공개하고, 이어 핵항모전단을 부산항에 입항시켜 한국에 대한 방어의지를 과시한다. 현 상황에서 한미동맹은 한국의 안보에 있어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며,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많은 긍정적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미국의 일방적 시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은 냉전기 자유진영의 최전선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지역이었다. 향후에도 상당기간 한미 양국은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문제는 북핵 위기의 심화로 한국의 안보 위협이 점차 복잡해지고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한미동맹 일변도의 전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배치 협의는 핵탄두 소형화 가능성이 있는 4차 핵실험 직후가 아니라 미국을 겨냥한 은하3호 발사 이후에 개시되었다. 북한의 ICBM 기술은 아직 의문이며, 필수적인 재진입 시험도 이루어진 바 없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엄밀하게 말해 한반도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북한이 한반도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스커드 B, C, ER, 그리고 노동 미사일을 최대 900여기 실전배치하고 있으며, 이들 모두 핵탄두 장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안보를 우려했다면 사드 배치 협의는 은하 3호 발사가 아니라 4차 핵실험 직후에 개시되었어야 한다.
사드는 1개 포대로 요격 미사일이 48발에 불과하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미사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발사할 경우 DMZ 이남 지역의 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사드 1개 포대는 주한미군의 방어목적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군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미군 화력과 연합한 선제공격도 북한이 구축하고 있는 수많은 대남 공격거점을 고려할 때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미국 확장억제력에 대한 의존 역시 궁극적인 결정권을 미국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대응방안이 될 수 없다. 유사시 최종적인 선택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했던 군사동맹 대부분이 파기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군사동맹은 상대방이 아닌 자국의 안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북핵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한국의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우리 스스로의 자구책 마련과 노력이다.
압박정책에 대한 착시
대북 제재국면이 한 달여 경과한 4.13 총선 직전 중국 내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이 집단으로 탈출하여 한국으로 입국했다. 이어 북한 정찰총국의 대좌(대령급)가 탈북한 사실도 보도되었다. 때맞추어 대북 제재와 압박의 효과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기사들이 봇물을 이뤘다. 그러나 유례를 찾기 어려운 13명의 집단탈북이 대북 제재 한 달만의 효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아무리 중국의 협조가 있었다 해도 이 정도의 탈북은 준비와 기획이 시간을 요하는 일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정찰총국 대좌의 탈북도 이미 2년이나 경과한 일이다. 향후의 유사한 탈북을 고려할 때 기밀을 유지해야 할 일을 대북압박의 결과라고 공개하는 것은 자충수에 가깝다. 중국 당국이 이번에는 '합법적'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묵인'했지만, 북중간 특수 관계에 비추어 향후에도 중국이 동일한 협력을 제공할지는 미지수다.
정부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 이후 개성공단사업과 나진하산 프로젝트 참여를 역시 중단하고 이후에도 실질적 효력 여부를 떠나 추가적 독자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압박으로 인한 효과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일반적인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다. 단순한 적대관계를 넘어 북한은 언젠가는 통합되어야 할 대상이며,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에 해당한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만으로 정권교체와 체제변화를 유도한 사례는 거의 없다. 독재국가에 대한 강력한 국제제재의 경우 대부분 그 피해는 일반주민에게 돌아간다. 독재정권에게 중요한 것은 정권안보이며 민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북관계의 특수성상 대북 제재국면에 있어서 김정은 정권에 대한 압박의 심화와 더불어 북한 주민의 인도적 위기를 방지하는 신중한 대안이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무차별적인 압박의 피해는 결국 북한주민에게 집중되고 결과적으로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만뿐만 아니라 대북 제재를 가속화하는 한국과 국제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정권에 대한 효과적인 압박과 더불어 체감할 수 있는 대(對) 주민 정책도 시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방적 관여정책(preventive engagement policy)'의 모색
핵을 체제생존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체제변화가 올 경우 독재정권의 기득권이 대부분 상실된다는 점에서 강요와 압박에 굴복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설사 김정은 정권의 붕괴 상황이 도래할 경우에도 또 다른 독재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으며, 통일 여건의 형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시민사회의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대안세력의 형성과 민주주의 요소가 자생적으로 발현될 토양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리비아 등 아프리카와 중동 독재정권이 붕괴되거나 약화됐지만 민주주의체제 형성은 지체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요소가 부재할 경우 독재국가에서의 행동정향과 심리의 잔영이 지속적으로 지배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하루 속히 북한의 핵위협을 해소하고 통일을 준비해야 하며, 그 길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북한 내부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양을 길러주어 그들 스스로가 핵 의존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압박정책을 넘어 적극적인 예방적 관여정책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예방적 관여정책은 북한 내 긍정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견인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북한 주민의 인도주의 위기에 대한 무한책임 실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적극 개입, 북한 내 변화세력 형성을 위한 지원, 외부정보 유입과 탈북민에 대한 적극적 지원체제 구축 등 북한 주민의 신뢰감 형성을 위한 공세적이고도 전방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압박을 통해 북한이 변화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전방위적 노력과 관여의 확대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남북관계가 현재와 같은 긴장과 대결 구도 속에서는 실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안진단'은 평화연구원 홈페이지에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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