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에 세종호텔이 있습니다. 세종대학교가 운영하는 학교법인의 수익 사업 호텔입니다. 1966년 12월 20일 문을 열었으니 꼭 50년이 되었습니다. 세종호텔은 재벌들이 운영하는 최상급 호텔은 아니지만, 특1급 호텔로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호텔입니다.
이 호텔에서 일하는 고진수 씨는 일식 요리사입니다. 2001년 세종호텔 일식당 '후지야'에 입사해 일하다가 세종호텔이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맛과 훌륭한 서비스를 선보이는 뷔페"라고 홍보하는 '엘리제'에서 즉석 일식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주말 요금이 6만1000원으로 비싼 뷔페입니다.
고진수 셰프는 요리하는 일이 행복합니다. 그 동안 호텔에서 정규직 300여 명이 오순도순 일했습니다. 후배들이 비정규직으로 들어오더라도 1년이 되면 정규직이 되었습니다. 노동이 존중받는 일터에서 최고의 서비스와 최고의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호텔 일식 셰프의 행복한 요리 노동
그런데 113억 원에 달하는 회계 비리로 물러났던 세종대 주명건 전 이사장이 세종호텔로 복귀한 후 호텔이 달라졌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복수 노조 창구 단일화를 이용해 회사 측 기업 노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고진수 셰프가 가입한 민주노총 세종호텔노조는 소수 노조가 되었습니다.
회사는 정규직 노동자를 점점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5년 새 130명으로 반토막이 되었습니다. 사내 하도급과 용역이 대폭 늘었습니다. 1년 후엔 정규직이 되었던 계약직 노동자는 2년이 되기 직전에 잘리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정규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종호텔은 연봉제를 도입해 연장, 야간, 휴일 수당을 모두 연봉에 포함시켰습니다. 2013년 4500만 원이던 한 직원의 연봉은 2015년 2990만 원으로 30% 줄었습니다. 매년 연봉을 10~30%씩 삭감하고 있습니다.
세종호텔노조 조합원인 한인선 셰프는 1978년 문을 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급 한식 뷔페 '은하수'의 주방장이었습니다. 최고의 맛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텔 경영자들의 관심은 돈이었습니다. 은하수를 '엘리제'로 개명하고, 요리사 수를 계속 줄여나갔습니다.
23명이 일하던 한식당 요리사는 15명으로 줄었고, 그 중 7명이 비정규직입니다. 30년 경력의 한인선 셰프는 노조 활동으로 밉보여 출장 뷔페로 쫓겨났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생판 모르는 업무로 강제전보를 시켰습니다. 급기야 회사는 강제 전보에 응하지 않은 김상진 전 노조위원장을 최근 해고시켰습니다.
정규직 셰프가 줄어들면 요리의 맛은?
고진수 노조위원장은 최근 출장 뷔페에 나갔습니다. 세종호텔 출장 뷔페는 예상 인원에 맞게 음식을 준비하고, 혹시라도 모자라면 즉석에서 요리를 해서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 예비 음식까지 모두 만들어 와야 합니다. 손님들은 뷔페 최고의 맛인 '즉석 요리'를 맛보지 못했고, 예상보다 인원이 적게 와 남은 음식은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세종호텔 고진수 노조위원장이 행복한 요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후원 주점 요리입니다. 최근 서울 신촌의 한 레스토랑에서 열린 동양시멘트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후원 주점에서 그는 주방장을 맡아 연어 샐러드를 만들었습니다. 대형 연어 한 마리가 그의 칼끝에서 작은 토막으로 분해돼 최고급 연어 샐러드로 태어났습니다.
쌍용자동차, 코오롱, 스타케미칼, 사회보장정보원 등 해고 노동자들의 후원 주점 주방장은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도맡아 했습니다. 그의 요리를 맛본 노동자들은 감탄했습니다. 요리 노동이 밥벌이인 노동자가, 자신의 재능을 살려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동입니다.
해고 노동자 주점의 주방장이 되다
'박근혜표 노동 개악'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고 있는 세종호텔 노동자들에게 무언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4월 28일 저녁 6시 세종호텔 앞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유별난 연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박근혜 노동 개악에 맞선 당당한 싸움, 세종호텔 조합원을 위한 연회 '명동 연가(戀歌)'"입니다.
기륭전자 유흥희 분회장은 요리를 못하지만 '월남쌈'을 연습해 연회에 가져오려고 합니다.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은 강원도에서 맛볼 수 있는 전병 요리를 준비합니다. 해고 노동자들만이 아닙니다. 문화, 인권, 종교, 법조 등 다양한 곳에서 세종호텔 조합원들을 위한 연회에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5년 한국 복지 패널 기초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교 4~6학년생 아동 458명에게 장래 희망을 물은 결과 10명 중 4명은 요리사, 연예인, 운동선수 등 문화 예술 및 스포츠 계통의 직업을 장래 직업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리사가 포함된 '조리 및 음식 서비스직'은 10.42%가 1순위(2순위 9.52%)로 선택해 의사, 간호사, 약사, 한의사 등이 포함된 '보건·사회복지·종교 관련직'(1순위 7.81%, 2순위 7.82%), 판검사, 변호사, 공무원이 속해 있는 '법률 및 행정 전문직'(1순위 6.26%, 2순위 10.27%)보다 인기가 높았습니다.
초등학교 장래희망 1위 요리사는?
하지만 요리사들의 삶은 힘듭니다. 하루 10시간, 주 6일 노동에 월급은 최저 임금이고 10년이 지나도 200만 원을 넘기 힘듭니다. 호텔롯데는 비정규직 비율이 45%, 호텔신라는 49%라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했습니다. 요리사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지만, 최악의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면 5월 1일 노동절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최고의 요리와 최상의 서비스를 하는 호텔 노동자들. 이들의 노동을 생각하며 '세종호텔 노동자들을 위한 연회'를 엽니다. 이들에게 1급 요리는 아니지만, 마음과 정성이 담긴 요리를 준비해 대접하는 자리입니다.
최고의 서비스를 대접하는 노동, 호텔의 경영진만 돈을 버는 세상이 아니라 호텔 노동자들도 최소한의 대우를 받을 수는 없는 걸까요?
(참가 신청 :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010-9664-9957 박점규), 후원 : 국민은행 533302-01-358495 오진호(비정규직없는세상))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