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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신라, 혈투 속에서도 교류했다…지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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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구려·백제·신라, 혈투 속에서도 교류했다…지금 우리는?

[평화통일시민강좌] <1>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6.15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평화통일 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2회째를 맞은 평화통일 시민강좌는 남북 교류협력 재개 촉구를 주제로 오는 6월 25일까지 총 5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이번 강좌에는 겨레말큰사전 편찬과정, 북한을 여행하고 돌아온 외국인 사진작가에게 듣는 북한 이야기, 20년간 의료 지원을 해 온 민간단체의 경험담 등을 직접 듣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5월 14일 진행되는 제2강에서는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의 강연을 통해 개성공단 폐쇄로 잃은 것들을 되짚어 보고 남북관계 복원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첫 강좌로 지난 4월 30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인 정호섭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의 '남북이 함께 고려의 발자취를 찾다-민족공동 문화유산 관련 남북교류협력의 역사와 평가'를 들어봤습니다.

정 교수는 지금처럼 남북의 모든 채널이 막혀있는 대결 구도 속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사업이 비정치적인 문화·역사·학술 분야의 교류라면서, 남북의 문화 교류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정 교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저는 현재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십여 년 동안 활동하고 있는 정호섭입니다.

제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도교수님인 강만길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는 분단시대의 극복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소명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같은 '글로벌'한 시대에 이에 걸맞은 인식을 가지기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저는 만주를 많이 가는데요.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땅에서 '예전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삼면이 바다고 한 면은 막혀있는 섬 같은 반도에서 사는 우리들은 생각도 반도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주는 우리와 자연환경이 다릅니다. 그것을 보고 산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은 사고의 스케일이 다릅니다. 유럽을 비행기가 아닌 철도로 갈 수 있다는 것, 우리와 유럽이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교류협력 합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로 남북교류의 장이 마련되고 80년대 이산가족 방문과 예술공연단 방문이 있었으나 남북교류협력의 본격적인 장을 마련한 것은 2000년 6.15공동선언이었습니다.

6.15공동선언 4항에 제반 협력, 교류 활성화로 신뢰를 구축한다는 내용이 있고 2005년 17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개성지구 역사유적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07년 10.4선언 이후 제1차 남북총리급회담(2007. 11. 16.)에서 남북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역사교류와 관련하여 역사유적 및 사료 발굴 보존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을 각 항목에 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남한은 통일부가, 북한은 통일전선부가 교류협력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민간교류는 남한의 민간단체와 북한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통일전선부 산하 기구)가 담당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순수한 민간교류가 아닙니다.

남북역사교류 사례들

① 전시

남한에서 북한 소장 유물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2003년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고분군이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개성에서 전시회와 토론회를 진행했습니다. 이 전시회를 기반으로 해서 6.15공동선언 발표 5돌과 조국광복 60돌 기념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어 고구려 유물 60점을 전시했습니다. 고려대와 서울시 협력 사업이었는데 이때 남한에서 유물보험도 들고 운송도 책임지고 유물보존도 제대로 해서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북한전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② 단군릉에 대한 학술회의

단군릉에 대한 학술회의도 했습니다. 단군릉은 장군총처럼 복원하였는데 훨씬 크게 지어 놓았습니다. 북한이 단군릉을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대동강 문명'입니다. 세계 5대 문명 안에 대동강 문명을 넣어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대동강을 중심으로 세계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단군릉을 갔었는데요, 무덤양식이나 출토유물을 보니 5세기 유물이었습니다.

북한이 단군 부부의 능이라고 하니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고 나중에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과 선생한테 "선생,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오. 역사학자로서 이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따졌습니다. 그 선생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얼굴이 벌게지더군요.

북한과 역사 교류하면서 '노터치' 하는 것이 있습니다. 1910년 이후 현대사 부분은 토론 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혁명 투쟁사가 현대사이므로 우리와는 현대사 구조가 다릅니다. 아무리 토론해도 견해차가 크다 보니 자연적으로 북한과의 역사교류는 전(前)근대사 중심으로 하게 됐습니다. 북한의 역사전통은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입니다. 수도가 모두 북쪽에 있죠.

북한은 조선 시대 역사에서는 외세와의 투쟁사,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중요시합니다. 북한은 유물사관과 민족사관이 뒤섞여 있어요.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를 봐도 자신을 공산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북한의 역사학은 민족사관이 있습니다.

북한의 역사학은 1970년 이전까지는 남한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유럽에서 근대학문을 공부했던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이 해방 후 월북했거나 납북되었기 때문에 남한에 남아있던 사학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실증사학을 공부한 이병도 정도만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최고 엘리트들이 북한에 가서 역사학의 체계를 잘 세웠는데 1968년 주체사상이 나오면서 학문의 자유가 제한됐습니다. 학문은 자유가 제한되면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이설이 나오고 토론하고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발전이 되는데 딱 하나의 틀에만 맞추라고 하면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소 북한 역사학이 문제를 안고 있죠.

그래서 남북역사교류가 중요합니다. 역사인식의 차이가 큰 부분이 있으므로 통일을 대비하여 역사교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③ 일제시대 및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토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를 얼마나 수탈했는지에 대한 토론회나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에 대한 남북토론회도 열렸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및 독도 강탈책동 반대 학술토론회도 했습니다. 북한 역사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독도에 가서 세레머니를 하는 것도 기획했었습니다.

④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남북역사교류

올해와 같이 남북교류가 전면적으로 차단되거나 조건이 안 맞는 경우에는 제3국인 중국이나 러시아, 유럽에서 하기도 합니다. 올해 7월,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 연변대, 북한이 중국 베이징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안중근의거 100주년 토론회도 해외에서 열렸습니다. 특히나 이 사업은 북한이 아주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김일성주석 생전에 안중근 유해 찾기부터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사안이었습니다.

⑤ 북한 문화재 복원·발굴·실태조사

북한 문화재 남북공동 복원·발굴·실태조사도 했습니다. 금강산 신계사 발굴 및 복원, 개성공업지구 발굴조사, 고구려 유적 남북공동 학술조사, 고구려 궁인 안학궁 발굴조사, 고구려 고분군 남북공동 실태조사 및 보존사업 등이 있었습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는 2007년부터 시작되어 10년간 남북이 함께 한 사업입니다. 이 사업은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점, 민관이 함께 했다는 점 등에 의미가 큽니다. 보통 북한이 관대 관의 교류는 안 하려고 하는데, 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일이 됐을 때 북한의 문화재도 정부가 나서서 관리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발굴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위탁한 형태로 10년간 민관 협력으로 진행됐습니다.

▲ 2015년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 착수식 ⓒ문화재청

⑥ 중국대학을 통한 간접지원

중국대학을 통해 간접 지원한 발굴도 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연변대학교를 통해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 벽화고분 발굴조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문화재 현황 조사와 문화재 안내서도 꾸준히 출판되고 있습니다.

남한의 무진동 차량을 타고 함경도로 올라간 북관대첩비

약탈문화재 남북 공동 반환 협력사업도 있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었던 북관대첩비(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공을 기려 세운 비.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2005년 반환되어 2006년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193호로 지정되었다. 편집자)를 문화재청이 주도하여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은 뒤 원래 이 비가 있었던 함경북도 길주군에 세워두기 위해 북한에 비를 인도했습니다.

북관대첩비가 저의 선조와 관련된 비였습니다. 반환할 때 북한의 꽤 높은 사람이 저한테 전공도 아닌데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냐고 물어봐서 "저의 할아버지입니다"라고 하니 "그러면 잘해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밥 먹고 나오는데 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항렬을 물어보며 족보를 따졌습니다. 봉건적인 것을 타파하려는 북한에서 항렬을 따지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북관대첩비 반환할 때 남한에서 북한에 지원한 것이 박물관에서 유물 운송할 때 쓰는 무진동 차량입니다. 제가 고구려 전시할 때 북한에서 무진동차를 보고 나중에 유물 돌려줄 때 그 차도 한 대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정도 돈이 없어 못 줬는데 북관대첩비 반환할 때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차량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더불어 아리랑도 공동 등재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남한만 등록했습니다. 북한의 아리랑에는 김일성, 김정일 지도자를 찬양하는 아리랑도 있는데요, 북한에서 이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해서 안 됐습니다.

12년간의 역사교류 성과를 날려버린 개성공단 중단 조치

2004년 이후 북한이 사회문화창구를 민화협으로 일원화시킨 이후 남북교류가 양적 질적으로 활성화 되었습니다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대부분 중단되어 작년까지 개성만월대공동발굴 사업과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유일하게 남아있었습니다. 2010년 천안함 사태와 5.24조치로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되었을 때 개성만월대 사업은 수해복구 명목으로 유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개성만월대 공동발굴사업이 유일하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개성공업지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성공업지구가 문을 닫았습니다. 남북역사교류사업 측면에서 2004년 시작해서 2016년까지 12년 동안 공들인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개성공단 중단은 굉장히 무식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핫라인 정도는 남겨놓고 중단을 해야지 남북교류 창구도 다 없애고 12년간 투자한 금액을 날려 보내니 아쉽습니다.

개성공업지구로 들어가는 돈이 북한의 미사일을 만드는데 과연 얼마나 쓰일까요? 1%도 안 됩니다. 제가 매년 한두 번씩 개성에 갈 때마다 개성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옷이 달라지고 자전거가 좋은 것으로 바뀌고 집 외장이 달라집니다. 태양열 판도 생깁니다. 개성공업지구가 개성주민의 생활 수준을 높여놨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 정부 입장에서도 유리한 것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 치고받고 싸웠지만 문화 교류는 했다

저는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전까지 통일 논의는 좌파진영의 논리였습니다. 통일대박론은 우파진영이 통일 논의를 가져간 엄청난 선언입니다. 물론 경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흡수통일을 전제한 논의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통일대박을 외치니 보수 언론에서마저 통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를 몰아갔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통일논의를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습니다.

물론 의도가 순수하거나 미래지향적이지 않습니다. 통일준비위원회를 꾸렸는데 그 안에 역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통일논의가 흡수통일을 전제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지난 2014년 드레스덴 선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남북교류를 민족 동질성 회복, 인도적 지원, 나무 심기로 제한했습니다. 개성만월대 남북공동발굴 사업은 민족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박근혜 정부가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다 불허했습니다.

남북교류협력 사업은 지속적인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로 진행됩니다. 개성공단이 대표적인 사례이죠. 갑작스런 중단으로 투자금액을 다 날려버리지 않았습니까. 정치 경제 분야의 교류협력은 정세에 민감해야 하겠지만, 문화·학술 교류는 정례적·상시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날 고구려·백제·신라도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지만 문화교류는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정치적 대립관계라 할지라도 문화·학술 교류마저 끊는 것은 아쉽습니다.

▲ 정호섭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기획총괄위원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남북문화유산교류는 통일국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

남북문화교류협력 사업은 작은 사업이기 때문에 남북 간 화해협력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개성공업지구 만월대 발굴 사업 하면서 개성의 휴전선 근처에 있던 군부대가 개성 뒤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은 다시 앞으로 전진해 있습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북한이 개성공업지구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쓰면서 독자적으로 만월대를 발굴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성공업지구 폐쇄로 우리가 잃은 것이 많습니다.

문화유산 관련 사업은 결국 통일 국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입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문화재 보존이 미비한 상황인 현 시점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킬 수 있는 사업입니다. 북한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남한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여러 조건 중에 하나가 '개방'입니다. 실사단이 직접 가보고 점수를 매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예외적으로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도 그러한 도움을 줘서 고구려 고분이나 개성 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보호 협약이 작동됩니다. 따라서 이는 한반도 내 전쟁 방지에도 일정 부분 관련성이 있습니다.

학술적인 면에서 남한은 고구려, 발해, 고려사가 약한 부분이고 북한은 신라, 백제사가 약한 부분이므로 서로 한국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고 동북공정 문제나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공동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박물관이나 장비, 발굴 수준을 보여주면 북한의 학문적 수준과 발굴 기술 등도 함께 올라갑니다. 이런 것은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습니다. 남북교류협력은 보이지 않는 효과가 매우 큽니다.

북한은 남북교류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유용한 사안에 대해서만 선택적 호응하고 남한도 정치경제 분야가 우선이므로 문화유산 교류에는 다소 인색합니다. 지금은 정부가 정치경제 분야가 잘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유산에 지원하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잘 안되면 문화, 역사교류를 지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죠.

퍼주기 논란? 역사교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남북교류가 퍼주기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원이 북한의 경제와 군사 부분에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성공업지구에 들어가는 돈이 미사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면서 구체적 데이터는 없습니다.

민족문화유산은 경제적 잣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골동품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문화교류 자체가 비과시적이고 간접적이며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계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한 개성 만월대 지역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고려 시대 금속활자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실제로 제가 고구려 고분군 조사할 때 벽화군 10개를 요청해서 열었고 그때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비용은 몇억 들었습니다. 그때 사진들이 남한의 모든 관련 출판물에 쓰이고 있고 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든 영상도 그 사진들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몇억 이상이죠.

또 통일부가 북한에 돈을 못 주게 하기 때문에 현물을 줍니다. 예를 들면 육로로 신의주에 갔을 때 북한의 문화재 보존 시설 건축할 때 쓰라고 중국에서 벽돌과 타일을 사서 줬습니다. 실제 구성 주체들에게 가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민족문화재 보존이라는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한 사업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인내와 시간을 가지고 추진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남북관계, 첫눈에 반하는 남녀관계와 달라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남과 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한 상태에서 서로가 조금이라도 타협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가기 위한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부터 하고 나중에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만나면 조금 더 진일보하게 추진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북관계가 남녀관계처럼 첫눈에 반하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문화교류 사업은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 구도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으며 청와대나 통일부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남북교류가 하나도 안되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사업은 역시 만월대 같은 비정치적인 문화, 역사, 학술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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