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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후' 한국의 선택은 친미 혹은 친중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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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후' 한국의 선택은 친미 혹은 친중 뿐인가? [프레시안 books] <냉전 이후>
서평에 관한 두 개의 잘못된 믿음이 있다. 첫 번째는 '그 책을 다 읽고 쓰는 일'이 서평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책의 전체를 말하는 일'이 서평이라는 것이다. 논의를 위해 두 개의 오해를 시간 순으로 나누었지만, 실상 두 개의 오해는 하나로 연결 된다. 즉 서평은 '그 책을 다 읽고, 그 책의 전체를 말 하는 일' 혹은 '그 책의 전체를 말하기 위해, 그 책을 다 읽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서평도, 독서도 그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모월모일까지 서평을 써야 할 (장르 불명의) 500여 쪽 분량의 책이 있다고 치자. 앞서 말한 것처럼 서평은 '그 책의 전체를 말하기 위해, 그 책을 다 읽는 일'이거나 '그 책을 다 읽고, 그 책의 전체를 말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은 500여 쪽의 책을 다 읽기 전에는 결코 서평 쓰기에 착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23쪽에서 갑자기 그 책을 말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화제(topic)를 발견했다면, 혹은 112쪽에서 그 책과 연관하여 꼭 짚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주제(Thema)를 발견했다면 500여 쪽의 책을 다 읽는 일이 오히려 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500여 쪽의 책을 다 읽고 나서, 예의 23쪽이나 112쪽으로 돌아와 그 화제와 주제를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평은 '그 책을 다 읽고 쓰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텍스트는 단일한 목소리나 이야기가 아닌, 여러 겹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 디스코텍 천정에 달려 있는 미러볼(mirror ball)이 무수한 작은 거울 조각으로 쌓인 구체(球體)이듯, 텍스트 역시 여러 겹의 주제와 화제로 만들어진 다면적인 구체다. 하므로 완벽하다고 말해지는 그 어떤 서평도 그 책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번으로 발본색원되는 텍스트는 당연히 없으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을 통해서도 발본색원되지 않는 것이 텍스트라고 해야 한다. 서평이 '그 책의 전체를 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이며, 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종종 잊어버리는 교훈을 다시 일깨운다. 책은 여러 번 읽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느 책에 관한 서평 역시 되풀이 쓸 수 있어야 한다. 책은 새로 읽을 때마다 독자에게 새로운 주제와 화제를 나누어주며, 그때마다 미러볼의 무수한 작은 거울조각과도 같이 새로운 서평이 씌어 질 수 있다. 텍스트에 대한 발본색원은 이런 방식으로서만 가능하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서해문집 펴냄)는 적어도 세 가지 주제 혹은 화제로 구성되어 있다. 1) 분단 이후 남한과 북한의 통일 전략과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비사 2)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미국·중국)의 지정학적 이해 갈등 3) 냉전과 냉전 이후를 설명하는 문명사적 변환. 대개 남한과 북한의 분단 체제를 취급하는 책이나 담론은 1)과 2)로 자신의 임무를 마감하는데, 유독 김기협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 바로 3)의 문명사적 설명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 글의 끝에 잠시 언급하기로 하고, 550여 쪽이 넘는 <냉전 이후>를 읽는 중에 나를 자꾸만 뒤로 끌어당기면서 '서평에 관한 잘못된 믿음'을 따르지 마라고 유혹한 '(되돌이표) 지점'에 관해 먼저 거론하겠다. 읽는 사람마다 '(되돌이표) 지점'도 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이 책 1부 마지막에 실린 '유기론적 세계 체제 형성의 가능성을 바라본다'(93~99쪽)가 그것에 해당한다. 거기서 대목을 인용한다(인용문 속의 []는 인용자의 것이다).

앞에서 중국의 '전통 시대 천하 체계의 복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 천하 체계란 말에서 내가 초점을 두는 의미는 유기론적 관계다. (93쪽)

[모든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물리학적 발견에 맞추어 모든 사회가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관점은 19세기를 풍미하면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뒷받침해 주었고, 사회과학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후반부에는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이 사라졌지만 그 영향을 받은 사상과 제도는 살아남았다. 국제 사회가 독립적 국가로 구성된다고 하는 '만국공법' 사상도 그중 하나였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천하 체계는 이에 비해 유기론적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어느 구성원도 절대적 독립체가 아니었다. 큰 나라에 '자소(字小)'의 책임이, 작은 나라에게는 '사대(事大)'의 책임이 있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지속적인 상호 책임 관계로 얽혀 있었다. 각 나라의 내부도 원자화된 개인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본분에 따라 역할을 맡는 군군신신(君君臣臣)의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봉건적'이라고 하는 사회 체제다.

하급자의 충성과 상급자의 승인(및 보호)를 교환하는 봉건 관계를 근대인은 '인신 예속'이라 하여 미개한 제도, 심지어는 사악한 제도로까지 여겨왔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절대시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 체계의 해체는 '만국 평등[=만국공법]' 이념의 자랑스러운 승리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만인 평등' 이념이 구호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오히려 이 구호는 현실의 불평등을 가려놓음으로써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호할 필요를 부정하여 세상을 정글 상태로 만드는 데 이용되어 왔다. '만국 평등'도 마찬가지였다. (95~96쪽)
두 인용문은 이렇게 말한다. 원자론에 입각한 서양의 국제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만국 평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만국 평등의 실상은 강대국의 횡포를 은폐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며, 원자론적 국제 질서가 만들어낸 '정글 세계'에서 제국주의가 생겨났다. 반면 중국 전통의 유기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국제 정치는 자소와 사대가 짝을 이루는 상호 책임과 호혜로 얽혀 있다. 서양 제국주의가 원자론에 입각한 패권주의라면, 중국의 천하 질서는 유기론에 바탕을 둔 강대국과 약소국의 공존과 협치다.

지은이가 <냉전 이후>에서 서양과 동양의 정치철학을 비교하는 까닭은 1991년 냉전 종료와 함께 '서세(西勢)'도 종료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약 500년 넘게 지구를 지배해 왔던 것은 서양이다. 하지만 냉전의 종료는 (최소한 동북아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해소"(554쪽)이며, 그것은 곧 새로운 문명을 호출한다. 권말에 붙은 지은이의 맺음말 '200년에 대한민국은 거의 주권 국가였다'에서 두 대목을 인용한다.

서세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원리로는 개인주의요, 체제로는 자본주의다. 개인을 완전한 독립체로 보고 그 능력의 발휘에 제약을 두지 않는 것이다. 힘 있는 국가가 약한 국가를 마음대로 침략하는 제국주의도, 사회 양극화를 가져오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이 원리와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555쪽)

그래서 '서세동점의 해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논하는 '세계 체제론'의 연구와 토론이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중국의 굴기가 한 국가의 성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의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향한 움직임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이 합쳐지는 곳이 바로 서세동점의 해소가 아니겠는가. (556~557쪽)

<냉전 이후>의 서평을 청탁받고 꾸물거리는 사이에 <한겨레> 이인우 기자가 도올 김용옥을 인터뷰한 '[토요판] 특집 도올의 한국, 도올의 중국 - "중국이 미국보다 조금 더 리니언트한 제국 되지 않을까"'(4월 23일치)가 나왔다. 이 대담에서 도올은 "중국은 또 하나의 미국, 미국의 21세기 후계자가 되어선 안 돼. 중국은 '뉴 오더'(새로운 질서), '뉴 아시아틱 오더'를 창출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밑줄은 인용자의 것이다).

국제 관계에서 강자는 늘 선악의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다. 문제는 21세기의 중국이 20세기 초반의 선한 미국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하려고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비관적 견해가 많겠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어디가 더 선한 제국이냐가 아니라, 중국이 미국보다는 조금은 더 리니언트한(관후한) 제국이 되지 않을까? 세계인들은 중국이 어떤 제국이 될 것인가를 미리부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조차 저 도덕성을 상실한 미국과 비교해 중국이 꼭 미국만 못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미래의 중국인들이 미국이 구현하지 못한 선한 제국으로서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거야. 중국은 맹자 이래 수천 년간 왕도의 위대함과 패도의 위험성을 학습해온 제국이다. 걱정할 것은 중국의 천하주의가 아니라 중국의 부흥 과정에서 표출되는 과도한 중화 민족주의다.

▲ 지난 3월 31일(현지 시각) 핵 안보 정상 회의 이후 양자 회담을 가진 버락 오바마(왼쪽 끝)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오른쪽 끝) 중국 국가 주석. ⓒAP=연합뉴스

김기협과 도올은 국제 관계에서 중국은 미국과 다른 정책을 취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그렇게 믿는 근거는 천하 체계(천하주의)라는 중국의 고대 정치철학이다. 두 사람의 발언은 중국의 천하 체계가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무척 다른 문화적 헤게모니 지배였다는 최근의 연구와 맞물리면서, 중국에 관한 새로운 눈뜨기를 주문한다. 하지만 친중파 혹은 김기협의 용어로 "중국 대안론[자]"(530쪽)라고 분류할 수 있는 두 사람과 달리,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는 혐중파도 있다. 일찍이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쓴 복거일이 대표적이다.

복거일은 "빠르게 늘어나는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점점 자주 그리고 깊이 침해되는 현상"(7쪽)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침해되는 현상을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화란 강대한 나라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가 강대한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강대한 이웃에게 점차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양보하게 되는 과정으로('적응적 묵종'), 20세기에 핀란드가 러시아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주권의 손상을 입으면서 생존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용어다.

지은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월터 래커의 말을 빌려, 핀란드화에 따른 적응적 묵종이 불러오는 가장 나쁜 것은 "사회의 도덕적 변질"(74쪽)이라고 말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힘센 이웃이 신뢰하는 후보만을 고위 공직에 선출하거나, 언론을 검열하는 '국내 조정'을 쉬지 않고 행한다. 그러면서 국가의 구성원 전체가 현실 도피와 위선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된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중국에 의한 핀란드화를 한껏 우려하고 있는 복거일은 한국이 그보다 앞서 겪은 '미국에 의한 핀란드화'를 절대 자성하지 않는다. 사회의 도덕적 변질이 '핀란드화/적응적 묵종'의 가장 나쁜 폐해라면, 대한민국의 미국화(Americaniz)만큼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킨 것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중요한 국가 정책이 미국의 이익과 합치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는 관행이고, 국익을 위해야 할 정치가나 고위 공직자들이 미국 정치인과 줄을 대기 위해 안달하거나, 아예 미국 정부의 '제5열'이 되는 것조차 불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열거한 도덕적 타락도 문제려니와, 외국군(미군) 장기 주둔과 외국군에게 자기 군대의 전투작전권을 헌납하고 되찾지 않는 것은 아예 도덕적 자살이다. 김기협의 말을 들어보자.

대규모 외국군의 지속적인 주둔은 '독립국' 자격에 실질적으로 저촉되는 조건이다. 한민족의 반도 국가 일천 년 역사를 통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도 전쟁 상황 외에는 중국 군대가 반도에 주둔한 예가 없었다. (…) 남한 정권이 미국의 국익을 도외시하고 민족의 복리만을 추구하는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은 주한 미군의 존재 위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50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거일이 미국에 의한 대한민국의 핀란드화를 묵살하는 까닭은 "미국은 역사상 제국주의적 특질을 가장 적게 보인 제국"(31쪽)이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보기에 미국이 행사한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선량"하며 "비공격적 특질"(이상 33쪽)을 가졌다. 반면 21세기의 초강대국이 예약되어 있는 중국은 냉전 종식 이후에 선의의 제국주의 역할을 떠맡은 미국과 달리,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줄곧 제국주의를 추구해 왔다고 말한다. 복거일은 그 증거로 중국이 "자신을 '천하(天下)'라고 부르는 관행"(43쪽)을 꼽는다. 미구(未久)에 닥칠 "중국의 제국주의는 미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일방적이고 압제적이고 공격적일 것이다"(44쪽)라고 말하는 그는 중국을 "가장 나쁜 형태의 제국주의"(45쪽) 국가로 만드는 동력으로 변질된 공산당과 극단적인 중화 민족주의 사이의 제휴와 악순환을 든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이미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압제적 일당(一黨)은 "자신이 잃은 정당성을 민족주의를 통해서 되찾으려" (48~49쪽)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경제가 발전해서 자유에 대한 중국 시민들의 열망이 커지면, 공산당 정권은 민족주의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49쪽)

세 명의 논객은 모두 중화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하지만 김기협과 도올이 천하 체계(천하주의·천하)를 서세와 미국 패권주의를 대체할 (오래된) 새로운 문명으로 반기는 것과 달리, 복거일은 그것을 전혀 새롭지 않은 오래된 야만으로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체 천하 체계란 무엇인가?

김기협은 <냉전 이후>에 "나는 최근에 자오팅양(趙汀陽)의 <천하 체계>(노승현 옮김, 길 펴냄)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서양 근대 정치철학이 국가 단위에 묶여 '세계 정치'를 성립시키지 못한 데 반해 중국의 전통 정치철학의 국가를 넘어 '천하'의 운영 원리를 탐구한 데서 향후 세계 질서의 형성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격하게 공감한다"(96~97쪽)고 썼다. 마침 나도 <시사IN>(제238호)에 '해군기지, 이 미련한 혐중(嫌中)론이여'를 쓰면서 이 책을 소개한 바 있다.
미국의 퇴락과 중국의 굴기는 금세기의 상식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인은 백인도 아니면서, 황화(黃禍) 수위의 혐중 감정이 팽만 하다. '중국 때리기'의 세목들이 한국의 꼴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그렇다. 우리가 현대 중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마오쩌둥·문화혁명·홍위병 정도인데, 그나마도 역사적 맥락은 잘 모른다. 선입견에 바탕한 혐중의 정체는 조선말에 있었던 위정척사 운동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 분들에게 자오팅양의 <천하 체계>를 권한다. 중국 전통의 세계관과 정치철학은 항상 '국가'보다 높고 큰 '천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작금의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민족주의는 서양의 것이지 중국의 사유가 아니다. 또 변화와 종합을 특징으로 하는 중국의 사유는 절대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중국 사상과 서양 사상의 차이를 결정지었다"(26쪽)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중국에는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근본주의가 번성할 틈이 없다고 주장한다. 칼 슈미트의 정치철학에서 보듯이 서양의 정치는 '적과 나'의 구별에서 시작되지만, '천하의 바깥'이 없는 중국 고유의 사유에서는 적이 필요하지 않다. 지은이를 무조건 지지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의 중국은 없으며, 다양하게 분기한 수 갈래의 중국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그것들과 접선하여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냉전 이후>(김기협 지음, 서해문집 펴냄) ⓒ프레시안
김기협은 '천하 체계'에 격하게 공감했다지만, <천하 체계>를 옮긴 노승현은 권말에 첨부한 꽤 길고 자세한 옮긴이의 말('천하로 세계를 사유하다')에 이 용어에 대한 '취급주의' 스티커를 붙였다. <상서(尙書)>, <주서(周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같은 고대 문헌에 수없이 나타나는 천하(=四海)는 자오팅양이 말하는 것처럼 "국가(state)도 아니고 민족/국가(nation/state)도 아니었던 정치/윤리 개념"인 게 맞으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천하가 근대적 국가 개념인 국가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자오팅양은 이 책을 2005년에 썼는데, 2007년에 발표한 '정치에 반대하는 정치'라는 논문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국 역사에 두 가지 정치 제도가 있다면서 "중국 고대에는 주 왕조의 천하체계와 진한(秦漢) 이후의 제국 체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정치 제도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에서 천하 체계를 배반한 정치적 사건으로서 만리장성의 축조는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이었던 천하 모델의 완전한 상실이었[다.] 요컨대 만리장성의 축조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 속하는 천하(=세계)를 천하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민족 국가(=제국)로 정의한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비판한다. 천하 체계가 중화 민족주의로 변질되거나, 반대로 중화 민족주의가 천하체계의 외피를 쓸 수도 있다.

<냉전 이후>는 1)남한과 북한의 통일 문제와, 2)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미국․중국)의 지정학적 경합을, 3)문명사적인 렌즈로 성찰하고자 한다. 이런 기획은 1), 2)의 방법과 설명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한반도의 모순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명론을 얘기하면 할수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내릴 주체적 판단이나 역사에 개입할 능력은 찾기 힘들다. '원자론적 문명(서양)이냐, 유기론적 문명(서양)이냐?'는 꽤 거창하지만, 문명론을 걷어내고 나면 '친중파로 갈아 탈 것이냐, 친미파를 고수할 것이냐?'의 문제로 축소된다. 문명론(사)적 설명은 한반도를 탁란(托卵)하는 조류의 일종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 미친 '환빠', 상고사(上古史)의 수렁에 빠진 김지하, 북한의 종교인 김일성주의는 탁란하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이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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