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 없는 양당제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금융패권에서 나온다. 군산업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빨아들인 군사패권은 '제국의 근육', 월가를 정점으로 구축된 금융패권은 '제국의 발톱'에 비유된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에도 이 세력의 장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사사건건 싸우는 듯 보이는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엔 예외적인 합의가 있다. 대외 정책이다. 미국의 외교 싱크탱크인 <포린폴리시인포커스>의 존 페퍼 소장은 "양당은 공히 엄청난 국방 예산과 미군의 전 세계 파병,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방적인 군사행동까지도 지지한다"고 했다. 즉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오랜 합의이며, "이런 양당의 합의에 트럼프가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공화당의 수뇌부는 네오콘이다. 군사력을 앞세운 침략이 이들의 장기다. 네오콘의 호전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 행정부에서 확인됐다. 당연히 국가안보와 대외 정책에서 공화당 입장과 달리 튀는 발언을 일삼는 트럼프가 눈엣가시다. 짐짓 점잖게 트럼프를 '공화당의 전통적 가치와 어긋나는' 이단아로 규정하지만 속내가 사납다. 네오콘의 이론가이자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입안자였던 로버트 케이건이 일찍이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면 힐러리를 지지하겠다"고 한 발언에서 드러난다. 그럴만하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은 대외 정책에선 네오콘에 버금가는 호전파다. 타국의 정권 전복도 불사한다. 그는 국무부장관 시절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타도를 주장했다. 이란과의 핵협상엔 소극적이었다. 이란의 핵협상 타결은 그가 장관직을 그만 둔 뒤에 이뤄졌다. 클린턴은 이란이 핵합의를 파기하면 군사적 행동도 불사하겠다는 공약을 밝히기도 했다. 민주주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은 명분일 뿐, 클린턴의 위치는 군산업체의 이익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월가의 돈줄들도 차기 대통령으로 트럼프보다 클린턴을 선호한다. 지난 3월 기준으로 클린턴이 월가에서 모은 후원금은 420만 달러다. 이중 34만4000달러가 3월 한 달 간 모금됐다. 대선후보들에게 흘러들어간 월가 후원금 가운데 53%다. 트럼프 쪽으로 유입된 후원금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집계됐다. 게다가 클린턴은 지난 2013년엔 금융회사 골드만삭스에서 3번 연설하고 총 67만5000달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돈으로 8억 원에 이른다. 무슨 내용으로 강연을 했는지는 극구 밝히지 않고 있다. 월가와의 유착을 짐작할만한 내용이란 의심을 산다. 사실로 밝혀지면 엄청난 악재다. 미국이 잘 나갈 때는 군산업체와 월가의 금융자본, 공화-민주당의 독점적 정치체제가 문제되지 않았다. 국제주의와 자유주의가 미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었고, 실제로 전쟁과 금융자본이 미국에 돈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기축이 흔들렸다. 2001년 9.11 테러 이후부터 수행한 대테러전쟁은 실패로 귀결됐다. 미국은 늪에 빠졌다. 그 사이 고삐 풀린 금융자본은 미국마저 집어삼켰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졌다. 금융 쇼크를 일으킨 월가는 정부 지원으로 회생한 반면 서민들의 일자리는 위협받았다. 주류 동맹의 가면이 벗겨지고 허상이 드러났다. '공화당 대 민주당', '보수주의 대 자유주의'의 대결은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의미 없는 정치놀음이 됐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류의 합창은 현실의 불평등 앞에 공허한 외침이 됐다.'극혐' 트럼프를 끄집어낸 주류의 자업자득
트럼프는 '주류 대 비주류'의 대결로 선거판을 엎었다.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도 변화된 프레임을 이끌었다. 후보 지명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샌더스는 경선 막판을 승리로 장식하고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주류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뜻이다. 트럼프로서는 공화당이건 클린턴이건 허점 많은 상대들이다. 주류 동맹을 싸잡아 비판한다. 트럼프는 "난 이미 부자이기 때문에 군산업체와 월가의 자금 지원이 필요 없다"고 했다. 종잡을 수는 없는 그의 발언 속에서도 군사 전략을 앞세우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네오콘과 클린턴이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칭하며 내세우는 국제주의의 반대편에 서있다. 그가 러시아와의 화해를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문제는 유럽의 문제라서 미국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라고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미국이 실제로 군사적 위협을 받는 경우로 한정시킨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선 트럼프의 외교 노선을 '현실주의'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대외 정책은 오로지 미국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에만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그런 입장에 열광한다. 존 페퍼 소장은 트럼프 개인은 혐오스럽지만, 미국 주류들이 수행한 대외 정책의 맨얼굴을 드러낸 "쓸모 있는 바보"라고 평했다. 트럼프가 시종일관 초점을 두는 이슈는 미국의 국내 문제, 경제 문제다. 물론 그의 발언에 일관성은 없다. 다듬어진 경제 정책으로 제시된 바도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국내 문제를 탁월하게 해결할 것이란 기대를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환상을 자극한다. 트럼프의 대선 구호는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e Again)'이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썼던 대선 슬로건이다. 물론 트럼프의 입장은 공화당이 떠받드는 정통 레이거니즘과는 판이하다. 하지만 잘 나갔던 시절에 대한 유권자들의 향수만큼은 제대로 낚고 있다. 11월 대선까지는 여정이 길다. 그 사이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 배척 작전에 성공할지 모른다. 클린턴이 본선에서 그를 이길 수도 있다. 지금까지 트럼프가 드러낸 정치인으로서의 도덕성, 리더로서의 능력은 빵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선 시즌이 끝나고 트럼프가 정치판에서 축출된 속물 부동산 재벌로 돌아가면 미국이 처한 안팎의 모순은 해결될까? 미국 사회의 주류, 상위 동맹은 트럼프에게 이미 한방 먹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국제주의 대 국내주의', '정치 엘리트 대 이단아' 구도로 선거판을 짠다. 모순의 은폐다. 만약 전 세계가 '극혐'하는 미국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 역시 저물어가는 패권을 알아채지 못한 제국의 엘리트들의 자업자득이다. 미국에서도 정치는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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