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조선업의 구조 조정, 그리고 하청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2015년 연재된 '조선소 잔혹사', 그리고 지난 6년간 허환주 기자가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이 발간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스토리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후원금액의 일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돕는 데 쓰입니다. ☞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씨가 지난 5월 28일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을 하던 중,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역내에 진입하던 열차가 미처 김 씨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김 씨는 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신참이었다. 그의 나이 고작 열아홉.
서울메트로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도 아니었다.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은성 PSD 소속이었다. 서울메트로 스크린도어의 유지·관리를 담당하는 하청업체다. 김 씨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경찰 조사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매뉴얼대로 일하다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가방에서는 컵라면과 젓가락, 그리고 밥숟가락이 나왔다.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빨리 취업을 한 김 씨다. 그런 그가 한 달 일해서 손에 쥐는 돈은 겨우 백 몇 만 원. 그 돈으로 매달 100만 원씩 적금을 부었다. 남는 돈으로 동생 용돈을 주기도 했단다.
이런 일이 비단 지하철 하청 노동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내가 체험하고 취재한 조선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친한 형님과 LNG 탱크에서 작업했다가...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이병기 씨도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얼굴선이 가늘고 선한 눈매를 지닌 이 씨는 사무직에나 어울릴 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산에서 만난 이 씨는 얼굴만큼이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씨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은 나이는 서른둘. 첫 직장은 변압기를 생산하는 중공업 중전기 회사였다. 3년쯤 일했을까. 노동조합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것도 아닌데 억울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후 경주 공단에 취업해 용접공으로 일했다. 2년쯤 지나니 회의가 들었다. 하청 노동자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부산으로 내려가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씨는 자신이 독하지 못해 그런 것 같다 했다. 다시 울산으로 올라가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취업했다. 그때부터 조선소 하청 밥을 먹기 시작한 게 이제 10년이다.
그동안 일하면서 다치기도 여러 번 했다. 작업환경이 그만큼 열악했다. 그나마 다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7년 전 친하게 지내는 형님과 LNG 탱크에서 작업하던 때였다. 이 씨는 탱크 안에서 용접을 하고 형님은 철을 깎았다. 일이 늦어져 잔업을 했다. 잔업을 하면 보통 오후 다섯 시에 간식으로 빵을 먹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관리자가 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연락조차 없으니 당연히 툴툴대는 말이 튀어나왔다.
"야들이 일만 시키지 먹을 것도 안 주네요. 이리 대접하는데 뭐더러 열 올려서 일합니까예. 사람 우습게 보는 거 아니라예. 고마 치아 뿝시다. 행님, 그냥 올라갑시다."
뿔난 이 씨를 이해한다는 듯이 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 내가 쪼매 일 더 하고 마무리할 테니 동상은 먼저 올라가 있으라. 쫌만 더 하면 된다 아이가. 가서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있그라."
고이 접어놓은 장갑과 토시
형님은 마무리 작업을 자처하며 이 씨를 떠밀었다. 곧 끝날 거라 생각한 이 씨는 먼저 올라와 다른 동료들과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함께 담배를 피우던 동생이 이 씨가 올라온 탱크 입구 쪽을 가리켰다.
"행님요, 저기서 연기가 올라오는데예."
탱크 안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급히 사람들을 호출하고 관리자에게 알렸다. 무엇보다 형님 걱정이 앞섰다. 대부분이 나왔는데 형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탱크 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탱크 안에서는 공허한 울림만 들려왔다.
급히 구하러 갔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LNG 탱크는 한번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타는 재질로 돼 있다. LNG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LNG 끓는점인 영하 162도 이하로 탱크가 유지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탱크를 보온재로 이중 삼중 둘러싸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이 나면 답이 없다. 결국 형님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 씨는 화재가 진압된 뒤에야 형님과 마지막으로 함께 일한 현장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반듯하게 개어 놓은 장갑과 팔 토시가 가지런히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이후에도 죽음을 목격한 것이 몇 차례. 같은 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가스 폭발 사고로 죽기도 했다. 이 씨는 그런 죽음을 볼 때마다 다음 차례는 자기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일까?
전상식 씨(30)는 서울에서 여러 일을 전전하다 4년 전 조선소 노동자가 되겠다고 울산으로 흘러들어 왔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곳이었지만, 조선소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주고 떼일 위험도 없다고 했다.
전 씨가 들어간 곳은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거기서 그는 블록을 용접 전 가용접하는 취부사로 일했다. 업체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았다. 열심히 돈을 모으면 다시 서울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늘 바라던 대로 된 적이 없는 인생이었다.
조선소에 들어온 지 2년 가까이 되던 2013년 여름 어느 날, 오후부터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전상 비가 오면 공정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작업 현장에서 원칙은 늘 멀리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을 했다.
작업소장이 전 씨에게 고층에 쌓여 있는 자재들을 지층으로 내리라고 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손이 바빴다. 바닥이 빗물로 미끄러웠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거운 자재를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다 그만 중심을 잃고 자재와 함께 미끄러졌다. 다리를 다쳤는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구급차로 울산대병원에 후송됐다.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 사이 하청 대표와 총무가 전 씨를 찾아왔다. 산업재해 신청을 하지 말라며 대신 공상 처리해(회사에서 치료비를 대신 지급하는 방식) 주겠다고 제안했다.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다시 돌아가야 할 직장이었고, 함께 일해야 할 상사들이었다. 결국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청업체 지정 병원으로 옮긴 뒤, 다친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입원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깁스는 풀었지만 다리는 여전히 불편했다. 정상으로 회복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회사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쉰 지 석 달이 지났을까. 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른 애들은 아무리 다쳐도 석 달 안 돼서 다 낫는데, 너는 왜 아직도 낫지 않는 거야?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런 거면 이번 기회에 집에서 그냥 푹 쉬어."
억울했다. 다리는 아직 통증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몸으로 다시 회사에 나오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울산에 있는 업체 지정 병원에도 찾아가 통증을 호소했지만 지정 병원 의사는 “이상 없다”며 일해도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상했다. 이번에는 울산대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는 “왜 이제 왔느냐”며 다그쳤다. 전 씨의 다리는 그 사이에 심각할 정도로 악화돼 있었다. 곧바로 인대 재건 수술에 들어갔다. 4시간에 걸친 큰 수술이었다.
전 씨는 업체 지정 병원에 화가 났다. 지정 병원을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 잘못될 경우도 걱정됐다. 업체 총무에게 다시 산재 처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총무는 시종일관 같은 말만 반복했다.
"회사가 끝까지 보상은 해줄 테니 산재는 신청하지 마라."
수술 후 전 씨는 울산대병원에서 2주를 보내고 다시 업체 지정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도 재차 산재를 요구하자 버틸 재간이 없던 업체는 결국 산재를 받아 줬다. 그해 12월 31일 산재 승인을 받은 뒤, 전 씨는 곧바로 산재병원인 근로복지공단 인천중앙병원으로 이동해 재활 치료를 받았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다 싶을 때까지 7개월이 걸렸다. 이제는 다시 일을 해야 했다. 오랫동안 쉬면서 생활고가 심각했다. 전 씨는 회사에 연락했다.
"몸이 나아서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회사는 거부했다.
"경영난으로 회사가 문 닫을 지경이다. 너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다."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데 할 수 없었다. 퇴직금으로 80만 원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액수가 나왔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회사가 어렵다기에 별 말 않고 그냥 받았다.
2014년 8월께 전 씨는 다른 하청업체에 취업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우연히 낯익은 사람들을 보게 됐다. 전 씨가 일하던 업체 노동자들이었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폐업한다더니 회사는 여전했다. 혹시나 해서 회사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전 씨의 복귀 요구 이후에도 구인 광고를 내고 있었다. 전 씨와 똑같은 취부사였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 수술한 부위의 상태가 악화됐다. 병원에 가보니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떨어졌다. 아킬레스건을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술 후에는 발목을 좌우, 상하로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수술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한 건데..."
전 씨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술 후에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3개월 뒤 재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는 복숭아뼈를 제거했다. 그래도 다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되레 수술 이후 다리가 붓고 변형이 생겼다. 칼로 서걱서걱 베이는 듯한 고통이 수반됐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이라는 희귀병까지 얻은 것이다.
오른쪽 다리를 평생 못 쓰는 것은 물론,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더구나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은 다리 신경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전 씨는 신경을 죽이는 치료를 받으면서 이를 억제하고 있다. 매일 소량의 마약류 진통제도 투여받고 있다. 이것이 없으면 고통을 견딜 재간이 없다.
그는 2015년 4월 현재 경기도 화성시 근로복지공단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는 평생 이 고통과 함께 살아야 한다. 게다가 언제 고통이 척추까지 올라올지 모른다는 공포로 전 씨는 정신과 약까지 먹고 있다. 적응 장애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다.
"마음잡고 일하려고 조선소에 취업했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도둑질을 하다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던 건데…."
전 씨가 답답함을 호소하는 건 당연했다. 회사는 자신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연락 한번 없었다. 실은 그의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도의적으로 사람이 이렇게 됐으면 미안하다는 이야기라도 한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나마 나는 우겨서 산재 인정이라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정말 많아요. 조선소 일이 힘들다고만 생각했지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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