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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수은 중독 사망 vs. 2016 메탄올 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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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88 수은 중독 사망 vs. 2016 메탄올 실명 [박점규의 수다]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노무사
"좋은 곳으로 가세요. 좋은 기억만 가지고. 하늘에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이런 일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메탄올 실명 피해자 드림."

지난 6월 6일 저녁,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 안전문에 빼곡하게 붙어있는 포스트잇 사이에서 발견한 추모글이다. 위로 받는 사람은 구의역 9-4번 승강장에서 안전문을 고치다 달려오는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열아홉 청년 하청노동자이고, 위로하는 사람은 올해 초 삼성전자 갤럭시 부품을 만들다 메탄올에 중독돼 실명한 파견 노동자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눈을 잃은 비정규직이, 죽은 비정규직을 위무하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위로. 이 포스트잇을 이곳에 붙인 사람은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박혜영 노무사다. 구의역 추모 공간을 방문한 박혜영은 이대 목동병원에 입원해있던 메탄올 피해자가 수화기 너머 불러준 대로 포스트잇에 적었다.

박혜영은 지금 몸이 말이 아니다. 지난 7개월을 오롯이 메탄올 실명 피해자들과 보낸 탓이다. 수많은 언론사 기자들 전화를 놓치지 않고 받아야 했고, 사건의 내용을 잘 모르는 기자들에게 일일이 사건을 설명해야 했다.

하루에도 감정 상태가 지옥과 천국을 오고가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보면 감정이 울컥해져 집에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어느 날 목을 못 움직이게 됐다. 휴식과 치료를 받으러 떠나기 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지난 7개월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 박혜영 활동가(왼쪽). ⓒ노동건강연대

"피해자들, 이삭줍기식으로 만났죠"

박점규 : 올해 1월부터 3개월 동안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스마트폰 부품 하청 업체에서 5명이 메탄올에 중독돼 실명과 뇌 손상을 입는 사고가 터졌다. 사고 직후부터 피해자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고 들었다.

박혜영 : 월요일에는 부천, 목요일에는 창원에서 피해자를 만난다. 그들은 모두 앞이 안 보인다. 다행히 실명 위기는 피했지만 뇌 손상을 입은 스무 살 한 하청 노동자가 아버지가 살고 계신 제주도를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코피를 쏟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난리가 났다. 그 뒤로는 비행기를 못 타겠다고 하더라.

한 여성 노동자는 시어머니와 남편, 아이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사고 이후 한 대학 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 어느 날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전화를 한다. 뉴스를 보면서 화나는 일 있을 때마다 전화한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고 한다. '박근혜가 어쩌면 그러냐'는 얘기를 매번 듣는다. 호탕한 성격에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던지라 혼자 있던 시간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라.

그녀는 그래도 앞이 약간 보인다. 까맣게 보이지만 실루엣이 보이니까 걸어 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예 안 보인다. 그러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냐. 신경이 좁아져 뇌졸중 예방약을 먹어야 한단다. 새로운 합병증이 나타날 때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피해자 다섯 명 중 앞이 완전히 안 보이는 사람이 두 명,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이 두 명이다. 한 명은 뇌손상이라 아주 다행히 눈은 괜찮다.

박점규 : 메탄올 피해자들과 어떻게 만나게 됐나?

박혜영 : 병원 응급실에 환자가 실려 왔는데, 산업재해를 직감한 의사 선생님이 고용노동부에 알리면서 우리도 알게 됐다. 곧바로 병원을 찾아가 상황을 확인하고 피해자들을 만났다. 메탄올 중독 피해자들이 늘어나면서 차례로 만나게 됐다.

한 피해자는 주변에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시사매거진 2580>에서 메탄올 실명 피해가 보도된 후 트위터에 어떤 간호사가 똑같은 사람이 우리 병원에 있다고 올렸다. 그 간호사에게 쪽지를 보냈다. 병원을 찾기 위해 엄청 헤매고 다녔다. 어렵게 만났는데 세상에, 가장 상태가 안 좋았다. 계속 침 흘리고, 기저귀 차고 있고, 말을 거의 못 하고, 앞도 안 보이고. 스물다섯에 그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우리한테는 다행히 방실거리며 얘기를 잘 하던데, 간병인 아주머니에게는 화를 많이 내고 물건 집어던지고 그런다고 했다. 스무 살 청년이 빛을 잃었는데, 얼마나 힘들겠냐고, 아마 엄마 같아서 그런 것 같다고, 잘 해달라고 부탁드리고 병원을 나오는데, 정말 미치겠더라. 다시 병원을 가보니 간병인이 바뀌어 있더라.

박점규 : 언론사를 상대하는 일이 많이 힘들지 않았나?

박혜영 : 정말 많은 전화를 받았다. 한 언론사에서 여러 명이 전화하기도 하고, 처음 듣는 언론사도 많았다. 쉬는 날엔 기자들이 동네로 찾아온다. 어버이날 연휴에 고향에 가기로 했는데 못 내려갔다. 사전 취재도 안 하고 막무가내로 전화하는 기자들도 많다. 그럴 땐 화가 좀 난다. 조금만 찾아보고 오면 얼마나 좋나. 똑같은 얘기를 100번은 했다.

얼마 전 메탄올 워셔액 사건이 터지고 한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사건을 재조명하자며 피해자를 연결해달라고 했다. 피해자들이 얼마 전에 정신과 진단을 받아서 인터뷰를 못한다고 그랬더니, 방송에서 도와주려고 하는데 이해가 안 간다고 하소연을 한다. 누구는 방송에 안내 보내고 싶나. 하루하루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가 울부짖고, 앞이 안 보이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20대들이 애써 견디는 지금, 무엇이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나날이다.

한 기자에게 1시간에서 3시간을 얘기했다. 일을 하다가 1년에 2000명이 일하다 죽는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경제부, 산업부 기자들이다 보니까 전혀 모른다. 그래서 나중엔 기자용 프리젠테이션을 만들어 나눠줬다. 내가 전화 받는 걸 보더니 우리 옆 사무실 사람들이 녹음해서 자동 응답으로 하라고 얘기하더라. (웃음)

언론이 노동 재해와 관련한 기사를 쓰는데 개인적으로 메탄올 실명 사건이 분기점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정말 많은 언론사에서 기사를 썼기 때문에 앞으로 노동 재해에 대한 보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피해자들과 울기도 많이 울었다"

▲ 박혜영 활동가. ⓒ정기훈
박점규 : 언론에 피해자 인터뷰가 많이 나왔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박혜영 : 사건 초반에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을 많이 했다. 언론 연락을 노동건강연대로 단일화했다. 인터뷰 요청이 오면 내 선에서 자를 수도 없으니까 일일이 전달하고 가족이나 피해자가 안 된다고 하면 전달하고. 4명의 가족과 매번 이걸 계속했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해서 연락처를 줬는데, 인터뷰 못하겠다고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자꾸 그렇게 중간에서 전하니 피해자 가족들과 내 관계가 이상해지더라. 그러다 또 마음이 바뀌어 인터뷰를 하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이 초반에 메탄올 기사 검색을 매일 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가족들에게 '메탄올 실명' 이렇게 검색하라고 한다. 사실 관계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또 나에게 전화해서 수정 요청을 계속 하고. 그 땐 정말, 전화기를 숨기고 싶을 때가 많았다.

박점규 : 노동자가 돌아가시고 나서 유족과 함께 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일은 많았지만 생존해 있는 분과 활동을 한 것은 처음 아닌가?

박혜영 : 그렇게 생각 안 해봤는데, 처음에 너무 충격적이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처음 이 사건 접하고는, 전국의 모든 공단 지역에 아는 인맥을 동원해서 CNC(컴퓨터 수치 제어 시스템, 알맞은 수치를 입력하면 그대로 물건이 깎여서 나온다.) 일하는 사람들을 수소문 했었다.

며칠 동안 인천, 안산, 성남, 구미, 울산 등 100명은 넘게 통화한 것 같은데, 그 때 한계를 많이 느꼈다. 전자제품 부품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파견 노동자였고 기록조차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조합도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래도 안산이나 인천 지역엔 파견 노동의 문제 제기를 오래 해왔던 터라, 같이 수소문하기도 했다.

성남의 일하는 학교라는 대안 학교를 통해 전자제품 회사에서 일하는 20대 노동자들에게 연락망을 돌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우리는 안전해요", "알코올을 쓰는 것 같은데? 안전할걸요?" 이런 대답들이었다. 참담했다.

어떻게든 소문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기사가 나오는 족족 댓글로 전화 달라고 달아놓는 걸 꾸준히 했다. 방송에 나가게 될 때는 반드시 제보 전화를 넣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 덕에 또 전화통에 불이 자주 났는데, 40년 전에 메탄올을 사용하신 어르신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 4월에는 피해자들과 같은 공장에서 일 했다던 28세 노동자에게 전화가 왔는데,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실명 피해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하더라.

회사에서 지나가다가 누가 하는 말을 듣고 검색해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그 기사의 댓글을 보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 친구와는 3번에 걸쳐 5시간 정도 통화를 했는데, 근로기준법 강의도 해주고, 직업 학교 안내도 해줬다. 최저 임금을 받는 28살인 그는, 돈을 모으면 직업 학교를 갈 거라고 했지만, 생활비에 월세 빼면, 학비는 무료인 직업 학교조차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전화를 해서 길게 얘기하는 그를 보며, 전태일을 떠올렸다. 대학생 친구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던.

피해자들을 보면, 한 피해자 아버님이 기초생활수급자인데, 혼자서 산재 보험 신청을 했다. 다행히 의사가 메탄올 중독인 걸 의심해서 치료를 했고, 근로복지공단에서 메탄올 중독은 무조건 산재 승인 해준다고 했으니까 원무과 가서 직접 하신 거다. 대단한 일이다.

피해자들이 계속 아프고 언제 나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산재 보험 추가 신청할 일도 많고, 그 과정에서 불합리한 일을 많이 겪으시기도 한다. 차분하게 알려드리고 직접 하시게 하는데, 정부가 잘못하는데도 내가 그렇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를 때가 많다.

모든 피해자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같은 피해자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다. 솔직히 마지막 피해자가 또 나왔을 땐, 앞의 피해자들이 충격을 너무 받았다. 이미 실명이 3명이었고 노동부 조사까지 들어갔는데, 그 와중에 또 같은 일로 피해자가 나오다니, 정상적인 나라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말하며, 피해자들과 얘기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래서 추가 피해자가 더 나오면 안 된다고 말하며 방송 출연을 결심했던 피해자가 있다. 아, 그날 정말 많이 울었다.


"'누가 보호받지 못하는가?' 늘 자문한다"

박점규 : 6개월을 메탄올로 보낸 셈인데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진 것 같다.

박혜영 : 스트레스를 어마어마하게 받았던 것 같다. 중간에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도 죽고 있었다. 감당을 좀 못했던 것 같다. 근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감정이 울컥해져 집에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오른쪽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인가 목을 못 움직이게 됐다. 8월부터 치료를 위해 잠시 휴가를 갈 생각이다.

박점규 : 메탄올 실명 사태가 터지고 민주노총이 대책위를 꾸리고 사람을 모으고 역할 분담을 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박혜영 : 그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긴 한다. 노동조합 중앙에서 20대 파견 노동자들과 함께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상황에서 싸움이 커지고, 확장되는지에 대해서는 기존의 상황과 현실에 대한 꾸준한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기회가 잘 없다. 그게 많이 슬프다.

박점규 : 노동건강연대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면?

박혜영 : 노동건강연대는 1988년 15세 문송면 군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노동과건강연구회'였다. 2001년에 노동건강연대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우연히도 이번 메탄올 실명 피해자들 중 두 명이 1988년에 태어났다. 이 얘기를 전해주니, 이게 운명이었던 거냐는 우스갯소리도 한다.

이후 노동건강연대는 인쇄, 신발 공장 노동자 등 영세공장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한 활동을 벌였고, 산재 보험의 문제점이나 하청 노동자가 왜 더 위험한지 구조를 파헤치기도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2003년 처음 기업 살인법을 한국 사회에 소개한 것도 기업이 저지르는 위험한 행위가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었다.

막상 노동건강연대에 들어와 보니까, 그동안 해왔던 소중한 활동들이 많이 안 알려졌더라. 그래서 시대에 맞게 위험을 알리는 싸움을 하느라 다양한 활동을 모색했다. 위험의 외주화나 기업 살인법, 살인 기업 선정식에 대한 활동이 그것이었다. 그래도 많이 모자라긴 했다. 매우 어려웠고 노동건강연대가 비밀 조직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또 하청-파견 노동자가 더 위험한 구조를 알리기 위한 실태조사와 현장을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을 했다. 상근하는 활동가가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부 결의가 있었다.

박점규 : 많은 활동가들은 반올림이나 노동건강연대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하지 못했던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박혜영 : '누가 보호받지 못하는가?' 사무실에서 끊임없이 하는 질문이다. 어디가 가장 취약한지 쑤시고 다닌다. 그렇게 차곡차곡, 무언가를 하다 보니 쌓인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실이 유해 위험 업무 하청 금지 법안 발의를 하기도 했다. 그 법안을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이 팀을 꾸려서 만들었는데, 구의역 사고 이후 기업 살인법과 함께 그 법이 떴다.

민주노총이 제대로 역할을 하는 건 중요하지만 오히려 더 다양한 당사자 조직이 만들어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모인 반올림처럼 파견 노동자들이 뭉친다거나 아르바이트생이 뭉친다거나, 당사자들이 작은 걸 만들어서 스스로 싸우는 경험이 있어야 확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박점규 : 언론사에서 기자들이 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전화를 하고 상의를 하는 것 아니겠나?

박혜영 : 얼마 전 울산의 고려아연에서 황산이 누출됐을 때 경찰이 이상하게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다 열어서 누출됐다고. 그래서 기자들에게 황산을 잔류시킨 상태에서 일을 시킨 게 문제라는 문자를 보냈다. 경찰은 황산이 뭔지도 모를 거니까 고용노동부에 연락하라고 했다.

'경찰이 어쩌구저쩌구 발표했고, 조사 중이다.' 이게 노동 재해를 대하는 언론의 관습적인 워딩이다. 언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매일 보는 교과서다. 그런데 그들은 1년에 2000명이 죽는다는 걸 모른다. 언론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안하고, 수정할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노동 재해에 대해 기자들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최대한 빨리 내고 싶다. 하하하. 하고 싶은 건 진짜 많은데, 분신술을 쓰고 싶다.

박점규 : 노동건강연대는 어떻게 운영되나?

박혜영 : 회원이 200명 정도밖에 안 된다. 많은 금액을 후원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메탄올 사건 터지고 회원이 좀 늘었다. 정말 고마웠다. 페이스북 메시지로 후원회원 문의가 오더라.

사람들이 소소한 도움을 많이 준다. 응급실 의사들이 비상연락망 돌려서 알려주기도 하고, 필요한 영어 번역을 기꺼이 해준다. 교육방송(EBS) <하나뿐인 지구>에서 '일터의 배신'이라고 기관사 공황 장애와 메탄올 합쳐서 30분짜리 다큐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현재 번역 중이다. 번역을 하겠다고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왔다. 또 어떤 분은 흔쾌히 인세를 기부해 주시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대기업은 국경을 넘어 다양한 착취 구조를 만들어 놨다"

박점규 : 외환 위기 이후 20년 동안 진행된 일터의 하청화는 위험의 외주화를 동반했다. 그런데 다단계 하청 구조에서 원청의 책임을 묻는 일이 쉽지 않다.

박혜영 : 구의역 사고 때 우리는 봤다. '외주화가 사람을 죽였다'고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런데 막상, 메탄올 실명 사건이 터졌을 때는 어떻게 3차 하청까지 삼성이 책임지느냐는 질문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구조를 잘 봐야 한다. 1차 하청도 갑인 세상이다. 2차 3차에 매달려 있는 파견노동자까지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려면 큰 그림이 필요하다.

노동법 해석의 원칙이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보는 거다. 정말 독립적인 하청 업체? 계약서만 빼고 보면 그 하청 부품회사는 대기업의 부서와 팀들과 다르지 않다. 독립된 원천 기술을 가진 중견 기업들이 아니란 소리다. 왜 대기업에서 만든 먹이사슬 구조를 우리 사회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결국 국민이지 않은가.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UN) 등 국제사회에서 최근 '서플라이체인(공급망)'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중요시 하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하청 회사가 옷을 만들어 유명 회사에 납품하면, 그 원청 회사도 책임이 있다거나, 휴대전화 배터리 재료인 코발트를 채취하는 콩고의 아동 노동 근절을 위해 휴대전화 회사들이 콩고와 거래를 못하게 하는 등 이미 대기업은 국경을 넘어서 다양한 착취 구조를 만들어 놨다.

그런데 전 세계에 휴대전화를 파는 삼성과 LG의 본고장인 한국의 노동자들마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국내 기준이 아니라 이미 국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기업인 것이다. 삼성전자, LG전자 공히 모두. 그러나 예상하듯 두 기업은 이번 메탄올 실명 사건에 아무런 책임도 못 진다고 대답한 바 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이 잇따라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었을 때, 우리는 선주 회사가 현대중공업의 책임을 묻도록 해야 한다고 했었다. '한국에서 배 만드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어, 너희 혹시 알고 배 사는 거냐'고 물었다. 영어로 보고서를 만들어 배를 발주한 회사와 투자자들에게 보냈다.

활동을 확장해 보고 싶었다.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의 위험한 현실을 다룬 연재 기사 '조선소 잔혹사'를 영어로 번역해 제네바에 가서 뿌렸다.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선주 회사에도 우편으로 보내줬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실에서 선주사 사람을 만나 사회적 책임 투자에 대해 얘기했다. 현대중공업에 골리앗을 주문했던 노르웨이 언론에선 세 차례에 걸쳐 기획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아주 미미한 활동이었지만, 원청 회사의 책임을 묻는 사회적 운동을 더 확산시켜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박혜영 노무사가 막걸리 두 잔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2011년 노동건강연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컴퓨터 4대를 네트워크로 연결시켰더니 컴퓨터공학과 출신은 다르다며 동료 활동가들이 농을 건넸단다.

슈퍼 컴퓨터보다 더 복잡한 원·하청 구조를 분석해 억울한 하청노동자의 죽음을 막고 대기업의 책임을 묻는 일이 지금 그녀의 전공이다. 오늘 그녀는 메탄올 실명 피해자들의 언니이고,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친구다.

노동건강연대의 회원이 많아지고 상근 활동가가 늘어 그녀가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다를 떨면서 즐겁게 활동해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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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 기구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5일 점거파업에 함께 했고, 이후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했습니다. 저서로는 <25일>, <노동여지도>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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