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현식 씨는 그저 "어머니를 뵈러 북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창식 씨는 형님 진현식 씨를 만나뵈었습니다. 조카 김태룡 씨네 가족 또한 다시 북으로 가던 중 다친 진현식 씨를 '가족의 연'으로 거둬주었습니다. 창식 씨와 태룡 씨는 앞으로 다가올 비극은 꿈에도 몰랐습니다.(☞관련 기사 : "북에서 온 형님이 몰고 온 비극")
비극의 도화선은 엉뚱한 데 숨어있었습니다.
"집안의 먼 형수뻘 되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어느 날 점을 보러 가서 점쟁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진현식 씨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소위 말해 점을 쳐달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가 자신이 잘 아는 경찰한테 이러저러한 일이 있으니 한 번 조사해보라며 제보를 한 모양입니다."
'간첩 잡기'야말로 경찰에게는 최고의 승진 코스였던 때였습니다. 제보를 받은 경찰은 서울과 삼척에서 각각 간첩 몰이에 나섰습니다.
1979년 6월 15일. 태룡 씨가 건설회사 현장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대전에서 울산까지 가는 초고압선 건설 공사를 하러 대구 작업 현장에 있었습니다. 직원 한 명이 태룡 씨네 집으로 와 태룡 씨를 불렀습니다. 사무실에 누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니, 형사라고 소개한 대여섯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살인 사건에 대해 물어볼 게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그들은 영장도 없이 대뜸 수갑을 꺼내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너 이 새끼,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차가운 것이 피부에 닿았습니다. 권총이었습니다.
강제로 차에 태워져 동대구 기차역으로 가 다시 형사들과 함께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형사들은 3개월도 안 된 아들과 아내도 서울로 데려왔습니다. 하루는 여관방에서 형사들과 같이 묵고 다음 날 수갑을 찬 채로 후송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차가 들어가는 출입구 왼쪽 기둥에 '해양연구소'라는 글씨가 적힌 간판이 보였습니다. 호송차는 건물 오른쪽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곳이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사실을.
이곳 처음 일주일을 지냈습니다. 조사실에는 사람 머리도 못 빠져나갈 만큼의 아주 작은 창문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차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습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책상을 놓고 조사관과 마주 앉았습니다.
"이 새끼, 권총이나 난수표, 무전기 다 꺼내놓아라."
갖고 있는 게 없으니 대답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번엔 '평생 자술서'라는 것을 쓰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용을 모두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이면 될 줄 알았지만 조사관은 새 종이를 꺼내와 또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사관들은 둘을 비교 대조했습니다. 내용이 서로 다르면 왜 다르냐며 구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첩 행위한 것은 왜 안 쓰냐. 자백해라."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간첩 사실을 부인하면 뺨을 사정없이 맞았습니다. 얼굴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맞았습니다. 귀 뒤쪽을 몽둥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조사관은 공작 활동으로 꾸며 쓸 내용을 찾느라 혈안이었습니다.
"해안에 경비초소 있는 걸 보지 않았느냐."
"그냥 눈에 지나가면 보이는 걸 굳이 쓸 필요가 있습니까."
"니가 그걸 보고 간첩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
"그런 일이 없습니다."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아니'라는 말을 할 때마다 조사관들은 태룡 씨를 구타했습니다. 엎드리게 한 후 허벅지를 두들겨 팼습니다. 나중엔 하도 맞아 살갗이 다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화장실도 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고등학교 등하굣길을 오가며 보았던 해안 경비초소에 대한 정보를 얘기했습니다.
"근덕면 궁촌리 원평과 문암 부락 사이 해안에 원평 쪽 해안선 모퉁이에 군인 경비부대 막사 1개소가 있는데…."
그 근방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이러한 진술은 '국가 기밀'로 둔갑하고 맙니다.
물고문도 지독했습니다. 팔다리를 묶은 후 물이 가득한 욕조에 얼굴을 집어넣어 여러 번 정신을 놓았습니다. 물에 고춧가루를 타는 고춧가루 고문도 이어졌습니다.
하루는 짬뽕 한 그릇을 시켜주며 '건더기만 먹으라'고 했다. 잘 먹지도 못해 억지로 건더기를 입에 욱여넣고 국물만 남겼습니다. 조사관들은 남은 그 국물을 태룡 씨 얼굴에 콸콸 쏟아부었습니다.
"맵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겁니다."
발가벗겨 놓고 성기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자백하지 않으면 네 마누라를 데려와 이 꼴을 만들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승강이도 벌이고 버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말하지 않으면 고문은 기본이고 다른 가족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대니 배겨낼 수가 있어야지요."
태룡 씨는 결국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술서에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타와 협박의 연속, 그렇게 끔찍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창식 씨가 끌려간 날도 태룡 씨와 같았습니다. 1979년 6월 15일, 창식 씨의 새벽잠을 깨운 건 경찰들이었습니다. 구둣발로 방에 저벅저벅 들어온 형사들은 잠이 덜 깬 창식 씨의 양팔을 세게 붙들었습니다.
"무슨 일이오."
"퇴근길에 무슨 일 없었나?"
"없었소."
"신고가 들어왔으니 경찰서로 갑시다."
지프차를 타고 삼척경찰서로 갔다. 형사들은 대뜸 호통을 쳤습니다.
"간첩질했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너희 형 진항식을 잡아와 거꾸로 매달아 놓을 테다."
간첩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 번 윽박지르긴 했지만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차를 타고 이번엔 서울로 갔습니다. 창식 씨를 태운 후송차는 태룡 씨가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습니다. 태룡 씨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사실에 가자마자 평생 자술서를 쓰고 또 썼습니다. 자술서들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조사관들은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창식 씨의 머리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고춧가루 고문을 할 거라고 협박했습니다. 3일째까지는 잠도 재우지 않았습니다. 4일째가 되자 그제야 잘 수 있게 놓아주었습니다.
저녁 9시쯤, 수갑을 찬 채로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웠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못 잤는데도 두려움 때문인지 고문으로 인한 고통 때문인지 창식 씨는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눈만 살짝 붙이고 있으려니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공분실장이란 사람이 들어와 창식 씨를 조사하던 경위에게 물었습니다.
"이놈 자?"
"오늘 정리할 게 있어 제가 일찍 좀 재웠습니다."
주변이 고요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창식 씨 귀에 박혔습니다.
"이놈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시나리오를 작성하라 하네.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그럼 올 여름 휴가는 틀린 것 아닙니까?"
"'올 여름 휴가는 틀린 것 아니냐'는 말이 도저히 잊히지 않아요. 저는 그 '시나리오' 때문에 억울하게 죽게 생겼는데 그자들은 고작 본인들 휴가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그걸 듣고 있는 저는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억울하고 분통 터졌지만, 창식 씨 역시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란 대로 말하고, 쓰란 대로 쓰고 썼습니다. 그래야 끝도 없이 쏟아지는 폭행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주일간 조사를 받은 뒤 춘천 대공분실로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가족들과 진술 내용을 맞추게 했습니다. 조사가 시작된 이후로 한 번도 다른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자신의 진술서를 다른 진술서와 대조하는 걸 보며, 다른 가족들도 함께 춘천에 끌려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는데 왜 너는 저렇게 말해?'라는 식이었죠. 우리가 남들보다 더 고문을 받았던 건, 피의자가 워낙 많아서 서로 말을 다 똑같이 입을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얘기가 딱 맞아떨어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습니다."
구타와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은 물론이고, 이번엔 전기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춘천에서 전기 고문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손발을 묶은 채로 전기 스위치를 몇 번 눌러요. 그냥 찌릿한 정도가 아니라, 내 몸 자체가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내 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하도 종류별로 고문을 받다 보니 언제 뭘 어떻게 당했는지 체계적으로 순서도 정리할 수가 없어요. 그냥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조사관들의 구타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못 견디게 하는 게 있었습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협박이었습니다. 태룡 씨는 "지금도 비명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문받을 때 한밤중이 되면 옆에서 전기 고문 소리가 들려요. 서울에선 문을 열어야 다른 방 소리가 들렸는데, 춘천에선 문을 안 열어도 다 들리더라고요. 찢어지는 고통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다 누구겠어요. 다 우리 가족들 아니겠어요. 똑바로 안 하면 네 아버지, 네 누이 다 죽는다고 해요. 그러니 가슴이 안 찢어집니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해선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위에서 시켰다고 해도,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 짐승도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다음에 계속)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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