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협상의 시대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엔 상호 간의 비방과 프로파간다가 차지한 지 오래됐다. 이는 비단 한미 양국과 북한 사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대북 협상파들은 북한의 신호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반면 협상 무용론자들은 북한의 메시지를 폄하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북한 관료를 만난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2016년 2월 독일 베를린에서는 북미 간의 '트랙 2' 회동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리용호 당시 외무성 부상(5월 당대회에서 외무상으로 승진함)을 비롯한 북한 고위 관료와 조엘 위트 및 빅터 차 등 미국의 전직 관료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8월 28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전직 관료의 전언은 딴판이다. 조엘 위트는 "북한의 주된 관심사는 정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비핵화 문제를 논의할 의사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 측은 "평화 협정의 맥락에서 그들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논의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위트는 빌 클린턴 행정부 때 국무부 북한담당관을 지냈고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협상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위트와 동행했던 빅터 차의 전언은 달랐다.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국장을 역임한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적 한반도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는 "북한 관료들이 자신의 전문적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상부의 지시를 그대로 읊조리는 것 같았다"며, "그들의 얘기에서 굳이 새로운 시그널을 발견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베를린 '트랙 2' 회담에 대한 한국 국내의 소화 과정에 있었다. 국내 협상론자들은 이 회의를 북미 간의 '탐색적 대화'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협상을 거부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근거로 삼았다. 변화를 거부하면 북미 대화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대북 강경파들은 "'트랙 2' 회의는 미국 정부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회의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그 자체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북한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대북 압박과 제재만 주문했다.
최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북미 간의 트랙 2 회동 관찰법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회의에 북한 정부에선 한성렬 외무성 부상과 장일훈 유엔주재 차석대사 등이, 미국 민간에선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와 6자 회담 차석 대표를 지낸 조지프 디트라니 등이 참석했다. 일각에선 참석자들의 면면과 이후 나온 메시지에 주목해 적어도 차기 미국 정부에서 의미 있는 북미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성급한 낙관은 금물이다. 일례로 국내 언론에서는 미국 측에서 "일부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한 대목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미국 쪽 참가자인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도 밝힌 것처럼 그의 "개인적 견해"이다. 미국 측 참가자들 전체의 공통된 평가인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한심한 건 이 회의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평가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정부는 금번 협의가 민간 차원의 트랙 2 대화로 미국 정부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며 "금번 미측 참석자들은 길게는 20여 년 전 대북 정책을 담당했던 전직 인사들로서 미국 정부의 현 대북 정책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또한 "북한이 이 같은 회의마저도 현직 당국자들을 파견하는 것은 국제 사회의 전례없는 대북 제재와 압박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미국측 참가자들의 목표는 이번 회의 결과를 '차기' 미국 정부에 전달해 다음 정부의 대북 정책 수립을 돕고자 하는 데에 있다. "길게는 20여 년"이 지난 인물(로버트 갈루치)도 있지만, '짧게는' 2011년까지 오바마 행정부 국가정보국 선임보좌관을 지낸 인물(조지프 디트라니)도 있다. 또한 "북한이 현직 당국자들을 파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과거에도 다반사였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번 회의를 포함해 북미 간의 트랙 2 회의에 대해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편식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자칫 오판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근혜 정부처럼 거부하고 폄하하는 데에만 몰두하면 한국 외교는 더더욱 빈사 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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