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 간첩의 삶은 참혹합니다. 고문을 받고, 고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하고, 거짓 자백으로 범죄가 성립되고, 범죄자가 되어 결국 철창 안에 갇힙니다. 형기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거나 설령 법정에서 누명을 벗는다 해도 사회적 낙인은 그대로 남습니다. 피해자들은 "인간성이 파괴되는 경험"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한 번만으로도 끔찍한 경험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1972년 통일혁명당 재건 사건, 2012년 GPS 간첩 사건의 피해자 이대식(79) 씨입니다. 과거 무기징역을 받고 20년간 복역한 그가 또다시 간첩 혐의를 받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간첩죄 전력이 또 다른 조작 간첩 사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분단 체제의 모순에 일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대식 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게 죄라면 그게 내 죄일 겁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위정자의 잘못을 눈감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가 아니라 믿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운동판에 뛰어들었습니다. 1959년 정부에서 대학생들에게 재일동포 북송 반대 데모를 시키자, 뜻 맞는 대학생들과 함께 관제 데모의 실상을 폭로했습니다. 이듬해에는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시위 대열에 나섰습니다.
이대식 씨는 사립 명문대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 직장 생활은 변변치 않았습니다. 운동 전력 때문에 행정고시에 응해도 합격할 수 없다는 걸 알고서 고시 공부는 일찍이 포기했습니다.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서울 제기동에서 부모님이 운영하던 여관을 맡기로 했습니다.
1972년 2월 16일 아침 5시 30분경, 여관 종업원이 자고 있는 그를 깨웠습니다. 손님이 왔다고 했습니다. 객실 쪽으로 갔더니 험상궂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식 씨를 보자마자 넙죽 절을 했습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무작정 절을 하니 엉겁결에 맞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총구가 보였습니다.
"아무 말 말고 따라와라."
겁에 질려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지프차가 있었습니다. 그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충무로 근처의 적산 가옥이었습니다. 가옥 안으로 안내한 그들은 대뜸 물었습니다.
"유위하를 알고 있지?"
"모릅니다."
"그래? 그럼 알게 해줘야겠네."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맞다 보니 엉덩이 쪽이 끈적거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만져 보니 온통 피범벅이었습니다. 그걸 본 남자들은 약을 가져와 발라주었습니다.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곳에 들어오는 신고식이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이래도 유위하를 모르는가?"
정말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간첩 있잖느냐."
"정말 모릅니다."
"네가 아직 북망산천을 가보지 않아 정신이 안 드는 모양인데 구경시켜줘야겠다."
그들은 나무 널빤지를 가져오더니 거기 위에 누우라고 했습니다.
"지금 네가 누운 널빤지가 칠성판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위에 올려놓고 염을 하는데, 보통 사람은 삼베나 명주끈으로 염을 하지만, 너는 영광스럽게도 가죽끈으로 염을 해주겠다."
발목부터 어깨까지 네 군데를 가죽끈으로 꽁꽁 묶었습니다.
"네가 여기서 죽으면 그대로 관에 넣어 묻으면 되고, 만일 살아 돌아오면 염라대왕이 아직 안 불렀으니 우리에게 협조해야 한다."
그들은 대식 씨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웠습니다. 경찰서 문전도 가보지 않은 그였습니다. 난생 처음 당하는 고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들은 수건 위로 물을 들이부었습니다. 숨 막히는 고통에 발버둥 쳤습니다. 그들은 간헐적으로 물을 부었습니다. 결국 까무러쳤습니다.
정신이 돌아와 눈을 떠보니 얼굴을 덮던 수건도 사라지고 몸을 묶고 있던 가죽끈도 사라졌습니다.
"아직 염라대왕이 들어오지 말라고 했나 보네. 이제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너는 또다시 북망산천에 가야 한다. 어떻게 할래?"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울며불며 빌었습니다. 죽음의 코앞에까지 다녀왔습니다. 당장 죽지 않으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식 씨에게 자술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협조를 하고 싶어도, 뭘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라 물어봤습니다.
"유위하를 1972년 1월 10일경 부산 권양섭이네 집에서 만났고 유위하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 그와 지하당을 건설하기로 했다고 써라."
"김일성 장군께 메시지를 보내라 해서 써보냈고, 남북적십자 회담과 비상사태 선포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후 보고해 간첩했으며, 김일성 장군 회갑선물로 우리나라 지도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넣은 자수를 만들어 보냈다고 써라."
대식 씨는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그대로 받아썼습니다.
백발의 노인이 된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 기가 찬다고 했습니다.
"권양섭 씨가 나에게 급하게 좀 만나자고 해서 그 집에 갔습니다. 거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경상도 말씨였고 경북 봉화 사는 권양섭 씨 친척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간첩일 줄은…."
거짓 진술 받아쓰기는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이유를 물으면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이용욱, 이용극 형제와 만나 거기서 간첩 지령을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대식 씨는 일전에 그의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중국 원시대 4대 화가 중 하나였던 왕몽의 산수화를 판매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 친척인 이용욱, 이용극 형제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난 것은 그저 골동품을 팔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네 머릿속을 들락날락하는 귀신이다. 왜 나를 속이려 하느냐? 솔직히 시인하면 용서해준다. 자수 간첩들은 전부 석방하는데, 조그만 것이라도 부인하면 자수 간첩으로 보지 않는다. 조총련과 관계된 사실을 전부 자백하면 곧 석방해줄 테니 솔직히 대답해라."
"수사관님은 누구신데 저를 석방시킬 권한이 있습니까?"
"나는 치안국 특수부서에 있는 사람인데 청와대에 직보할 수 있는 사람이니, 너 하나쯤은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저도 협조하고 싶지만 제 양심을 걸고 고백하는데, 그 사람들이 조총련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 사람들이 퇴근하면 만나서 동경 화랑가를 함께 다녔을 뿐 정치적인 대화는 일절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칠성판을 가져왔습니다. 저번처럼 얼굴 위에 수건을 덮진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발가락 사이에 무슨 물건을 끼우더니, 옛날 수동식 전화기를 돌렸습니다. 몸이 붕 뜬 것처럼 마비되었습니다. 다시 "원하시는 대로 진술하겠다"고 빌었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야 차라리 편안히 죽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간첩 교육을 받았습니다."
"진작 자백할 것이지, 피차 힘들게 왜 '작업'을 받고서야 그러느냐."
그들은 "이제서야 네가 참된 국민이 되고 있다"며 판사 앞에서도 일관되게 진술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양심? 인격? 자존심? 그때 그런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면 적어도 덜 고통스럽게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살려고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다가도 나중엔 생을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한 마디로 치욕스러운 인간 붕괴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의 악몽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아마 땅속에 묻힐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다음에 계속)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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