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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왜 전쟁에 반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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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왜 전쟁에 반대했을까?

[장현근의 중국 사상 오디세이]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한 사상가, 묵자

2006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묵공(墨攻)' 덕분에 묵자(墨子, 본명은 묵적)를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안성기, 류더화라는 한국과 중국의 빼어난 배우들이 연기도 참 잘한 영화로 기억한다. 조금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작품을 대한 관객이라면 '공격이 최상의 방어' 운운하며 전쟁을 공격과 승리로만 이해해왔던 자신의 생각을 조금 바꾸었을 것이다. 고전 <묵자>의 '비성문(備城門)' 이하 11편의 글은 방어전에 대한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묵자는 주로 유비무환, 적극공격, 방어기술 및 전략이라는 문제에 집중하여 전법과 방어기계 개발에 전념했다.

묵자의 고향으로 유력시되는 산동성 텅저우(滕州)에 있는 묵자기념관에는 군사청 건물을 따로 두어 묵자의 뛰어난 군사적 성취를 전시하고 있다. 공격 위주의 <손자병법>과 너무도 대비되는 병법을 보여준다. 묵수(墨守)한다는 말은 묵자에게서 나왔다. 한번은 초나라가 당대 최고의 기술자인 공수반(公輸班)의 공성무기를 이용해 송나라와 전쟁을 벌이고자 했다. 묵자는 혈혈단신 초왕을 배알하고 전쟁의 중지를 권했다. 들어주지 않자 공수반을 불러 "당신이 무슨 무기를 쓰든 나는 다 방어할 수 있다"고 했다. 공수반은 아홉 가지의 성 공격술을 다 개진했으나 묵자는 모두 막아냈으며 아직도 방어할 기술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공수반이 딱 한 가지 기술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자 묵자는 "그 기술도 이미 알고 있으며 방어 방법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을 죽인다 하더라도 금활리(禽滑厘) 등 3백여 명의 제자가 방어술을 충분히 익히고 있다고 했다. 묵자는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조직의 수장을 거자(鉅子, 또는 巨子)라 불렀다.

▲ 묵자가 개발한 방어용 무기들이 묵자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장현근


전쟁은 이롭지 못하다!


묵자는 '비공(非攻)', 즉 반전주의자다. 그렇다고 역사상의 모든 전쟁을 다 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전쟁이 잦은 시대에 살면서 지식인 묵자는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못한 전쟁으로 엄격히 구분했다. 무도한 세력을 치는 것을 주(誅)라 칭하고 죄 없는 백성들을 공격하는 것을 공(攻)이라 칭했다. 잔학무도한 자들을 치는 일은 정의의 실현이지만 크고 강하고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가 작고 약하고 적은 인구를 가진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라 했다. 묵자는 특히 강대국이 약소국을 치는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 그렇다면 영화 <묵공>의 제목은 <묵주>가 더 맞았을 것 같다.

묵자가 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농사철을 그르치게 만들고, 재부를 약탈하고, 무고한 사람을 살상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백성들의 삶에 이롭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자의 조상은 송나라 귀족이었는데 몰락하여 평민이 되었고 성도 묵(墨)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분변동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에 이해는 가지만 검을 묵자를 성으로 쓴 것은 좀 이해가 안 간다. 묵자의 고향을 방문하여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묵씨는 아무도 없었다. 중국에서도 그 인구가 3백위 밖에 있는 드문 성씨다. 이 때문에 묵자가 묵형을 당한 사람이라느니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라느니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여하튼 묵자는 지적 능력과 손재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일종의 비밀결사와 비슷한 큰 집단을 거느렸고 송나라 대부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된 관심은 농민 및 노동자의 삶과 이익이었다.

못 가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걱정하는 지식인이나 정치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묵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따뜻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복숭아를 주면 상대는 오얏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묵자의 겸애(兼愛)다. 두루 서로를 아끼면 노동자와 농민들이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두루 사랑하면 서로에게 이롭다

묵자는 공자의 후학에게서 배웠으며 그가 쓰는 용어들은 유가적이다. 그럼에도 유학을 배척하고 묵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개척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한 때 묵학은 유학과 쌍벽을 이루며 중국천하를 풍미한 현학(顯學)이었다. 묵자의 여러 주장은 대체로 유학과 대척점에 있다. 첫째, 유학은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이 먼저고 그것을 천하로 넓혀가는 차별애에 기초하지만 묵자는 차별이 없는 겸애를 주장한다. 둘째, 유학은 하늘과 귀신에 대해 경외하되 멀리하지만 묵학은 천지(天志)에 복종하고 귀신을 밝히는 명귀(明鬼) 사상을 견지한다. 셋째, 유학은 천명을 숭상하지만 묵자는 비명(非命), 즉 운명을 좇지 않는다. 넷째, 유학은 상장례와 제례를 강조하지만 묵자는 절용(節用)과 절장(節葬)을 외친다. 다섯째, 유학은 음악을 중시하지만 묵자는 비악(非樂), 즉 음악을 배척한다.

그 외에 사회의 가치를 일원화시켜야 한다는 상동(尙同), 현인을 숭상해야 한다는 상현(尙賢), 전쟁에 반대한다는 비공 등은 유학과 비슷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취지가 다르다. 유학은 공부를 완성한 성인 정치가를 통해 도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묵학은 노동자와 농민을 어떻게 하면 이롭게 할 것인가에 목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3년상을 치르면 농사를 못 지으니 안 된다고 주장했고, 비싼 악기를 사서 음악놀이를 하는 것은 낭비라고 주장했다. 묵자는 세상의 물자가 부족하니 아껴 써야 하며 특히 정치인들이 재부를 허비하는 것을 미워했다.

유학이 인(仁)을 추구했다면 묵학은 의(義)를 소중히 여겼다. 인은 선천적으로 내재된 가치이며, 의는 후천적으로 정의된 가치이다. 맹자의 말을 빌리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인이고, 형제끼리 우애하는 것은 의다. 묵자의 사상은 실천과 경험을 중시했으며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의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긴 귀의(貴義) 사상이다. 지금도 의리를 강조하는 중국의 많은 결사들은 묵가를 성인으로 추앙하곤 한다.

묵자는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의가 있는데 이를 윗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통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윗사람의 윗사람인 최고 정치지도자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는 말 아닌가? 물론 묵자는 천자보다 높은 곳에 하늘의 뜻이라는 천지(天志)를 두고 있긴 하지만 농민과 노동자를 대변한 사상가 묵자가 왜 이런 독재자들이나 하는 주장을 했을까.

▲ 묵자기념관에 있는 묵자상. ⓒ장현근

묵자기념관 앞에는 43미터짜리 용천탑(龍泉塔)이 있고 뒤편엔 한대 화상석 박물관과 노반(魯班) 기념관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며 내내 고민했지만 묵자의 참뜻이 아리송하기만 하다. 묵가 사후에 묵도의 본거지는 서쪽 진나라로 옮겨갔다. 거자 복순(腹䵍)은 진혜왕의 대신이었는데 아들이 살인을 했다. 왕은 대신의 외아들이니 살려주라고 명했지만 거자는 집에 돌아와 '묵가의 법'으로 아들을 처단했다. 국법보다 지엄한 것이 묵법이었다. 묵자는 당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방면, 즉 인식론과 우주론, 과학, 물리학, 논리학, 철학, 군사학, 수학, 기계학 등의 선구자였다. 엄한 규율을 지닌 조직과 풍부한 교리를 갖춘 이 사상이 진한 제국의 등장과 더불어 중국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독재 권력에 맞서는 주장이 많아서가 아닐까.

현대 중국에선 묵자를 유물사상의 원조이며 과학기술의 성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세월과 가치관의 부침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니 오히려 나는 묵자를 통해 인생살이를 생각해본다. 세상을 전쟁터로 보고 남을 꺼꾸러뜨림으로써 자신만을 성취하려는 수많은 '출세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한 줌의 출세욕으로 인해 상처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묵자처럼 방어 전략을 수립할 수는 없을까. 결국은 모두에게 손해인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결국은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전투적 세상살이를 줄이기 위해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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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길림 대학교 문학원 및 한단 대학교 등의 겸임교수이다. 중국문화대학에서 '상군서' 연구로 석사 학위를, '순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가 사상의 현대화, 자유-자본-민주에 대한 동양 사상적 대안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 사상의 뿌리>, <맹자 : 이익에 반대한 경세가>, <순자 : 예의로 세상을 바로잡는다>, <성왕 : 동양 리더십의 원형>, <중국의 정치 사상 : 관념의 변천사>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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