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실 인식은 하나로 모아졌다. 즉, 한국 사회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부실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표출된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사령탑) 부재 및 관료들의 책임 회피 성향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한국 경제의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 단, 그 컨트롤 타워는 밀실에 숨어서는 안 되며, 국회와 협의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통로를 구축하여야 한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정책적 권한과 자원을 배분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 궁극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오로지 대통령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병준 교수, "경제 사령탑 부재 및 관료들의 책임 회피" 비판 성명
김광두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김병준 국민대학교 교수,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 김호기 연세대학교 교수, 백용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이원덕 서울대학교 객원교수 등이 지난 5월 30일 발표한 성명 가운데 일부다. 약 5개월 전이다. (☞관련 기사 : 박근혜 가정교사 "구조 조정, 책임은 오직 대통령")
이들 교수 가운데 한 명인 김병준 국민대학교 교수가 2일 총리로 내정됐다.
당시 성명에서 경제 사령탑 부재 및 관료들의 책임 회피 성향이 거론됐다. '최순실 게이트'가 시작된 지금, 이 문제는 지금 더 심각해졌다. 자신이 받은 지시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공무원이 책임감을 갖고 일하겠나.
밀실에 숨은 대통령
사령탑이 "밀실에 숨어서는 안 되며, 국회와 협의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통로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은, 지금 더 절실하다.
이제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의 '7시간' 동안만 밀실에 있었던 게 아니다. 대통령의 일상이, 아니 영혼마저 밀실 안에 가둬져 있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말했다. 그가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일했던 11개월 동안 대통령과 독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통령이 국회 및 정치권과 소통하도록 다리를 놓는 게 정무수석의 역할이다. 당연히 대통령과 정무 수석은 긴밀하게 상의할 일이 많다. 그런데 11개월 동안 독대한 적이 없었다.
'전차군단'마저 위기, 경제는 지뢰투성이
성명이 나온 5개월 전보다 경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남북 관계 및 국내 정치 상황에 면역력이 있었던 주가 지수도 지금은 불안하다. 가계부채는 올 연말에 1300조 원을 넘을 전망이다. 규모만 문제가 아니다. 자영업자와 저소득층의 부채가 빠르게 늘어난다. 사회 안전망이 부실한 상황에서 이는 치명적인 뇌관이다.
한국 경제를 선두에서 이끄는, 이른바 '전차군단'.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역시 제품 신뢰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이는 경기 둔화로 인한 수요 감소와는 다른 차원이다. 기술 및 제품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 설령 경기가 살아나도 혜택은 다른 기업 몫이다. 그게 어디일까. "규제는 암"이라는 대통령의 선동 속에서, 재벌이 국내에선 천적 없는 포식자가 돼 버렸다. 삼성과 현대차 등 재벌을 대신 할 새싹이 죄다 짓밟혀버렸다. '전차군단'이 후퇴한 자리는, 중국 등 외국 기업이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을 다들 안다. 그리고 지금, 해운 및 조선 산업 구조 조정이 진행 중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실세들이 빨대를 꽂는 통에 병이 든 기업들을 수술하는 일이다. 지뢰밭 한복판에서 폭탄을 제거하는 공병의 작업과 닮았다.
학문 윤리에 약점 있는 교수, 리더십 발휘할 수 있나
이처럼 예민한 작업을, 새로운 총리가 지휘할 수 있을까. 김병준 내정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 교육 부총리 등을 지냈었다. 논문 표절 논란으로 부총리 직에서 중도 하차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는 사이, 학문 윤리에 대한 잣대는 더 엄격해졌다. 이 대목에서 흠결이 있는 교수 출신 총리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게다가 노무현 정부 시절 김 내정자를 낙마시킨 건 보수 진영이었다. <중앙일보>가 표절 논란에 관한 첫 보도를 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를 끌어 내렸다. 여기 동참했던 의원들이 지금도 국회에 있다. 새누리당이 낙마시켰던 전직 부총리를, 새누리당 정부가 총리로 지명했다. 김 내정자와 집권 여당이 서로 민망해졌다. 둘 사이에 매끄러운 소통이 가능할까?
'최순실 게이트' 당사자가 재벌인데…, 맞설 수 있나?
의문은 또 있다. 김 내정자는 노무현 정부 안에서도 대체로 보수적인 편이었다. 재벌과도 가까운 편이었다. 그가 발탁된 한 이유일 게다. 역시 10여 년이 지나는 사이, 재벌의 위상은 꽤 달라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비해, 재벌 경제에 대한 경각심은 훨씬 높아진 상태다. 보수 지식인들도 종종 재벌을 탓한다. 당장 지금, '최순실 게이트'가 바로 재벌 체제와 맞물려 있다. 재벌이 최순실 씨 일가에게 돈을 내고 이런저런 부탁을 한 정황이 있다.새로운 총리는 구조 조정 등 민감한 경제 현안을 다뤄야 한다. 재벌과 이해 관계가 부딪히는 결정도 해야 한다. 김 내정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김병준, '책임 총리' 될 수 있을까?
지난 5월 30일 성명 내용을 곱씹게 된다.
"여기에 필요한 정책적 권한과 자원을 배분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 궁극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오로지 대통령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대통령이 지금 식물 상태다. 그러니까 '책임 총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국무총리가 "과정과 결과에 궁극적 책임을 지는 주체"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일 게다.
김병준 내정자는 과연 '책임 총리'가 될 수 있나? 그는 약 5개월 전에 발표한 성명 내용을 기억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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