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식 씨가 치안국의 먹잇감이 된 것은 유위하라는 공작원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작원은 권양섭 씨의 동생이자 대식 씨와 사돈 관계인 권영섭이라는 사람과 연락하고 지내던 공작원이었습니다. 권영섭 씨와는 집안도 얽혀있는 데다가 함께 운동을 했기 때문에 대식 씨는 나름대로 권영섭 씨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북한 쪽 사람과 긴밀히 교류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어쩌다 4.19 학생 운동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됐는데,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1960년대 말 시골 아주머니는 정말로 순박하기 짝이 없는데, 대화를 해보니 정치적인 식견이 상당했습니다. 내가 소위 명문 대학 나온 사람이고 외국물이라는 것도 좀 먹었는데, 어떤 점에서는 저보다 수준이 월등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단순히 촌 아낙네는 아닐 것 같긴 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말투며 외모가 경상도 분 같아서 저는 그냥 동향 아주머니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누가 공작원인 줄 알았겠습니까. 그 사람은 나를 계획적으로 만났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사람이 의도나 신원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대식 씨를 만난 유위하는 얼마 후 산을 타던 중 굴러떨어져 기절했고, 당시 그를 발견한 나무꾼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수상한 물건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치안국으로 끌려가 남파 간첩임이 들통난 유위하는 남한에서 만난 이들을 줄줄이 내뱉었습니다. 대식 씨 이름도 나왔습니다.
치안국에서 대식 씨에게 씌운 혐의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은 북측에 남한 사회에 대한 여론조사 내용을 넘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의 형법 98조 2항이 적용됐습니다.
순전히 거짓이었습니다. 대식 씨는 애초에 여론조사를 벌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로 누명을 쓴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여론조사 결과를 넘겼다는 이유만으로 형법 98조 2항을 적용받게 된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놓이면서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때였습니다. 치안국에서는 제가 그때 비상사태 선포에 대해 자본가층, 청년, 인텔리, 노동자 등 계층별로 조사하라는 지령을 받고 여론조사서를 작성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실제로 조사를 했으면, 조사한 대상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당연히 있을 리가 없겠죠. 저는 아는 노동자나 농민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층 면접인지 객관식인지 구체적인 조사 방법에 대한 설명도 없었습니다. 원심은 이런 데 대한 검증도 없이 이뤄졌습니다."
1심에서 '사형'이라는 극형이 떨어졌습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3일 후였습니다. 지금의 서울 구치소인 서대문형무소에 갔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정치범들이 150명가량 있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그곳에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행'이 이뤄졌습니다.
그해 겨울,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습니다. 매일 죽을 차례를 기다리는 신세에서 죽을 때까지 징역을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동생은 이혼을 당했습니다. 여동생의 시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이후락의 특별 보좌관이었습니다. 시아버지에게 '오빠를 살려달라' 부탁했지만, 살려주기는커녕 '빨갱이 집안'이라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여동생은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제가 그저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나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다 안 겪어도 될 불행들을 겪었으니…."
어머니는 감옥살이하는 아들을 부지런히 뒷바라지했습니다. 아들이 무기수임에도 애착이 대단했습니다.
"제가 전향서를 안 쓰고 버티고 있으니, 교도관들이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살아서는 못 나간다'고 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어머님이 '내 자식 시체를 먼저 볼 수 없으니 나 먼저 죽겠다'고 하셔서 교도소에서 난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대식 씨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고 수감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향서 쓰기를 거부한 대가였습니다. "죄가 없으니 전향할 일이 없다", "난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고문보다 비참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제가 전향서 안 쓴다고 버티다가 맞고 피투성이가 됐는데, 교도관이 제가 죽을까 봐 불안했는지 일반 잡범을 제 방에 넣어주면서 위급하면 보고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피가 떡이 진 저를 계간(鷄姦)했습니다. 무기수 신세에 이런 말로 다 할 수 없는 치욕까지 겪었습니다."
그는 1988년 전향서를 쓰고 투옥 19년 만인 1990년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일본에 있는 친구를 통해 스포츠 신발 공장 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땐 한국이 스포츠 신발 분야에선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 가도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해 임금 경쟁력에서 뒤처지면서, 신발 사업이 사양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무역업인데 세계 곳곳 어디를 둘러 봐도 한국인이 깃발을 꽂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딱 한 군데 빼고. 바로 북한이었습니다. 대식 씨는 1994년, 대북 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정보원에 있는 후배들에게 대식 씨가 대북 사업을 해도 될지 문의했습니다. 대식 씨가 대표이사는 될 수 없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아내 이름을 빌려 '대동무역'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주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땐 몰랐습니다. 대북 사업이 다시금 간첩 혐의를 쓰게 되는 빌미가 될 줄은.
*
2012년.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휙 낚아채더니 체포 영장을 들이댔습니다. "일단 같이 가고, 아무런 죄가 없으면 선생님을 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바깥을 보니, 스무 명 건장한 남자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순식간에 집에 난입한 남자들은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딸들은 놀란 마음에 학교도 가지 못 했습니다.
"아버지는 죄가 없다"며 딸들을 다독인 뒤,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서울 옥인동 보안분실이었습니다.
"GPS(위치정보시스템) 자료를 북한에 넘긴 적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요?"
"연세도 많고 하니 솔직히 얘기하면 좀 봐드리겠습니다."
조사관들의 말마따나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GPS가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저들은 '인정하라'고 했고, 대식 씨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평행선 같은 대화가 반복해서 오갔습니다.
그 이튿날 구속영장이 떨어졌습니다. 언론은 그를 거물 간첩으로 보도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라는 잘못된 내용까지 섞여 있었습니다.
"GPS 전파 교란기술 北에 빼돌리려던 2명 구속…비전향 장기수 출신 70대 포함"
"GPS 교란기술 등 북에 넘긴 고정간첩 최고위층 구속"
서해안에 GPS 신호 이상이 문제되던 시기였고, 대선이 반 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언론은 GPS 신호 교란의 배후에 이 사건 연루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출소 후 사업에 몰두하던 그가 어쩌다 다시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을까요.(다음에 계속)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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