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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비공 트럼프와 넋나간 박근혜가 만나면… [한반도 브리핑] 트럼프의 여백, 한국이 채우기 나름
트럼프의 당선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당선을 전망 못 한 게 아니라 당선을 전망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선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집착했을 뿐, 트럼프의 당선은 오히려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온 세계는 자국의 이기심에 기반한 고립주의가 대세였다.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폐해는 붕괴된 중산층과 경제적 좌절 계층이 정치적 분노를 결집하면서 이기심과 배타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포퓰리즘을 양산하고 있었다.

여론 조사에서 전혀 예측되지 못했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Brexit, 브렉시트)도 국경 개방 이후 북아프리카 난민과 동유럽‧무슬림 근로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경제적 피해 의식이 '하나의 유럽'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무참히 짓밟은 결과였다. 유럽 각국에서 정치적으로 약진하고 있는 반이민 정책의 극우 정당들이 최근 선전하는 것도 이기심과 배타주의라는 정치적 분노의 결과였다.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한 푸틴의 삐뚤어진 민족주의가 러시아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것도, 보통 국가를 내세워 헌법 개정과 군사 대국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고 있는 아베가 일본에서 일관된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모두 경제적 좌절이 정치적 분노로 결집하면서 초래된 비정상적인 정치적 결과이다.

트럼프 역시 경제적으로 좌절한 백인 중산층의 분노를 반이민 정책과 자국 이기주의로 결집시키고 동시에 정치적 기득권에 식상한 변화 지향의 유권자들에게 새롭고 신선한 이방인의 이미지로 어필하면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대선 결과를 창출해냈다. 흑인 대통령에 이어 여성 대통령을 선출하기 싫은 백인 내면의 정서를 그럴듯한 정치적 구호로 잘 포장해낸 것이다.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백인 근로자들의 잘못된 좌절감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를 정당화시켰고 역으로 힐러리 클린턴은 1992년부터 영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거치면서 정치적 기득권의 표상이자 미국 최대의 비호감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이런 배경 하에서 트럼프의 대외 정책은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America First'와 '고립주의'일 수밖에 없고 그 정서적 이면에는 자유 무역을 반대하는 '반세계화'와 이민자를 거부하는 '반(反)다문화주의'가 바탕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의 대외 정책과 대한반도 정책을 쉽게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력과 공직 경험이 전혀 없는 정치적 이단아의 대통령 당선이기에 그의 정책 방향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선거 기간 중 그가 쏟아낸 주장과 입장들은 정상적인 대외 정책으로 수용하기엔 지나치게 이례적이고 거침없는 파격적 내용들이었다.

일부에서는 선거 기간 중 그의 발언과 달리 당선 이후 전문성 있는 보좌진과 공화당의 정치적 지지를 받게 되면 파격보다는 일정한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물론 대통령이 되면 미국 정부의 연속성을 완전 거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득권에 대한 반대, 변화에 대한 열망을 기반으로 당선됐고, 집권하자마자 재선을 고려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층을 지속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안정성보다 트럼프식 불확실성이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도 높다.

불확실성과 불가측성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외 정책의 정치적 본질은 반세계화와 반다문화주의를 내세운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정치적 승리의 본질이자 정치적 지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다면 미국이 그동안 수행했던 기존의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이나 지역 분쟁에의 과도한 개입은 트럼프에겐 내키지 않은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국가 이익을 직접 해치지 않는 한 미국이 정치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국제적 개입은 최대한 자제할 것이고 역으로 미국이 경제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시정을 요구하고 경제적 대가를 챙기려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의 대한반도 정책이 한미 동맹에 대한 한국 측의 추가 부담과 경제적 보상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은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지금보다 훨씬 올려야 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후보 시절 강력하게 어필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국의 자체 핵무장도 무방하다며 한국은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까지 서슴지 않기도 했다.

반세계화 입장에 따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나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반대 등도 미국이 경제적 손해를 볼 수 없다는 미국 우선주의의 사례들이다. 트럼프의 대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준거는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겠다는 현실적 고립주의의 맥락일 것이다.

▲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대통령 당선자가 9일(현지 시각) 오전 미국 뉴욕시 힐튼 미드타운 선거본부에서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의 대북 정책은 더더욱 불확실하다. 그가 선거 기간 중 간헐적으로 표출한 대북 정책의 방향은 사실 종잡기 어렵다. 국제 정치에 대한 전문성도 부족한 데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평범한 일반인 수준의 감정적 언사에만 그치고 있다.

그는 김정은을 미치광이로 표현했다. 고모부를 총살한 이해 못할 젊은 폭군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통제불능인 북한의 핵무장은 당연히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중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범한 백인 남성의 대북 감정 수준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김정은과 대화를 못할 이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김정은이 미국에 오면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겠다는 묘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유세 도중 트럼프의 대북 관련 발언은 사실 일정한 방향과 기조를 정리한 정책이라 볼 수 없다. 즉흥적이고 정서적인 대북 인식을 간헐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미국의 이익이 최우선인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결합한다면 일단 대북 정책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시급하거나 지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북 정책 윤곽도 그리 정교하거나 일관되지도 않다.

김정은을 미치광이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독재자로 인식하다는 점에서 보면 북한의 도발과 위협이 일정 수준을 넘게 될 경우 트럼프는 예측 불가의 일방통행식 군사적 옵션을 과감히 선택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김정은과 햄버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그의 발언으로 미뤄보면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와 달리 핵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판단이 설 경우 오히려 조건없이 파격적으로 북미 담판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정치인도 장관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사업가였기 때문에 필요한 협상에서 빅딜을 감행할 수도 있다. 결국 유세 기간 중 그의 대북 발언으로 유추할 수 있는 대북 정책은 불확실성의 토대 위에 서로 상반되는 방향이 모두 가능한 '정치적 여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촘촘히 메꿔지지 않은 채 불확실과 불가측의 여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우려하기보다는 긍정의 방향으로 견인할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한반도 정세와 남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의 대북 정책도 미국에게 일정한 영향력과 개입력을 갖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더욱이 트럼프처럼 아직 불확실의 영역에서 모든 옵션이 가능한 여백의 정책 공간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한국의 대북 정책 방향이 미국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이 한반도 문제를 혼자만의 힘으로 말끔히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는 못되었지만 적어도 정세 악화와 정세 호전의 측면에서는 정부의 역할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미쳐왔다. 김대중 정부 당시 한국 주도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2000년 겨울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특사 방문과 클린턴 대통령과의 회담이 성사됐고 곧이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과 김정일과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한국 정부가 열어놓은 한반도 정세의 호전이 냉전 이후 최대의 북미 고위급 상호 방문을 성공시킨 것이다.

노무현 정부도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에 굴하지 않고 6자 회담과 북미 협상에 일관되게 공을 들임으로써 2005년 9.19 공동 성명을 도출했고, 이후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와 북한의 핵 실험에도 불구하고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2007년 2.13 합의로 북핵 문제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반대의 경우였다. 2009년 미국의 '포괄적 패키지' 접근으로 북미 협상의 가능성이 마련될 때 이명박 대통령은 '그랜드 바겐'을 내세워 북핵 폐기라는 최종 목표가 협상의 전제 조건임을 강조함으로써 북미 협상에 제동을 걸고 말았다.

핵시설 불능화와 냉각탑 폭파 및 핵 신고서 제출에 대해 미국이 테러 지원국 해제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북핵 협상이 상당히 진전되던 2008년 12월 6자 회담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검증 방식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집하였고 결국 그때 이후 6자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4차 핵 실험 이후로 북미의 그 어떤 협상 가능성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봉쇄하는 입장이었다. 2015년 노동당 창건 70주년 즈음해서 북한이 대미 평화 협정 협상을 제의했고 그해 말 뉴욕 채널을 통해 북미 간 평화 협정 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월 4차 핵 실험 이후 개성공단 폐쇄와 대북 제재 만능주의로 전환하면서 북미 협상의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철저히 거부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제안한 비핵화와 평화 체제 병행 협상론도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다. 제재 국면에서 대화의 '대'자도 꺼내지 말라는 대통령의 날 선 고집이 북핵 협상의 숨통을 완전히 막고 있는 셈이다.

결국 한국의 정책 방향에 따라 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는 정세가 호전되기도 하고 오히려 악화되기도 했다. 때로는 미국의 강경 입장이 심각한 한반도 정세 악화로 결과되지 않도록 안전판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적극적 노력을 통해 미국으로 하여금 북미 협상에 나서도록 정세 호전을 촉진하기도 했다. 반대로 북미 협상의 가능성을 가로막거나 제동을 걸기도 하면서 한국이 오히려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를 감안하면 향후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의 영역이 크고 그만큼 아직 채워지지 않은 여백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미국의 대북 정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트럼프의 파격과 돌출 행동을 우려하기보다는 그가 가진 불확실성을 여백의 미학으로 채워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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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
김근식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남북관계 전문가입니다. 김 교수는 청와대 안보실 자문위원, 통일부 자문위원,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고 2007년 특별 수행원으로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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