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귀국 예정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여론의 관심이 쏠리면서, 반 전 총장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 나이로 74세에 '정치 신인'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반 전 총장에 대해 알려진 공식 기록들은 꽤 많다. 그러나 10년 간 한국을 떠나 '리버럴'한 생활을 해왔던 그가 과연 '한국 특유의 정치'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 반기문 전 총장 귀국을 맞아, 그의 지난 10년간 행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 합한 지난 70년간의 행적도 차근차근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944년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행치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국 나이로 74세, 만으로 72세다. 그의 생가는 현재 기념관이 돼 대중에 공개돼 있다. 외신은 한국인들이 반 전 총장의 생가를 명소로 여기는 풍조를 북한 등 공산주의 문화권의 개인 숭배에 빗대기도 했다. (☞관련 기사 : '반 전 총장 기념관' 간 'WP' 기자 "여기는 북한?")
반 전 총장 일가는 1948년 음성을 떠나 청주를 거쳐 충주 시내로 이주했다. 반 전 총장의 아버지 고(故) 반명환 씨는 농고를 나와 통운 회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의 조부는 한의원을 운영했고, 숙부는 충주시 부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3남 2녀의 장남으로, 그의 형제자매 4명은 모두 은행원, 약사, 교사 등 전문직에 종사했다.
반 전 총장은 1970년 외무고시 3회에 합격해 직업 외교관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외교부 차관까지 승승장구했다. 외교관들은 후배나 동료들에게 '반 전 총장의 반만 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반 전 총장 본인도 '선배들 보기 민망하니 승진 좀 그만 시키라'고 상사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관 이후 관운은 좋지 않았다. 이른바 ABM 사태로 반 전 총장은 외교차관직에서 물러났다. 2001년 한-러시아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 협정을 준수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표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이른바 미사일방어(MD) 체제를 염두에 두고 ABM 제한 조약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였다. 결국 한미관계가 악화될 상황이 됐고, 반 전 총장이 책임을 졌다.
외교차관에서 물러난 그의 공직 복귀 자리는 차관보다 의전서열이 낮은 직위였다. 관례에는 맞지 않는 인사였다. 2001년 당시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총회 의장을 맡았을 때 의장 비서실장을 맡은 것인데, 그전까지 이 자리는 실국장급 공무원이 맡는 직위여서 외교차관까지 지낸 반 전 총장이 맡을 자리가 아니라는 평이 많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장관급인 주유엔 대사를 지낸 그로서는 이 역시 관례에는 맞지 않는 자리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2004년초, 외교통상부 공무원들이 노무현 정부 NSC 주도 세력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한 발언이 문제가 됐고 윤영관 당시 장관은 이 문제로 사임하게 된다. 그는 이 때의 경험에 대해 미국 언론인 톰 플레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이런 와중에 한국 외교부 직원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외교통상부 일부 직원들이 대통령을 폄하하는 부적절한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었습니다. 뒤에서 대통령을 조롱하고 있었던 거죠. 이것이 노 대통령 귀에 들어갔고, 화가 난 노 대통령은 외교통상부 장관을 해임했습니다. 그때 제가 임명되었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만일 제가 첫 번째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임명됐더라면 그때 해임된 사람이 제가 되었을 겁니다! 그 모든 논란으로 말이죠!" - 플레이트 <반기문과의 대화> 108쪽
장관으로서 그는 노무현 정부 핵심 인사들에게도 신임을 얻었다.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내 친미 성향 외교관들과 마찰을 빚었던 이른바 '자주파'의 대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반 전 총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의 핵심 참모였던 이 전 장관과 반 전 총장은 주한미군 3600명의 이라크전 차출, 2003년 대북 특사 파견 등의 의제를 놓고 서로 대립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전 장관은 반 전 총장의 역량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미국의 반대로 최종 합의가 불가능해지자 중국 측은 (6자회담) 휴회를 검토했다. (중략) 우리는 9월 17일로 예정돼 있는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 기대를 걸었다. 국제사회에서도 최고의 외교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반기문 장관의 협상력을 믿어본 것이다. 반 장관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미 외교장관은 두 차례의 전화 통화와 한 차례의 공식 회담, 또 한 차레의 리셉션 대화를 통해 극적으로 합의를 도출해냈다
(중략) 2004년 1월 반기문 장관 부임 이후부터 내가 통일부 장관으로 옮길 때까지의 2년간 NSC 사무처와 외교부는 밀월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찰떡궁합으로 협력하며 숱한 외교안보 현안들을 함께 풀어나갔다. - 이종석 회고록 <칼날 위의 평화>
그러나 반 전 총장은 이 전 장관 등으로부터 "지나치게 친미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용산기지 반환과 관련해 미국의 '라포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일 등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관련 기사 : 반기문은 미국의 로비스트인가?)
또 미국 고위당국자와 만난 일과 관련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 누락'을 일으켜 공개 질책을 듣는 일도 있었다. (☞관련 기사 : 반기문, '대통령 노무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이종석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에게 직접 반 전 총장을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추천했다. 이는 노무현 정부와 반 전 총장 개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2006년 당시 노무현 정부는 9.19 공동성명 외에 딱히 내놓을 만한 외교적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반 전 총장의 당선을 위한 범정부 TF를 구성했고, 대통령이 직접 타국 정상들에게 선거운동을 했다. 타국에 특사도 파견했다. 권진호 안보보좌관은 탄자니아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는 전례를 남겼다.
심지어 반 전 총장의 당선을 위해 한국 외교정책과 관련된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 방향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전격 합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의 재개, 한미 FTA 협상 등에서 미국에 전폭적 양보를 시사한 것 등이다. 북한의 위조 화폐 문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언급을 자제해 오던 노무현 정부가 돌출적 발언을 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대사는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 전문(電文. cable)에서, 노무현 정부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 인권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고 유엔에서 이뤄진 북한 인권 관련 결의안에서도 기권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반 전 총장이 직접적으로 북한의 인권 상황을 비난하고 국제사회와 인권문제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것을 '놀라운 행보'(surprising step)라고 평했다. 반 전 총장의 선거운동 기간, 한국 외교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버시바우는 놓치지 않았다.
반기문이 노무현 대통령의 3월 아프리카 순방에 동행하는 동안, 한국 정부는 아프리카에 대한 해외 개발원조액을 현재의 3100만 달러에서 2008년까지 1억 달러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외교통상부 내부의 우리 소식통(contacts)에 따르면, 노무현은 아프리카 방문을 계기로 반 전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 선거 지지를 (공식) 요청하기 시작했다. 반기문은 아마 한국의 지원이 그의 선거운동에 대한 아프리카의 수용성을 높여 주기를 희망할 것으로 보인다.
6월 하순, 반기문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개막 세션에 참여했고, 연설을 하면서 그의 유엔 사무총장 선거운동을 대표하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해 강조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자신의 나라를 방어해 준 한국 사람으로서 반 전 총장은 유엔의 이상, 즉 평화와 안정, 개발, 인권, 민주주의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 설립을 지지했다. 그는 그와 한국 정부가 유엔의 현대화와 개혁에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 첫 번째 세션을 절차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특정 국가를 지목한 발의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에도 불구하고, 반 전 총장은 공개적으로 북한의 인권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북한 정권에 국제 사회의 인권 대화에 참여하기를 촉구하는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과거에 한국 정부는 북한 인권에 대한 유엔 표결에 불참하거나 기권해 왔다. 반기문의 유엔인권이사회 연설은 한국 정부가 북한 인권 상황에 눈을 감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그리고 반기문의 시도였을 수 있다. -2006.7.18 미대사관 전문 (☞관련 자료 : )
이처럼 한국 정부 소속 고위공무원의 일원이었을 당시부터 반 전 총장의 행보를 따라가 보면, 그는 이른바 '정무 감각'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예를 들어 버시바우 전 대사는 반 전 총장에 대해 본국 보고 전문에서 "반기문은 세 명의 매우 다른 대통령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각 정권 모두에서 고속 승진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실 이 전문이 유명해진 것은 물론 반 전 총장의 ‘고속 승진’에 대한 내용보다 그를 숭진시킨 '세 명의 매우 다른 대통령들'에 대한 노골적 묘사 때문(☞관련 기사 : 미국 "YS, 대부분 사안에 '매우 제한적' 지식")이었지만, 반 전 총장이 전두환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승승장구해온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반 전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통틀어 현직 한국 대통령들과 각을 세운 적이 거의 없었다. 지난해 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이후에야 "한국 국민들이 정부의 통치력 부족에 분노와 실망을 느끼고 있다"고 에둘러 말한 정도다.
반 전 총장은 지난 2015년 9월 26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새마을 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 다음 순서 연사로 나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산불처럼 새마을 운동이 번지고 있다"며 "박 대통령의 노력으로 새마을 운동을 개도국에 소개하고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반 전 총장의 연설에 대해 크게 박수를 치면서 한국어로 "감사하다"고 직접 인사를 건넸다. 반 전 총장은 그와 전날 20분간 비공개 환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8년 7월 방한 당시에는 '쇠고기 촛불시위'에 대해 "국민의 안녕이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정부의 책임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국민들도 정부를 적극적으로 믿고 정부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국제 합의 등을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양가적 태도를 취했다.
언론을 활용하는 반 전 총장의 능력에 대해서도 언급할 만하다. 반 전 총장을 지금도 따라다니는 "기름장어"라는 별명도 기자들이 지어준 것일 정도로 기자들의 질문에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가는 한편, 언론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도 알았다. 2005년 그가 처음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노무현 정부가 그를 후보로 결정했을 때, 그는 언론에 이 사실을 함구하지 않고 오히려 각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을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일종의 보도 유예(엠바고) 요청을 한 것이다.
2006년 유엔기자협회 송년 만찬에서는 스스로 이렇게 자신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기름장어'로 통했지만 뉴욕에선 '테플론 외교관'이란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나는 여러분의 어떤 공격도 잘 피해나갈 자신이 있다." 기자 간담회 등에서 농담이나 이벤트를 선보이는 데도 능했다. 그런 한편,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언뜻언뜻 신문 기사거리가 될 만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언론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그의 정적이 될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언론의 취재나 검증 공세 때문에 나가떨어질 확률은 생각보다 낮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정무적 능력'과는 달리 그가 어떤 '정견'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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