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월 20일 세계는 전혀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든다. '미국우선주의', '백인우선주의'를 주창한 도날드 트럼프가 패권국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앞으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돼왔던 세계적 자유무역의 추세는 역전될 것이다. 미국의 제조업 회복 및 일자리 창출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동맹국에 대한 군사적 보호와 적대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도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미국의 과도한 대외 군사 개입이 미국 경제를 약화시켰다고 인식하고 있다. 물론 그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핵공격 위협도 불사하겠다는 극단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 미국의 군사력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노엄 촘스키 등 미국의 비판적 지성들은 기후온난화 위기와 미국의 경찰국가화를 트럼프 시대의 최대 위협으로 꼽고 있다. 화석연료에 의한 기후온난화를 부정하는 트럼프는 셰일 오일과 셰일 가스 등 화석연료 개발과 사용을 확대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로써 기후온난화는 악화되고 인류를 비롯한 지구상 모든 생물종이 절멸하는 최악의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2001년 9.11사태 이후, 테러 위협을 빌미로 강화돼온 정보기관의 대국민 사찰 등 미국의 경찰국가화와 민주주의의 후퇴도 우려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트럼프의 대외 개입 축소 공약이 한국 외교의 자율적 공간을 넓힐 수 있는 호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하고 있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오바마 정부와는 달리 러시아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반면, 중국에 대한 견제와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 정부가 그동안 미 군부와 군산복합체가 추진해온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 구축과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트럼프 시대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프레시안>은 노엄 촘스키, 톰 엥겔하트, 월든 벨로, 이매뉴얼 월러스틴, 존 페퍼, 팀 셔록 등 세계 진보적 지식인들의 글을 통해 트럼프 시대, 세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해 본다.
[트럼프 시대 ①] 톰 엥겔하트 : 트럼프는 전쟁의 역사가 자초한 '역풍'
[트럼프 시대 ②] 월든 벨로 : 오바마의 '경제 실패'가 트럼프를 소환했다
[트럼프 시대 ③] 존 페퍼 : "난 트럼프가 예측 가능해 불안하다"
[트럼프 시대 ④] 이매뉴얼 월러스틴 :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수 없다"
[트럼프 시대 ⑤] 팀 셔록 : 트럼프는 미일한 삼각 군사동맹을 완성할까?
[트럼프 시대 ⑥] 노엄 촘스키 : "트럼프와 공화당, 인류 재앙 몰고 올 것"
[트럼프 시대 ⑦] 이혜정 : 도전받는 미국 패권, 무너지는 한미동맹
미 육군 대령 출신으로 안보 전문가인 앤드류 바세비치 보스턴대 교수는 <톰 디스패치> 칼럼을 통해 트럼프의 집권을 '냉전 이후' 시대를 끝낸 역사적 사건으로 봤다. 즉, 트럼프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 전 시대인 1989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과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바세비치는 그 시기를 '대망의 시대(Age of Great Expectations)'라고 명명했다. 그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의 몰락으로 갑작스런 냉전 종식을 맞은 미국은 '자유세계'의 승리에 도취해 냉전 시대의 과오를 돌아보기 보다는 '유일 수퍼 파워' 미국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 열망은 세 가지 원대한 구상으로 표출됐다. 첫째는 물질적 풍요를 기약하며 미국이 주도한 전면적인 세계화다. 둘째는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을 능가하는 세계적 지배자가 된 미국의 글로벌 군사 패권이다. 셋째는 냉전 시대의 애국주의를 대체한 개인의 자유 등 문화적 패러다임 변화다. 아울러 이 모든 변화를 이끌 미국 대통령에 대한 신화화가 동시에 진행됐다.
하지만 기대와 현실은 크게 달랐다. 세계화는 '1% 대 나머지'로 갈라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했다. 군사 패권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궁극적으로 미국이 승리한 전쟁은 없었다. 개인의 자유는 소비문화 속에만 존재할 뿐, 개인들의 처지를 더욱 곤궁하게 몰아갔다.
이 시기의 대통령들 역시 탄핵 논란(빌 클린턴), 대선 재개표 논란과 대테러 전쟁(조지 부시)등을 일으켜 미국을 혼란스럽게 했으며, 가장 진보적 대통령이라는 버락 오바마의 집권기에도 인종주의가 더 확산됐다는 게 바세비치의 주장이다.
바세비치는 냉전 이후 시대의 이러한 주요 모순들을 묘사하며 '대망의 시대'의 맨얼굴은 결국 '대공허의 시대'였다고 지적했다. 기대가 상실로 바뀐 현실 앞에 유권자들은 세계화의 모순과 군사주의 무용론을 주장하며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올바름을 뒤집어엎은 트럼프를 결국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바세비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반세기에 걸친 '대망의 시대'를 대체할 비전을 제시할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우려하는 일들을 벌이거나 기껏해야 과도기적 시대로 끝날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그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번영을 모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접근, 군사주의를 폐기한 신중하고 실용적인 외교정책, 풍부하고 포괄적인 자유의 개념으로 재정립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곧바로 수행됐어야 할 반성과 후회, 속죄를 지금이라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바세비치 칼럼 전문.
1989년, 예기치 않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탈냉전 시대를 끝장냈고 또 다른 시대를 열었다. 탈냉전과 트럼프 당선이라는 두 역사적 분수령 사이의 기간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까? 도널드 트럼프란 인물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으며, 앞으로 그가 미국과 세계를 어디로 끌고 갈지를 이해하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냉전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냉전 이후' 시대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시대가(1989-2016년) 끝난 지금, 이 시기에 대해 보다 정확한 작명을 할 필요가 있다. 내 의견은 '미국의 대망의 시대(America’s Age of Great Expectations)'로 하자는 것이다.
용서와 망각
아무런 예상도, 준비도 없이 맞은 냉전 종식은 미국을 경악케 했다. 1980년대 내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크렘린궁의 주인이었음에도(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한 그가 과감한 핵군비 축소 제안 등을 통해 미소 평화 공존을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지배계층은 여전히 미소 경쟁이 국제정치의 본질이며 이는 불변의 현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미국의 공식적인 주류 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소련의 위협과 소련 제국, 그리고 소련 그 자체가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건 미국 주류들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경우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선 방대한 계획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미소의 극단적인 갈등이 어느 날 갑자기 해소될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붕괴했을 때에도 미국의 지배계층은 왜 자기들의 예측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는지, 소련 붕괴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인들과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지식인들은 한 목소리로 독일 통일과 뒤이은 공산주의의 붕괴는 우주적 의미를 갖는 미국의 완벽한 승리라고 해석했다. '우리'가 이겼고, '그들'이 패했다. 이로써 미국이 표방하는 모든 것들은 자유의 원형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류적 관점의 틀 속에서, 한 떠오르는 젊은 학자가 과감하게 '역사의 종말'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이름의 이 지식인은 이제 '유일 수퍼 파워'인 미국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지위에 확고하게 올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 실세들은 그의 가설이 정확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제 세계는 미국이 마음먹은 대로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백지장이 되었으며, 이는 세계사가 미국에 부여한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의 엘리트들이 냉전의 종식에 대해 이처럼 떠들썩하게 자축에 도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냉전의 종식을 후회와 반성,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았어야 했다. 미소 대립, 좀 더 넓게는 자유세계와 공산블록 사이의 경쟁과 대립은 인류사회에 매우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양대 수퍼 파워의 군비 경쟁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핵무기가 지구 전체를 아마겟돈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천만했던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단히 수치스러운 두 번의 전쟁이(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수 만 미국 장병들과 수백만 아시아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쟁은 (휴전이라는)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로 끝났다.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쟁에선 재앙적인 패배를 당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에서 치러진 대리전들 역시 엄청난 희생자를 냈으며, 이 나라들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냉전에 집착한 미국은 타국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고, 암살을 자행하고, 부패한 독재자들과 공모자가 되었으며 대량학살 범죄를 못 본 척 했다.
국내적으로는 (반공) 히스테리가 만연해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했고, 쓸모없고 무지막지한 데다 용납 못 할 짓을 하는 국가안보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반면, 군산복합체와 그 수혜자들은 급박한 위험으로 보기 어려운 상황에 대비한다며 고가의 무기 구매에 엄청난 자금을 퍼붓기로 공모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의 주류들과 야심찬 지식인 집단은 그런 어둡고 추악한 문제들을 외면하고 그저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들은, 1989년의 기적(냉전 종식)이 그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사해줬다고 생각했다. 새 출발을 위한 열망에 사로잡힌 미국은 스스로에게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줬다. 미래가 이토록 창창한 번영을 약속하며 손짓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불쾌한 과거를 되돌아본단 말인가?
세 가지 거대한 구상, 그리고 초라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약속은 구체적으로 표현됐다. 새로운 미국의 시대를 정의하는 세 가지 구상이 곧바로 등장했다. 이 구상들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약속된 시대를 향한 엄청난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20세기는 미국의 위세를 뽐내면서 득의양양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전 세계에, 특히 미국 앞에는 위대한 일들만 놓여있었다.
세 가지 중 첫 번째 구상은 세계경제에 관한 것이다. 미국 금융기관과 초국적기업의 주도 하에 가속 질주하는 세계화가 세계경제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으리라는 것이었다. '열린 세계'는 상품과 자본, 지식과 사람의 이동을 촉진시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를 창출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스타일의 기업 자본주의 규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수혜를 보겠지만, 특히 미국인들이 더 큰 물질적 혜택을 누릴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한 몫 이상으로.
두 번째 테마는 국가 운영에 관한 것이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단 하나의 국가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전성기에도 없었던 일이다!- 국제 질서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냉전 종식과 더불어 이제 미국은 세계 최고의 권력이자 대체 불가능한 글로벌 리더의 자리에 우뚝 섰다. 미국의 유일 패권 지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보장된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워싱턴포스트>까지, <뉴 리퍼블릭>에서 <위클리 스탠더드>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미국의 모든 언론들은 이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였다. 또한 언론이나 워싱턴의 주류 지식인들만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의 모든 관료들도 같은 믿음을 공유했다. 미국의 (선량한) 글로벌 헤게모니의 거침없는 행사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인의 안전과 안보를 보장하는 열쇠처럼 보였다.
세 번째 테마는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냉전이라는 비상 시기가 오래 지속되던 때에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 안보 상의 필수조건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냉전 스타일의 애국주의는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러나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라"는 존 F. 케네디의 멋진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이 말이 (명분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 베트남의 논밭에서 베트콩의 총에 맞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일단 냉전이 끝나자 개인의 자유와 국가 안보 사이의 긴장은 순식간에 소멸됐다. 자유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이냐에 대한 지배적 관념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억압과 구속의 해체를 강조하는 이런 변화는 소비 패턴과 문화적 표현 방식은 물론이고, 성 담론과 가족에 대한 정의까지 모든 분야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것으로 간주되는 성 정체성 등 몇 세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수 십 년을 지배해온 규범들이 고리타분한 낡은 관념이 됐다. 냉전 시기에는 국가 안보라는 절대적 명제 앞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공공선의 개념이 이젠 극대화된 개인의 선택과 자율성 뒤로 밀려나게 됐다.
마지막으로, 이 세 가지 테마를 보완하는 통치의 차원에서 보자면,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대통령의 지위는 신과 유사한 위상으로 격상됐다. 대망의 시대엔 대통령이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신화가 자라났다. 미국 정치가 태양계라면, 백악관의 주인은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그를 중심으로 궤도를 도는 태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물론 정부 대대로 대통령들은 미국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주류 정치권과 주류 미디어들은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끝없이 선전하며 제2의 루스벨트, 제2의 케네디, 제2의 레이건이 마법처럼 나타나 나라를 구해줄 것이라는 망상을 심는 데 공모했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선거운동은 보다 길어졌고 더욱 값비싸졌으며, 진부하면서도 서커스 같은 행태는 심해졌다. 그래도 상관없다. 대망의 시대에는, 대통령이 미국인들의 풍요와 안보와 자유를 궁극적으로 보증한다는 맹목적 믿음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됐다.
기습 공격
그러나 약속과 현실 사이에 적지 않은 괴리가 생겼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 21세기의 첫 15년 동안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각종 위기를 견뎌야 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각각의 위기들의 영향은 남북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연속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이 사건들만큼 미국의 제도와 국민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안겼던 전례는 없었다.
미국인들에게 1998년부터 2008년까지의 10년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어느 대통령(빌 클린턴)은 탄핵 위기까지 갔고, 뒤 이은 대통령(조지 부시)은 연방대법원 판결 끝에 대통령이 됐다. 미 본토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수 천 명이 희생됐고 국가적으로도 충격을 입었다. 이성을 상실한 고위 관료들은 잘못된 주장과 완벽한 거짓말에 근거해 멍청하고 쓸모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벌였다. 미국의 대도시(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를 파괴한 자연재해를 잘못 관리해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 당국이 뒤늦게 성의 없는 대책에 착수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리고 결국,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로(2007-2008년) 수백만 가정이 파탄났다.
이 모든 비극의 전모를 알려면 한 가지 사건을 더 추가해야 한다.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당선이다. 그는 전임자인 조지 W. 부시가 야기한 피해를 회복하고 노예제와 인종주의라는 미국의 원죄를 씻어낼 메시아적 인물처럼 떠올라 미국 정치의 정점에 올랐다.
하지만 오바마 집권기에 인종 문제는 사실상 더 악화됐다. 정치적 이해타산이나 신분상승 욕구에 사로잡힌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난데없이 나타나 정치 체제 내부로 진입했다. 물론 그들 중 한 명은 맨해튼의 트럼프타워에서 넌덜머리나는 '버서 논란(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라는 음모론)'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그렇더라도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대통령직에 대한 맹신 그 자체는 고스란히 유지됐다.
각각의 위기들은 당혹감, 불안함, 끔찍함 등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분리해서 다루면 트럼프 선거 승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집합적 함의를 간과하게 된다. 대망의 시대가 붕괴된 이유는 어느 한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과의 시간낭비 시건이나 '구멍이 덜 뚫린 투표용지(hanging chads :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당시 무효표 논란을 일으킨 투표용지)' 사건, 9.11 테러 사건, (이에 대응한 대테러전쟁) '임무 완수(2003년 5월, 부시 대통령이 때 이르게 이라크전쟁의 승리를 선언)', (뉴올리언스의 피해지역인) 로어 나인스 워드의 범람 사건,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어처구니없는 버서 논란 때문이 아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집합적으로 드러낸 바는 그토록 확신했던 기대가 사실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냉전 시대 이후에 발생한 이 다양한 위기들은 냉전의 승리로 과열된 미국의 승리주의가 야기한 세 가지 대구상들에 대해 중요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시대정신을 깨우친 대통령들이 인도한 세계화와 군사력에 의한 패권, 보다 폭넓어진 자유의 개념 등은 냉전에서 승리한 결과이기에 미국인들에게 축복을 선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 2016년 사이에는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계속 발생했다.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선전됐던 미래는 막상 닥쳐보니, 환상은 아닐지라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경험했듯이, 대망의 시대는 달갑지 않은 놀라움의 시대(Age of Unwelcome Surprise)가 됐다.
추락하는 후보, 클린턴
분명히 세계화는 막대한 규모의 부를 창출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미국인들의 몫은 아니었다. 이미 잘 살던 사람들은 더 호사를 누렸으며 몇몇 경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됐고, 점점 더 좋은 일자리가 생기기는커녕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2016년 대선은 미국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풍요로운 자와 뒤쳐진 자, 1%와 그 나머지로 양분된 사회라는 걸 드러냈다. 투표를 벼르고 있던 유권자들은 일찌감치 이를 알고 있었다.
패권적 열망에 고무됐던 대외정책도 행복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군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정책 목표에서(심지어 정치적인 수사에서도) 평화라는 말은 자취를 감췄다. 세계 최고의 훈련을 받고 최고의 장비를 갖춘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미군이 정작 전쟁에선 승리할 수 없는 군대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국가안보 세력은 항구적 전쟁(앞으로 미국의 전쟁은 적어도 수 십 년 이상 지속된다)이라는 관념에 젖어갔으며 고위 관료들은 평범한 시민들도 이 새로운 현실에 당연히 적응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곧 분명해진 것은,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안보의식을 불어넣기는커녕, 선동적인 공포 조장에 휘둘리는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처지가 불안하고 위험하다는 느낌만 유발했다.
자유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라는 측면에서도, 국가적 지고지선으로 등장한 자율성은 소수에게만 만족스러울 뿐 나머지에겐 그렇지 않았다. 대망의 시대에 시민과 소비자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이제 쇼핑은 시민적 의무사항이 됐다. 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랙 프라이데이'와 '사이버 먼데이' 때 벌어지는 난리법석이 미국인들이 누리는 자유의 표상처럼 보였지만, 그건 기껏해야 순간의 만족, 즉 신용카드 명세서에 적힌 지불 만기일 때까지 일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디지털 관계망이 개인을 대체하면서 일자리 등 사회적 관계는 더욱 임시적이고 일시화됐다. 고독감은 지속적인 고통이 되어갔다. 다른 한편으로 유색인종, 여성, 게이 등 소수자들의 권리 증진에 관한 담론은 무성했지만 정작 알짜배기는 엘리트들이 차지한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위선과 허무로 가득 찬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같은 다양한 모순에 대해 주류들이 얼마나 무신경했는지, 그 적절한 사례를 2016년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보여줬다. 널리 알려진 대로 클린턴의 오랜 공적 활동 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망의 시대의 주류를 상징했다. 그는 세계화를 신봉했고, 군사력이 지탱하는 미국의 리더십이 필수적이라고 믿었으며, 냉전 이후의 문화적 과업을 믿었다. 무엇보다 클린턴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그 신념들을 구체적인 결과로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시대에 대한 이 같은 보편적 신념과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선두적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클린턴의 질주는 필연적이었다. 그의 승리는 자명해 보였다. 어쨌든 이번 대통령은 그녀 차례였던 것이다. 하지만 클린턴이 크게 간과한 것은 대망의 시대를 관통했던 구상들이 이제 더 이상 유권자들의 충성을 자동적으로 끌어내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징후들이었다.
거칠어진 호흡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그런 징후 가운데 하나를 보여줬다. 버몬트 출신으로, 인생의 전성기가 지난 사람이자 자칭 사회주의자이며, 의회에서의 입법 성과도 변변치 않고 민주당과의 관계도 취약한 그가 클린턴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 겉으로 보기엔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세계화의 불가피한 부산물인 불공정과 불평등 문제를 꿰뚫어본 샌더스는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샌더스의 도전에 잠시 휘청거렸던 클린턴은 자신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입장을 수정해서 대응을 했다. 클린턴은 세계화를 완벽하게 상징하는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듯한 발언으로 상황을 관리했고 큰 어려움 없이 샌더스의 반란을 잠재웠다. 패하긴 했지만, 샌더스는 대망의 시대의 산소가 소진되어가고 있다는 경종을 울리며 주류들에게 탄광 속 카나리아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샌더스가 민주당에서 벌인 일과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기이한 반란이 공화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자아도취적인 초짜 정치인이 공화당을 집어삼킬 가능성은 샌더스가 클린턴을 제치고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보다도 희박해보였다.
투박하고, 상스럽고, 부도덕하고, 무식하고, 변덕스러운 데다 진실에 대한 관심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트럼프는 대선 후보들 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잘못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전가하며 비난하거나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요령이다. 마침 클린턴이 "개탄스럽다"고 무시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 사이에선 불만이 뜨거운 발효실 속의 치즈처럼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직관력이든 계획적인 악의든 간에, 트럼프는 이 개탄스러운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데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다. 트럼프는 그들의 버튼을 눌러 불만을 폭발시켰다. 트럼프의 대중 집회에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강렬한 메시지를 들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약속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대망의 시대에 자기들이 빼앗겼다고 여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트럼프는 세계화는 이롭지도 불가피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고, 당선되면 지나친 기업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다른 나라들에 빼앗긴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되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 돈을 풀고, 세금을 감축하고, 국가 채무를 줄이고,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트럼프가 자신의 팬들에게 확언한 이런 각종 처방에는 수많은 문제와 모순들이 내재돼 있었지만 그는 탁월한 사업적 요령을 발휘해 이를 호도했다.
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이란 측면에서도 트럼프는 기존 상황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전쟁을 영원히 질질 끌도록 놔두지 않고 (군사 담당자들을 재촉해서) 승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승리할 수 없다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건 미련 없이 손을 털고 나오겠다고 했다. 적어도 그는 소위 동맹국들이 미국을 봉처럼 대하는 것은 막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군사적 보호 덕택에 이득을 보는 나라들은 비용 분담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들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는 1989년 이후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작동해 온 공식에서 급격한 이탈을 하겠다는 의미다.
트럼프가 세계화와 미국의 글로벌리즘에 대해 어느 정도 일관된 비판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대목은 그가 냉전 이후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배제돼 불만에 찬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 과시적 소비가 인간 행복의 열쇠인지, 혹은 젠더, 성별,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논란에 대해 트럼프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어떻게 경로를 이탈했는지, 자유의 축복을 어떻게 도둑맞았는지를 지지자들에게 또렷하게 설명했다. 그는 이를 위한 희생양으로 무슬림, 멕시칸, 그리고 '나와 다른' 타자들을 지목했다.
트럼프의 정치 전략은 이렇게 요약된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냉전 종식 이래 올바른 사고방식이라고 여겨졌던 규범들을 뒤집었다. 잘난 척 하고 게으른 주류세력에게 그의 방식은 놀랍게도 잘 먹혔다. 대망의 시대를 관통한 선거 운동 방식에 관한 모든 일반적 통념이 묵살되는 사이에 트럼프가 승리했다. 환상이 깨진 이들, 갑작스런 냉전 종식 뒤 엘리트들이 했던 약속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이들을 사로잡음으로써 승리한 것이다.
방향을 잃은 표류
트럼프가 당선되자 몇 시간 만에 진보주의자들은 트럼프가 취임하면 무슨 짓을 할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섞인 예상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 투표를 한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그에게 무얼 기대할 수 있느냐다. 양쪽 모두 트럼프를 역사적 인물이 될 만한 지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그러나 파시즘이 시작되는 전조라는 비판과 트럼프가 미국을 새 황금시대로 이끌 거란 희망은 모두 잘못 짚은 것이다. 이 상황의 중요성을 파악하려면 개인 트럼프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어낸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가 하려는 일은 거의 모두 기존 체제와 관행에 대한 거부다. 세계화를 거부하고 소모적인 군사적 개입을 거부하며 냉전 이후의 문화적 과업들도 거부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트럼프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지난 25년 동안 미국 역사를 관통해 온 세 가지 구상을 대신할 일관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 상황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또 실제로 트럼프가 큰소리를 치고는 있지만, 사실 '트럼피즘'은 엉망진창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기껏해야 과도기적 인물로 끝날 것이다. 따라서 그가 벌일지도 모를 일들은 우려스럽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곳이 어디냐는 거대한 의문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냉전 이후를 지배한 원리들은 이제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 무엇으로 이걸 대체해야 하는가?
그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 우리가 떠나려는 시대, 즉 '역사의 종말' 이후에 벌어진 역사에 대한 정직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걸 이해하려면 후회와 반성, 속죄가 수반돼야 한다. 이 비판적 검토는 냉전 종식과 함께 시작되어야 했지만, 미국 엘리트들은 승리의 병폐에 굴복해 이를 회피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그런 비판적 평가를 수행할 거란 기대는 접어라. 트럼프 후보가 그토록 강하게 비난했던 기득권 주류들도 그렇고, 트럼프 당선자와 안보라인 지명자들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당선이 정치권에 용기를 북돋우거나 위싱턴 정가 이론가들의 상상력을 고취시켜 무언가 변할 거라고 기대하면 곧 실망하게 될 것이다.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번영을 모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접근, 군사주의를 폐기한 신중하고 실용적인 외교정책, 그리고 풍부하고 포괄적인 자유의 개념 등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원리는 다른 곳에서 도래할 것이다.
성경의 잠언에 따르면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비전은 없다. 하기에 우리는 트럼프의 집권 자체보다 더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다.
대망의 시대는 끝났고, 불길한 공허만이 남아있다. 트럼프가 이 거대한 공허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은 무책임한 핑계도 절망의 원인도 될 수 없다. 물론 트럼프 자신은 이 나라의 과거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냉전이 끝나기 십여 년 전, 정치적 쇄신과 급진적 변화를 지향했으나 일찍 문을 닫은 언론 <데모크라시>에 쓴 글에서 크리스토퍼 래시는 현재의 위기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련의 원리들을 제시했다. 그것은 "자원 착취에 맞선 토지의 재생, 공장(factory)이 아니라 가정(family), 기술적 전망이 아니라 개인의 낭만적 전망, 그리고 민주적 중앙집권을 넘어선 지방분권"이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처방은 우리의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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