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의 부름에 응했다. 대통령 자격이 박탈된 지 열하루 만이다. 영예롭던 청와대 시절을 뒤로 한 채 '자연인 박근혜'가 되어 검찰 포토라인에 선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은 십수 시간의 고강도 조사다.
오늘도 어김없는 '올림머리'
21일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온 지 9일 만에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9시 15분 군청색 코트를 입고 이날도 어김없이 올림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그는 태극기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님 힘내세요"라고 외치는 지지자들에게 살짝 미소를 보인 뒤 검은색 에쿠스 리무진 승용차를 타고 서초동 검찰로 향했다. 그는 짙게 선팅돼있는 차창에 손바닥을 대며 지지자들의 응원에 화답하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박 전 대통령이 검찰로 향하는 길에 있는 차량은 모두 통제됐다. 그가 탄 차량 앞뒤로는 경호 차량과 오토바이가 배치됐다. 강남역을 지나 9시 21분쯤 '문재인 후보님 떳떳하십니까' 라는 문구가 적힌 지지 차량이 나타나는 등 돌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이 탄 에쿠스 차량은 출발 8분 만인 오전 9시 23분 대검찰청 안으로 진입했다.
9시 25분께 차에서 내린 그는 다섯 발자국 정도를 걸어 포토라인에 섰다. 청사 앞을 가득 메운 취재진 앞에 서서 그가 던진 말은 딱 두 마디였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원론적인 말을 마친 뒤 빠르게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취재진은 준비한 질문을 다 채 던지지 못했다.
"송구스럽다"의 목적어가 없다
"송구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을' 송구하게 생각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평소 화법이 워낙 두루뭉술하긴 하지만,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 손범규 변호사가 전날인 20일 "준비한 메시지가 있다"고 굳이 밝힌 점을 고려하면 다소 실망스러울 정도로 짧고 완성되지 못한 느낌의 발언이다.
그러나 이같은 흐리멍덩한 발언이 의도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목적어를 흐린 채 "송구하다"고 밝힌 것은 자신의 구체적 혐의가 아닌, 상황 자체에 대한 송구함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검찰 조사에서도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이날 의상도 자신의 '결기'를 반영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이 이날 착용한 옷은 짙은 군청색 코트다. 9일 전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으로 왔을 때에도 착용했던 옷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패션 정치'의 대명사였던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여야 대표와의 면담 등 협상 국면에서 주로 군청색 옷을 입었다. 일종의 '전투복'인 셈이다. '전투복'을 입고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검찰 조사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역시나 '모르쇠' 전법?
검찰 1기 특별수사본부와 특별검사가 밝혀낸 '피의자 박근혜'의 혐의는 총 13개. 이 가운데 핵심 쟁점은 △미르-K스포츠 재단 강제 모금, △삼성 특혜와 관련 433억 원 뇌물 수수,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청와대 문서 유출 등이다. 혐의 목록으로 보면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강요, 강요미수, 공무상 비밀누설, 뇌물수수 및 제3자 뇌물수수 등이다. 뇌물수수죄가 인정될 경우 최대 10년형을 받을 수 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비선 실세' 최순실 씨와 공범 관계로, 함께 직권 남용, 강요죄를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이에 검찰은 이날 박 전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집중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미 대기업 관계자들을 줄소환해 관련 증언을 청취했다.
검찰의 추궁에 박 전 대통령은 '모르쇠'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차례 자신의 혐의를 부정해왔다. 신년 기자간담회에서는 "완전히 나를 엮은 것"이라고 했고, 설을 앞두고 정규재TV에서는 "다 허황된 이야기"라고 단언했다. 탄핵심판 최후변론 의견서에도 "정치인의 여정에서 단 한 번도 부정과 부패에 연루된 적이 없었다"면서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 일을 사전에 알았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엄하게 단죄했을 것"이라며 줄곧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태도를 취해왔다.
검찰 CCTV 속 박근혜...공용화장실, 배달 음식 이용한다
청사에 들어선 박 전 대통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 노승권 1차장과 약 10분간 티타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 검사는 조사 일정과 진행 방식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이 사건 진상규명이 잘 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취지로 말했고, 박 전 대통령은 성실히 잘 조사받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티타임이 끝난 9시 35분께, 박 전 대통령은 1001호 영상녹화조사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특수1부가 사용하는 조사실로, 일반 검사실을 개조했다. CCTV가 설치돼있고, 내부에선 거울처럼 보이지만 밖에선 안이 보이는 창도 있다. 탁자와 소파 2개가 있어 조사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내부에 별도로 마련된 휴게실에는 응급용 침대와 책상, 탁자, 소파 2개가 마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장실은 복도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할 예정이며, 식사는 배달음식으로 간단하게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을 직접 대면조사하는 검사는 특수1부 이원석 부장검사와 형사8부 한웅재 부장검사로, 이들은 번갈아 가며 박 전 대통령을 조사한다. 박 전 대통령은 유영하 변호사와 정장현 변호사가 배석했으며, 이들 또한 번갈아 가며 박 대통령 옆에서 조사 과정을 지켜볼 예정이다.
검찰이 현재 200개 이상의 강도 높은 질문과 증거를 준비한 만큼, 이날 조사 시간은 10시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이며, 밤샘 조사 가능성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국 "전면 부인하면 구속 영장 청구해야"
검찰 대면조사가 끝난 뒤 관건은 구속 영장 청구 여부다. 통상 검찰은 조사 후 사흘 이내에 구속 후 재판에 넘길지 여부를 결정한다. 이미 공범 관계에 있는 최순실, 안종범 등은 구속 수사 중이다. 법조계에서는 이르면 이번 주 금요일, 늦어도 다음 주 초에는 검찰이 신병처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의 범죄 혐의가 총 13개에 이르는 데다가, 공범들이 구속돼있는 상황 등을 고려해보면 구속 수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50여 일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검찰 입장에서는 부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와 관련, 조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날 자신의 SNS에 "박근혜라는 이름을 빼고 유사한 죄질의 사건을 상정하면, 피의자가 13가지 혐의 중 일부라도 솔직히 시인할 경우 구속영장 불청구될 수 있지만, 전면 부인할 경우 청구 쪽으로 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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