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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꺼삐딴 리'의 천국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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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꺼삐딴 리'의 천국이 될 것인가 [격월간 민들레] 엘리트와 글로벌 엘리트
사회가 정의하는 엘리트

날마다 각종 언론지상에서 '엘리트'라는 단어를 하루도 발견하지 못하는 날이 없다. 인터넷에서 이 단어로 뉴스를 검색해보면, 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도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주둔국 정부와 미군 사령부는 성매매 체계를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보장했다. 한국, 일본, 독일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각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하층 계급의 여성들을 동원해 미군 위안소를 운영했다. 위안소 곁엔 세탁소, 식당, 술집 등이 들어서며 지역경제를 떠받쳤다."(<한겨레> 1월 20일 자 '')

트럼프의 조악함이 보통 사람들에게 던지는 잠재적 메시지는 "나는 당신들 중 하나요!"라는 것이었고, 평범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 엘리트들의 오만한 태도에 끊임없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한겨레> 1월 19일 자 '')

다행히도 오늘 기사에서 본 엘리트의 용법은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지 않는다. 두 기사에 나온 같은 단어는 '다음'과 '네이버' 사전이 '어떤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그것에 부합한다. 하지만, 어느 날 신문에서 발견한 이런 용법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세 모녀 살해 가장 구속 강 씨는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아파트에서 아내와 맏딸, 둘째딸을 잇따라 목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중략) 경찰은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 출신의 엘리트였던 강씨가 3년 전 실직한 뒤 재취업을 하지 못했고, 마지막 보루였던 주식투자마저 실패하자 자포자기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세계일보> 2015년 1월 8일 자 '')

▲ 2015년 1월 발생한 '서초동 세 모녀 살인 사건' 보도 화면 갈무리. 명문대 출신인 강 씨는 실직과 주식투자 실패 이후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생활하다 가족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한국 사회는 엘리트에 대한 엄밀한 용례 없이 그 단어를 오용하고 남용하는데, 낱말 뜻에 엄밀해야 할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정몽준이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2014년, 그의 막내아들이 "미개한 국민" 운운했을 때 어느 문화평론가는 자신의 트위터에 "정몽준 아들이라서 그렇게 말했다기보다 한국 엘리트들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표준적 사고방식의 표출"이라고 썼다. 이 발언은 네티즌들로부터 "열여덟 살짜리도 재벌 집안의 아들이기만 하면 엘리트가 되느냐?"라는 집중포화를 받았다. 이런 착종은 "김연아 같은 10대 엘리트들에 대한 우파 이데올로그들의 찬사는 세계화의 압박을 10대들과 그의 부모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기를 피해가려는 한국 부르주아의 무의식을 감추고 있다"는 같은 문화평론가의 또 다른 발언으로 더욱 갈피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엘리트의 사전적 의미부터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 어떤 사회에서 우수한 능력이 있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다음 국어사전)
-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네이버 국어사전)

두 사전은 거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무척 흥미롭게도 두 사전의 풀이 안에는 엘리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전유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대립하고 있다. 즉, 다음이나 네이버나 애초부터 엘리트의 완전히 다른 용법을 품고 있다. ①우수한 혹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과, ②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이 둘은 엘리트라는 단어 풀이 가운데 함께 제시되었을 뿐, 따지고 보면 완전히 다른 용법으로 쓸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바둑과 피겨스케이팅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세돌과 김연아는 ①에 속하는 엘리트고, 대부분의 정치가나 시민운동가는 ②에 속하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①과 ②를 구분하지 않거나, ①에 속하는 사람들이 ②를 넘보거나 엘리트라는 용어 자체를 전유하고자 할 때 착종이 생긴다.

이런 사실은 한국 사회가 판·검사나 의사를 엘리트로 불러온 관행을 납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가기 힘든 의대나 법대에 입학해서 법조인과 의사가 되는 관문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다른 학생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엘리트로 불릴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우수하거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해서 곧바로 ②가 되진 않는다. 인권이나 민주주의적 가치와 역행하는 법조인은 제대로 된 사회지도자가 될 수 없고, 밥그릇 지키기에 눈이 멀어 국민 건강을 아랑곳하지 않는 의사를 사회지도자라고 일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①은 엘리트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못 된다고 할 수 있으며, ①에 공적 책임을 떠맡기로 한 ②가 덧보태어져야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절충은 자칫 직능 집단의 지도자를 엘리트라고 오해하게 만든다. 적어도 사전에서 말하는 '사회'란 직능 집단보다는 좀 더 큰 범주를 말하는 것일 테니, 원래부터 ②는 ①과는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는 엘리트가 아닐까?

자신의 장소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

먼저 마을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이라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싸움을 해야만 했다. 식량 확보와 이웃 부족과의 영역 다툼이 그것이다. 이 싸움터에서 다른 이보다 탁월한 지략과 용맹으로 마을 사람들을 이끈 사람이 바로 인류 최초의 엘리트였을 것이다. 이들 인류 최초의 엘리트는 마을 사람들의 생존과 생명을 지키는 데 헌신했고, 이 두 역할이 엘리트 고유의 사회적 책임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자신의 대지(大地)와 밀착되었던 '전통적인 엘리트'가 맡았던 역할은 먹고사는 일(경제)이나 적과 자연재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일(국방·안전)이었다. 전통적인 엘리트가 떠맡았던 두 가지 임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는지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고귀한 신분에 맞는 고귀한 임무'라는 뜻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래 형태를 보면, 전통적 엘리트의 자격에서 국방이 차지하는 임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 혹은 한 나라의 경제가 정치의 전부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저 단어마저 상층 계급의 자선과 기부라는 경제적 생색내기로 축소되고 말았지만, 고귀한 신분에 맞는 고귀한 임무란 본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전선으로 달려나가는 의무를 뜻했다. 플라톤의 초기 저작인 <라케스>나 <향연>에 묘사된 소크라테스는 출중한 전사였으며, 임진왜란 때 남명 조식과 그의 제자들은 자기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런 전통적인 엘리트의 후예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결집했던 한인 유학생들을 꼽을 수 있다.

엘리트와 대지 혹은 엘리트와 지역을 맺어주는 뛰어난 은유로 국방을 드는 것일 뿐, 내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군인이라야 엘리트라는 말이 아니다. 다시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예로 들자면, 의사와 변호사는 자신의 전문적인 직능을 통해 한인타운을 지키는 데 일조할 수 있고, 총을 들지 않으려는 평화주의자들이나 전투를 하기 어려운 여성은 수송이나 보급을 지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킬 수 있다. 즉 자기 장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엘리트다. 이런 해석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소위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정치인,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고소득 직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장소를 가꾸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엘리트다. 풀뿌리 지역 활동가들, 혹은 지역 경제를 잠식하는 가맹점 가입을 거부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구멍가게를 연 사람들, 그들이 엘리트다.

▲ <어른 없는 사회>(김경옥 옮김, 민들레 펴냄). ⓒ민들레
대지 또는 지역 등으로 바꿔 쓰기도 한 '장소'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간의 사회적·지리적 토대는 자신이 맺고 있는 밀착도에 따라 경관(landscape·공간space·장소place)로 구별된다. 먼저 경관은 우리가 여행지에서 "경치 참 좋다"라고 말할 때의 그것으로, 거기에 내가 속해 있지는 않다. 공간은 내가 그곳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의미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반면 '장소'는 우리가 그 속에 거하고 있으면서 나의 기억과 현 존재는 물론, 미래까지 투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장소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장소'에 살고 있다는 감각의 유무는 굉장히 중요하다. 스스로를 '사회수선주의자' 혹은 '리버럴한 보수'라고 칭하는 우치다 타츠루는 <어른 없는 사회>(김경옥 옮김, 민들레 펴냄) 머리말과 본문에 이렇게 썼다.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을 때는, 먼저 내 발아래 유리조각을 주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나고 무너진 대학 건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쭈그리고 앉아 첫 유리조각을 주우면서 제 스스로 정한 규칙입니다. 아마 어디 다른 곳에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발아래 유리조각을 주워드는 일부터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터입니다."(<어른 없는 사회>, 머리말)

"가족과 이웃을 지원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는 사회계약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부담을 떠안습니다. 도로에 떨어져 있는 빈 깡통을 줍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일이 아니니 그대로 방치한다 해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지만 그 깡통을 줍는 것이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로는 깨끗해집니다. (중략)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의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만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더 많은 일을 기꺼이 떠안습니다."(<어른 없는 사회>, 210쪽)

내 발아래 유리조각과 도로에 떨어져 있는 빈 깡통을 줍는 행위는, 내가 장소와 밀착되어 있다는 장소 감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글로벌 인재'라는 허구

문제는 '세계화'가 최고선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교육이 장소와 엘리트의 연관성을 계속 파괴해왔다는 것이다. 프랑스 현대사상 연구자이자 교육학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누구보다 이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으면서, 빈 새둥지와 같은 '글로벌 인재' 육성을 거듭 우려해왔다. 2014년 6월 한국 방문 때 모 주간지와 나눈 대담 한 대목을 보자.

"글로벌 인재는 내일부터 외국 지점에서 근무하라면 오늘 당장 짐을 쌀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이런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는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가 없으면 곤란해' '네가 여기 있어주면 좋겠어'라고 주변 사람들이 붙드는 사람은 이런 명령에 쉽게 응할 수 없다. 결국 기업이 원하는 모빌리티가 뛰어난 인재는 주변과의 연결점이 없는 사람, 뿌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지금 일본에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라면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외국에 집과 친구가 있는 사람' '일 년에 절반 정도는 외국에서 체류하는 사람' 등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일본 내 커뮤니티가 필요 없는 사람, 극단적으로는 당장 일본 열도가 붕괴하고 원전이 재폭발해도 도망가면 그뿐일 사람들이 지금 일본의 권력과 재력을 틀어쥐고 있는 셈이다."(<시사인> 제357호 ')

우치다 타츠루가 한탄했던 일본이나 한국의 교육 관계자들과 대학은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장소와 결합한 것이 엘리트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로벌 인재란 '뜨거운 아이스크림'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영어와 높은 이동성으로 무장한 글로벌 인재는 교육(학교)이 국민국가의 내부 장치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글로벌 인재는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느 고등학교는 학교 명칭에 무려 '민족'이 들어가 있는 데다가 교복마저 개량한복이지만, 이들이 우치다 타츠루의 우려를 씻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장소에 기반을 두지 않는 것이 장점인 글로벌 인재들의 기동성은 혁명이나 변혁을 일으키기보다, 자신이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나라로 이민 가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나아가 제1세계에서 성공한 글로벌 인재는 그 후광으로 쉽게 고국의 공직을 꿰차거나 제1세계의 대리인이 된다.

장소와 밀착된 전통적 엘리트의 증발은 우리 곁에서 유리조각을 손수 줍는 사람이 사라져간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장소를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는 엘리트가 점점 사라져갈 때, 곤경에 처하는 것은 민주주의다. 자기가 태어난 땅의 고민을 자신의 것으로 책임지고 해결하려는 전통적인 엘리트 의식이 희박해질 때, 세상은 젠트리파이어(gentrifier, 원래의 뜻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장소/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먹잇감이 될 것이고, 일제강점기 기회주의자로 대표되었던 '꺼삐딴 리' 천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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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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