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하기 12년 전 친구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상가 한비(韓非)의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육반(六反) 편의 취지는 강한 법치가 인정(仁政)보다 훨씬 더 좋은 국가운영 방침이라는 데 있다. 헌법재판소를 퇴임하던 이정미 재판관은 이를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라고 풀었다. 그의 모습이 어질게 보여 그녀의 말이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어진 정치'라는 말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는 어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짊은 다른 말로 용서다. 여기서 충돌이 생긴다. 법은 엄혹하고 냉정해야 한다. 용서하면 법치를 실현하기 어렵다. 한비자는 어짊을 강조하는 지식인의 혀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술수라고 비판한다. 한비가 존경해마지않는 법가 선배 상앙은 지식 추구를 낙으로 삼거나 연예인 또는 장사를 좋아하는 사회는 경제와 안보를 무너뜨려 결국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상군서> 농전(農戰)편)
그는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어려운 육체 노동을 피하고 쉽고 편안한 길만 찾는다고 말한다. 한비는 책에 상앙의 말을 많이 옮기고 있다. 그들은 유일한 사회가치의 표준을 법에서 찾았다. 법을 어기면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야 하고 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체의 지식이나 변론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건 지나치다.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다. 지식을 반대하는 이러한 반지성주의 법가사상은 오랫동안 어진 정치를 강조하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지금 문득 어진 재판관의 법치 발언에 다시 한비자의 생각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기이한 도착(倒錯)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흐름대로였다면 촛불이 어진 정치를 바라고 용서를 구해야 하고 태극기는 엄격한 법과 무거운 벌을 강조했어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추위를 견디며 온순한 소망을 외치는 사람들은 철저한 법치를 원했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거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합법적 단죄를 부정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뀔 것인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조짐인가.
진시황이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는 <한비자> 오두(五蠹) 편에서 한비는 역사를 상고, 중고, 근고, 당금 네 시기로 나눈다. 옛날엔 사람이 적어 도덕과 어진 정치가 미덕이었으나 오늘날처럼 인구가 많고 재물을 다투는 시대엔 강력한 법치가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먼 곳의 물을 끌어다 가까운데 불을 끌 수는 없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가는 길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토끼가 와서 부딪혀 죽어주기만 기다린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 고사는 여기에 실려 있다. 세상살이가 꼭 이익을 봐야 행복한 것은 아니며 지식인의 합리적 이의제기가 법치를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세상은 바뀌었으며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는 국가운영을 요구하고 있다. 한비자는 유도(有度) 편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국가가 항상 강하거나 항상 약할 수는 없다. 법을 받드는 사람이 강하면 나라가 강해지고, 법을 받드는 사람이 약하면 나라가 약해진다."
우리는 어질고 강한 사람을 기다린다.
법인가, 어진 정치인가
한비는 대한민국의 한(韓)자와 글자가 같은 한나라 사람이었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언제나 안보가 위태로운 나라였다. 사면이 열려 있는 도시 신정(新鄭, 오늘날 정저우)의 몰락한 지식인으로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운명을 강력한 법치로 이겨내고자 했다. '예(禮)'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 스승의 말을 '법(法)'자로 바꾸며 다른 길을 걸은 한비는 분명 순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임에 틀림없다. 스승은 유가사상을 집대성했고 제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했다. 둘 다 정치로 세상을 구하고자 했으나 한 사람은 예치를 실현할 어진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법치를 실현할 강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한비는 만나긴 했으나 그 사람 진시황은 조국을 멸망시키고 자신에게 사약을 내린 사람이었다.
'法'이란 한자는 신령스런 동물 해치가 소송 당사자 가운데 죄지은 사람을 들이받는 형상을 그린 복잡한 글자에서 외뿔양 해치(廌)가 빠지고 남은 글자이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시비를 공정하게 판결하여 죄 있는 자를 제거한다는 것이 법의 원래 의미이다. 법은 형벌이기도 하고 모범이기도 하다. 헌법도 법이고 형법도 법이고 행정법도 법이다. 법은 존재를 미리 규정하는 사전적 존재이기도 하고 이미 구성된 규칙위반 행위에 대해 사후적 제재를 가하는 결과적 측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법도 법이고 역사적 관습과 제도도 법이다. 법을 부정하는 것은 자연을 부정함이고 존재를 부정함이다. 한비에게 법은 정치와 사회를 규정하는 모든 것이었다.
문제는 사람이다. 법을 만들고 없애는 것도 사람이고 법을 지키는 것도 사람이고 법을 안 지키는 것도 사람이다. 한비는 일단 법이 만들어지면 군주를 포함해 나라 안의 모든 존재가 그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성문법이 완성되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군주입법이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한비는 군주와 법, 군주와 나라를 일체화시키며 오직 군주의 이익을 위해 고민했다. 그렇지만 현군은 천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며 대부분은 중간 수준의 군주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직 법에 입각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 오늘날 중간 정도도 안 되는 정치지도자가 군주입법이 아닌 민주입법의 시대에 국회를 우습게 여기고 법을 우습게 여기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물론 사악한 사욕 또한 인간의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이다. <한비자>는 인간의 성질을 비유와 해학이 넘치는 문학적 표현으로 드러내준다. 의사가 환자의 고름을 빨고 장의사가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이익 때문이지 사람이 좋고 나빠서가 아니라고 한다. 부모자식 사이를 포함하여 이해타산만이 인간사회의 진실이라는 한비의 말은 불편하지만 일리가 있다. 하물며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어떠할까. 난일(難一) 편에서 한비는 이런 말을 한다.
"신하는 사력을 다함으로써 군주의 시장에 참여한다. 군주는 작록을 늘어뜨림으로써 신하의 시장에 참여한다. 군주와 신하 사이는 부자지간과 같은 친함이 있지 않으며, 나오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숫자계산을 하는 관계다."
한비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와 신하 사이를 매매관계로 본 사람이다. 한비에 따르면 스스로를 '잘못하지 않는' 군주라고 생각하는 정치인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관계는 이익과 계산일 따름이며 충성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의리도 아니다.
이익은 사람을 나약한 겁쟁이로 만들기도 하고 용맹한 전사로 만들기도 한다. 국가의 모든 정책을 이익의 기초 위에서 수립해야 한다는 한비의 생각은 너무 현실의 업적에만 집착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익이 사회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간사회의 어떤 관계는 계산하지 않는 관계이며, 때로는 이익을 버리면서 행복을 느끼곤 한다. 추위를 견디며 그토록 오랫동안 법대로 처벌하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다 자신의 이익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재판관이 법을 지키면 오래도록 이롭다고 말했을 때 이로움은 물질적 이익을 넘어선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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