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명이 4월 11일 '블랙리스트' 폐지를 촉구하며 새벽 울산 동구 남목고개 고가도로 기둥에 올랐다. 이들은 앞서 9일 하청업체가 폐업되면서 해고됐다. 통상 하청업체가 폐업할 경우, 소속 하청 직원들은 다른 하청업체로 이직하는 식으로 고용이 승계된다. 하지만 이들 2명은 하청지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고용이 승계되지 않았다. 일명 솎아내기를 당한 셈이다. <프레시안>에서는 현재 문제가 되는 조선계에 만연한 '블랙리스트'에 대해 살펴본다. 이 기획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공동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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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기자님이지예? ○○○가 연락처를 알랴 줘 이리 전화하는데. 지금 퍼뜩 창원으로 내려 오이소. 여기 난리가 났다 아니라예."
수화기 너머로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밤 11시, 고민하다 받은 전화였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줄잡아 네 시간. 창원에 떨어지면 아침이 될 판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내려오라니? 게다가 나와는 안면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이 시간에 오는 전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기자를 부담스럽게 하는 취재원들이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내 연락처를 소개해 줬다는 사람은 내가 속한 신문사의 중요한 필자였다. 상황도 다급해 보였다. 전화를 끊고는 조용히 짐을 쌌다.
그렇게 밤을 꼬박 달려 도착한 창원역. 거기에는 친절하게도 나를 ‘모시고’ 갈 봉고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달리다 바퀴라도 빠질 모양새였지만 친히 여기까지 나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경남 진해 바닷가에 위치한 오리엔탈정공 조선소. 선박 블록 제작 회사로 현대・대우・삼성 빅3 조선소의 사외 하청 업체다. 그날은 30여 명의 노동자들이 사장실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었다. 대부분이 40~50대 여성들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한창이던 2011년 8월께였다.
"여기 사람들 다 사연이 구구절절하다니깐. 허 기자가 이 사람들 인터뷰 좀 해줘요. 그거 해달라고 여까지 부른 거 아이요. 기자가 이런 사람들 취재해서 살아 있는 기사 써야 되는 거 아닌교?"
다소 시니컬한 태도가 장장 4시간에 걸려 도착한 기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한 밤중에 불러놓고서 '꼰대'처럼 기자는 살아있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말이나 하고...'
그게 한밤중에 내게 전화를 한 김영수 씨(가명)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2003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에 가입했다 쫓겨난 노동자였다. 내가 만날 당시에는 STX조선해양, 오리엔탈정공 등 군소 조선소 하청을 옮겨 다니는 ‘보따리 하청 노동자’였을 때였다.
노조 가입한 게 '주홍글씨'
이후 그와는 오랜 기간 취재원과 기자로 관계를 이어갔다. 세진중공업 폭발 사고, 조선소 위장취업 등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가끔 뭐하는 사람인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해서 일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조합원도 아닌 듯 보였다. 민주노총 이야기를 하면 질색을 했다. 게다가 운동권 정파에 소속된 활동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조선소 하청노동자 문제에 발 벗고 나섰다. 만나면서 점차 그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한참 뒤에야 우연한 기회에 그의 과거를 알게 됐다. 그는 2003년 당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가 만들어질 당시, 노조활동을 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공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오갈 데가 없어진 뒤, 창원, 거제 등 군소 조선소를 떠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하게 됐다.
그가 활동하던 2003년, 현대중공업에서는 하청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원청의 노골적인 방해로 사실상 조직이 와해됐다.
현대중공업 사측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이중적 고용 관리 전략을 짰다. 사내 하청공, 즉 하청 노동자 비중을 확대하면서 고용 조절, 비용 절감 등을 꾀했다. 한국조선협회 자료를 보면 1990년 1998명에 불과하던 사내 하청 노동자는 2004년 1만2276명으로 6배나 증가했다.
그 결과, 하청 노동자가 담당하는 업무는 대체로 원청 노동자가 기피하는 업무가 됐다. 게다가 원청 노동자와 임금, 복지에서도 차별이 있었다. 연말 경영 성과급도 차등 지급됐다. 산업재해로 죽는 하청 노동자의 수도 늘어 갔다.
1987년 원청 노조의 탄생과 이후 투쟁 과정을 지켜본 사측 입장에서는 하청에서도 노조가 생기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현대중공업은 지속해서 노조 파괴 전략을 펼쳤다. 하지만 하청 노동자들도 끈질기게 노조 조직화를 도모했다.
그 와중에 사내 하청 노동자 박일수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청 노동자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두 마디가 그의 유언이었다. 박일수 씨 분신 뒤 세 명의 하청 노동자가 용기를 냈다. 인간적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공개 조합원으로 있다가 공개 조합원을 선언한 것. 그러면서 함께 일하던 하청 노동자들에게 노조 가입을 독려했다. 이들 중 한 명이 김영수 씨였다.
"우리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인간답게 살아 보자!”
그러던 중 소지공 임금 삭감안이 일방적으로 발표됐다. 이것이 기폭제로 작용했다. 10여 개 하청 업체 120여 명 하청 노동자가 공개적으로 노조에 집단 가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무모한 용기였다. 이들은 박일수 씨 장례 기간에 모두 해고됐다. 조합원이 있는 업체를 폐업한 뒤, 그 업체에서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는 다른 업체에 취업시켜 주는 식으로 해고가 진행됐다.
이때 해고된 하청 노동자들은 아직도 울산 언저리에 발도 붙이지 못한다. 블랙리스트 때문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통영, 거제, 목포 등 규모가 작은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다. 노무관리나 정보 소통이 안 되는 작은 공장을 전전하면서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김영수 씨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철저한 '응징'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울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하청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현재 하청 노동자들에게도 각인돼 있다.
'노조에 가입하면 울산에서 밥 못 벌어먹는다.'
2014년 현대중공업원청과 하청 노조가 하청 노동자 14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이들 중 36.5퍼센트는 '노조에 가입할 의향이 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두고 '해고와 블랙리스트 때문'이라고 답한 게 61.7퍼센트를 차지했다. 노조에 관심이 있어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현실 조건이 큰 장벽인 것이다.
결국, 조선소를 떠난 김 씨
김 씨가 하청 노조 조직을 주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뒤, 그를 울산의 허름한 술집에서 만났다. 물어볼 게 많았다. 하지만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렵게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과거는 묻지 말라고 했다. 지금은 일절 노조 활동 안 하고 묵묵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고 있었다. 이전과는 좀 달라 보였다. 별 영양가도 없는 수다를 떨면서 술이 돌았다.
그렇게 몇 잔이 돌았을까. 만약 다시 돌아가면 자기는 노조 활동을 안 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녁에 여수, 진해 등에서 연락 오는 친구들 때문에 무척 힘들다고 했다. 자기 때문에 그들 인생을 망친 거 같단다. 피할 수도 없기에 고스란히 주저리주저리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풀이를 들어 줘야 하는 것도 곤욕이다. 자기가 그렇게 잘못된 삶을 살았느냐고 물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아직 형벌을 받고 있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애초 그날은 저녁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꼬부라진 혀로 나를 잡는 박 씨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왜 술을 더 먹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그와 만난 뒤, 한참 후에야 그의 소식을 들었다. 관리자와 싸우고 그나마 다니던 조선소도 떠났다고 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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