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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과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고... [사회 책임 혁명] 가부장제 수혜자로 산 남성...세상은 달라졌다
포털 검색창에 '탁'을 치면, 제일 먼저 '탁현민'이 나온다. '탁현민'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일개' 청와대 선임행정관이 장관급 인사를 넘어서는 논란의 중심이 된 데는 탁 행정관 개인의 높은 대중적 인지도와 함께 문재인 정권에서 차지하는 나름의 위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성폭력도 아니고 과거에 책에다 쓴 내용을 가지고, 그것도 사과까지 한 마당에 계속해서 일개 행정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상황은 문재인 지지자들이 말하듯 현 정권 흔들기 음모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탁 행정관은 '억울하겠지만',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올바른 처신이라고 본다. 나 같은 사람까지 나서서 일개 행정관의 진퇴에 말을 보태는 까닭은 이 일이 생각보다 엄중한 맥락에 위치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선 글을 쓰게 된 계기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저런 연유로 나는 15주 일정의 독서모임 멘토 역할을 맡았다. 얼마 전 끝난 이 모임 참여자의 대부분이 여성이었으며 연령대가 20~50대로 다양했다. 마지막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이 책을 주제로 한 일주일 전쯤의 마지막 독서모임은, 조금 과장하면 파행됐다. 2시간가량의 절반 정도를 '탁현민'이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응당 논의하게 될 '자유' 등의 주제가 뒷전으로 밀렸다.

이상 조짐은 독서모임이 열리기 전부터 감지되었다. 단체 카카오톡 방(단톡방)에서 "이 책을 읽기가 너무 힘들다", "책을 던져 버리고 싶다"는 하소연이 목격됐다. 관점에 따라 '여혐'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으니, (전투적?) 페미니즘에 대해 새롭게 입문하는 세대에게는 소설 주인공 조르바의 여성관이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여성 관련 서술이 참기 힘들 수 있겠다 싶었다.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은 독서모임 참가자 중 한 사람이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여성혐오 표현이라고 생각된 곳을 표시한 것이다. 탁현민 행정관을 옹호하는 어느 언론인의 칼럼 또한 모임에서 소개받을 수 있었다. 하여 이런저런 사정으로 관련된 글을 쓰기로 약속하였다.

다음 글은 소개받은 칼럼에서 적시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인용문이다.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내 천당은 물렁물렁한 침대가 있고, 옆에는 암컷이 하나 누워있는 향긋한 방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놈의 연장은 언제 어디서든 암컷만 만나면 내 대가리를 돌게 만들고 지갑을 열게 만듭니다."

인용문에 이어 논자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현대문학의 성자(聖者)로 추앙받는다고 평가한 뒤,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발표한 게 1942년이고 그가 그리스 내무부 장관에 취임한 때가 1945년이니까 70년이 더 지난 일이긴 한데, 카잔차키스가 2017년 대한민국 청문회장에 섰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모르긴 해도 '성자' 카잔차키스조차 장관 자리에 오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6월 26일 자 <머니투데이> '안경환과 탁현민의 성의식' 중)

더 하고 싶은 말은 탁현민 행정관과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관해서다.

"성과 섹스에 대한 공격을 받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제한 뒤, "어떤 사람의 행위가 아닌 그가 쓴 저작물의 내용에 대한 공격이라면 더 그렇다. 현대판 분서갱유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2017년 6월 대한민국은 야만의 시대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논자의 말이 아주 틀렸다고 할 수는 없고, 관점에 따라 타당하다. (외국 남자는 모르겠고, 한국) 남자들의 술자리나 일상적 대화에서 등장하는 여성 관련 담화에 비해 (보도된) 탁 행정관의 글이 더 문제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가부장제와 위계적인 유교문화에서 성장한 한국 남성에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일은 사실 전혀 문제적이지 않았으며, 다수의 여성 또한 가부장제를 의식에 내면화하거나 성적 대상화에 순응하였다. "성과 섹스에 대한 공격을 받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은 한국 남자라는 단서가 빠졌지만, 대체로 맞는 말이다. 예컨대 탁 행정관의 여성관이 문제가 되어 이번에 사퇴하게 된다면, 공직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남자들이 앞으로 비슷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물론 공직을 희망하는 많은 한국 남자들이 향후 새로운 검증 앞에서 좌절할 것이다.

'야만의 시대'라는 표현이 그래서 얼핏 맞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표현보다는 '문명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문제적이어야 하는 것이 문제시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가, 갑자기 문제적이어야 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논리는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야만의 탈피'라고 봐야 한다. 당연히 탁 행정관의 행태를 비롯하여 논란이 된 많은 사항들이 문제적이냐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든 말든, 조르바 같은 인생관을 갖고 살든 말든, 바람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것은 개인의 가치이며 자유이다. 공공연하게 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러한 가치체계를 강압하거나 관여한다면 문제시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특정 개인의 가치관을 공격하는 행위는 파시즘에 수렴한다.

그러나 생각의 자유에는, 주지하듯 공직에 종사할 때 등 몇 가지 예외 사항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에는 부동산 투기 등 사회적으로 합의된(또는 되어가는) 공직에 관한 결격사유 목록이 있으며, 이에 위배되었을 때 공직 진출을 막거나 공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게 된다. 탁 행정관의 과거 저술 속 여성 인식이 스스로 사과까지 한 마당에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과도할뿐더러 결격사유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탁 행정관 본인이나 청와대의 생각인 듯하다. 더불어 소개한 칼럼의 논자나 적잖은 (남성?) 문재인 지지자들의 입장이기도 할 것이다.

대원칙은 이렇다. 인사를 포함한 정치는 당대의 가치체계에 조응해야 한다. 또한 국민의 눈높이에도 맞아야 한다. 한데 문재인 정부를 포함하여 기성 정치권, 혹은 전반적 기득권층은 새로운 변화에 둔감한 듯싶다. 재벌개혁, 양극화해소, 양질의 일자리 창출, 남북긴장 완화 등 전래의 정치적 의제 외에 성평등이란 의제가 심각하게 사회와 정치에 제기되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여혐'을 근거로 탁 행정관을 비판하는데 열변을 토한 여성들은 동시에 열렬한 문재인 지지자였다.

문재인 정부를 흔들려는 불순한 의도가 개입했다기보다는 공직에 관한 새로운 기준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문제의식은 변화하며, 공직의 결격사유 또한 달라진다. 과거에는 '축첩'한 공무원이 버젓이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장관급 공직에 진출하려면 필수적이란 비아냥거림이 떠돌 정도로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또한 흔했다. 이제는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여성 전체의 의견은 아닐 수 있겠으나) 성평등과 건전한 성의식을 공직자의 기준으로 제안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등 여러 계기로 점차 예민해진 성평등 의식이 공직자의 기준을 두고 새롭게 정치적 장을 형성하고 있는 게 요즘의 모습이다.

이 새로운 토론에서 어느 진영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지는 분명하다. 재벌을 개혁하고 비정규직을 줄이고, 한계선 상의 국민을 복지로 포용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면 성평등 또한 시대정신이다. 탁 행정관을 향한 사퇴 요구는 이제 성평등과 관련한 시대정신이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앞으로 더 거세질 것임을 예고한다. 진보는 하나의 전선에서만 실현되지 않는다. 재벌개혁, 고용, 복지 등 다양한 전선이 있으며 개개 전선에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진보 가치를 실현하도록 전방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전선에서 이른바 '적폐'와 용감하게 맞서 싸우지만 다른 전선에서는 오히려 '적폐'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유교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제에서 수혜자로 산 나를 포함한 남성은 스스로 잠재적 '적폐'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탁 행정관의 진퇴는 이제 일개 행정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탁 행정관이 물러난 뒤에는, 과거 발랄한 성의식으로 '깝죽거린' 공공연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직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부동산 투기한 사람이 공직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다. 더불어 다양한 검증을 통과하여 앞으로 공직에 종사할 사람들은 개돼지 발언을 삼가듯, 성평등에 위배되거나 성적 대상화하는 발언과 행태를 삼가야 할 것이다. 이 정도면 야만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문명의 시대가 아닌가.(단 공직에 종사하거나 공인의 삶을 살게 아니라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아도 비난에는 직면하겠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점은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사족으로, 2017년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공직에 오르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단정할 일은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문학이다. 형상화란 기능을 통하여 시대를 조명하고 인간을 탐구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문학적 서술은 작가 개인의 가치관과 꼭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개인적 배설의 잡문 작가와 지적한 대로 현대문학의 성자를 비교하는 일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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