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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한국군이 우리를 쏴 죽였단다. 꼭 기억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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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아가야, 한국군이 우리를 쏴 죽였단다. 꼭 기억하거라' [작은책] 베트남전 '기념'하는 한국, 증오비로 '기억'하는 베트남

베트남 대사관 앞에 얼마 전부터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대한 사죄의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릴레이를 한다. 출근길의 대사관 직원과 민원 때문에 대사관을 찾은 베트남 사람들이 유심히 쳐다본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이지만 전단을 건네면 거부감 없이 받아 준다.

"베트남 정부와 베트남 인민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보니 이렇다.

"한국 국민으로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그 외 모든 전쟁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지난 9월 13일, 1300회 수요집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베트남에 사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 다음 날부터 바로 시작된 것이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의 사죄 릴레이다. 10월 말을 끝으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 대책 협의회)의 릴레이가 끝나면 바통을 이어 한베평화재단이 베트남전 종전일인 2018년 4월 30일까지 사죄를 이어 간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베트남 전쟁을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참전'과 '경제 발전'의 공식 너머를 가르치지 않는 거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현재 우리의 인식도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말해 준다. 때문에 민간인 학살과 같은 전쟁 이면에 대한 역사가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늘 피해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로선 가해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무척 생경하고 낯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쟁으로 말미암은 온갖 반인륜적 결과들을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셈이다. 어떤 총알이 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비껴가던가. 모든 전쟁에는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앞선다. 1964년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벌이고, 한국도 그 시기부터 파병을 시작해 총 32만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보냈다. 한국 청년들이 무려 8년 5개월의 기간 동안 총을 들고 베트남 땅을 밟았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 있었던 가장 긴 전쟁 중 하나이다. 언제까지나 그 역사적 과오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베평화재단

증오비의 마을, 빈호아

한국 사회는 참전 기념탑과 전쟁기념관으로 베트남 전쟁을 '기념'하고 있지만, 베트남은 위령비와 증오비로 '기억'한다. 한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 지역 마을 곳곳에 서 있는 위령비와 증오비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빈호아 마을은 학살을 자장가로 불러 기억하는 마을이다.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이곳의 아이들은 젖먹이 때부터 이 노래를 들으며 자란다.

빈호아 학살은 1966년 12월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이 일대 주민 430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이다. 마을 초입에는 위령비와 증오비가 나란히 서 있다. 위령비로 학살 희생자의 사망 당시 나이와 이름을 적어 추모하고, 증오비로 그날의 학살을 증언한다. 증오비 내용을 보면 학살된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 노인, 어린아이다.

위령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베트남 곳곳에 서 있는 위령비는 학살 당시 희생자의 나이와 이름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들은 이름 중간에 Thi라는 미들네임(중간이름)을 갖고 있으므로, 위령비만 유심히 보아도 학살의 희생자가 어떤 이들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보자인'이라는 이름도 반복되는데, 이는 '무명'이란 뜻으로, 한 살 전후의 이름도 갖지 못한 아기들이다. 또 다른 위령비에는 희생자 명단이 가족 단위로 정리되어 있다. 몰살된 가족이 부지기수다. 이 모든 것이 한국 군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벌인 일이다.

베트남은 과거를 닫지 않았다

베트남이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고 한다지만, 이처럼 베트남 곳곳은 치열하게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이래 한국 정부도 위와 같은 원칙에 따라 베트남과의 관계를 이어 오고 있는데,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 문제가 종종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다.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논란이 좋은 예이다. 당시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희생으로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발언에 베트남 언론과 지식인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일로 베트남 외교부도 "베트남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양국의 우호 협력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발언과 행동을 삼가 줄 것을 요청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물론 지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언급하며 유감 표명과 피해 지역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인정도 사과도 없이 애매한 외교적 협력만을 추구하는 양국 관계는 여전히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베트남 사회의 과거사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지지로도 다가온다. 지난 4월 말 한베평화재단은 평화의 섬 제주에 사죄와 평화의 뜻을 담아 '베트남 피에타'를 세웠다. 베트남 피에타는 위령비에 등장하는 수많은 어머니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무명 아기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제작한 것이다. 동상 설립 소식에 베트남 언론과 국민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역사적 과오를 사죄하는 한국의 양심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 동상을 소재로 만들어진 <마지막 자장가>라는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베트남 국영방송 VTV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과연 베트남이 과거를 닫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베평화재단

베트남과 함께 여는 평화, 만만만 캠페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실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겨레21> 보도 이후다. 이때부터 2003년까지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과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활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제기된 베트남전 진실 규명 활동은 이 문제를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의제화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진상 규명 활동 또한 위축되었다. 물론 캠페인 결과 한베평화공원 준공과 베트남 관련 평화 교류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등은 큰 의미라 할 것이다.

20여 년 전 '미안해요, 베트남' 이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와 고민 속에 한베평화재단이 출범했다. 정식 인가를 받고 활동을 본격화한 지 6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20여 년 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이 문제를 어떻게 알리고 풀어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크다. 그 고민 속에서 만만만 캠페인을 시작했다. '만만만'의 첫 번째 '만'은 베트남 전쟁이 30년 동안 일어난 1만 일의 전쟁이라는 것, 두 번째 '만'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 수, 세 번째 '만'은 평화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평화의 연대를 뜻한다. 캠페인 모금을 통해 희생자에 대한 추도 사업을 지원하고 베트남 피해 마을을 도울 예정이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우리는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더 많은 진실과 정의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자신을 가해자 위치에 세울 수 있을 때, 그리고 기꺼이 그 역사적 책임을 받아들일 때만이 평화가 가능하다. 평화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내어 우리는 오늘도 사죄의 릴레이를 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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