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을 그렇게 많이 만나지는 않지만 마주치는 사람마다 남자든 여자든 물어본다.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 봤느냐?"고. 어떤 이는 "역시 JTBC다"라는 다소 맥락에 맞지 않는 반응을 보인다.
SNS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서 JTBC의 보도가 아니라, 서 검사의 고백이 한국 사회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오리라는 점을 예감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기대한다. 내 또래의 한 남성은 서 검사가 졸업한 학교에 재학 중인 딸과 인터뷰를 같이 봤는데, 딸이 "(여)검사도 그런 일을 당하느냐?"고 묻더란다. 그 학생이 생각하기에 '소위 힘 있고 잘 나가는 직종의 여성마저 그런 일을 당한다면 도대체 그런 일을 겪지 않을 여성이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담긴 질문이다.
용기 있는 서 검사의 '미투(#metoo)' 고백을 보며 나는 영화 <1987>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관람한 뒤에 쏟아져 나온 '미투'들이다. 나 역시 청받은 글을 쓰느라 쓰잘머리 없는 '미투' 하나를 보탰다. 요약하면 나 역시 '거기'에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날' 동참한 경험을 한담이나 무용담으로 변질시켜서는 안 되며, 더구나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훈장으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일도 안된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날'이 오지 않았기에, '거기' 있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말의 책임과 모종의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한다고도 했다.(☞ 참고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3호 )
기고문을 보내고 난 뒤 접한 서 검사 인터뷰를 접하면서 나는 1987년 '그날'과 서 검사의 '미투' 사이 약간의 겹침을 느꼈다. 안상수, 최환 등 전직 검사들까지 자신들이 민주화에 기여하였음을 보여주는 낯 뜨거운 '미투'를 포함해 당시 아스팔트에 섰던 이들은 물론 서지 않았던 이들이 앞다투어 '미투'하는 집단적 고백 등 보기에 따라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너무 예민하지 않다면 봐 넘기기 힘들 만큼 많이 불편한 광경은 아닐 수 있다. 부분적 승리 또는 미완의 혁명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걸 전리품으로 챙기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1987' 자체는 지난 역사이기 때문이다.
1987년 '그날'은 당시 전 국민이 각자의 역할과 고통을 감당하며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끌어내린 촛불혁명의 데자뷔로 영화 <1987>은 1987년 민주화 운동 30주년을 기념한 벅차고 감동적인 극영화이자 다큐멘터리이고, 우리 시대 국가와 사회의 역사이자 개인의 역사이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에 한국인으로서 너나없이 동참하고픈 마음에 약간은 과장된 '미투'가 섞여도 무방하지 않은가.
물론 영화 <1987>에는 다양한 논란이 따라붙는다. 예컨대 1987년 대학생이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학생만은 아니지 않으냐, 영화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이 사려 깊지 못하지 않았느냐 등의 문제 제기가 있다. 같은 잡지에 실린 다른 글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참고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3호 )
글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화염병 던지던 여성'이 떠오르진 않았다. 나는 대학생 때 딱 한 번 화염병을 던졌는데, 그 한 번의 투척 후 그만두었다. 내가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던지기에 약한 내가 던진 화염병은 멀리 가지 않았고 목표치의 중간쯤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시위를 진입하는 경찰을 저지하기 위해 던지기를 잘 하거나, 던지기를 못 하면 훨씬 앞에 나가서 던져야 한다.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나로서는 짧은 비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훨씬 앞쪽에 나가서 던져야 했지만, 그러기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그 핑계를 대고 나는 이후의 집회에서 대체로 본대에 머물렀다. 직격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과 달리, 나는 위험에서 원천적으로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경험과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화염병 던지는 여성'은 나에게 쉽게 연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제목은 약간 괴이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누군가 보내준 1980년대 사진을 보고 내 생각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성 여러 명이 화염병을 던지러 일제히 달려나가는 장면을 찍은 보도 사진이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비거리의 열세를 감안할 때 그 여학생들은 훨씬 앞쪽에서 화염병을 던졌을 것이다. 나처럼 안온하게 본대에 머물며 날아가는 최루탄과 화염병을 멀찍이 바라보는 호사를 누리는 대신 그들은 훨씬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저 앞쪽까지 달려나가 화염병을 던졌다.
내 기억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때 여성이 화염병을 던졌느냐 아니었느냐는 관점에 따라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있다.(화염병 투척은 폭력 행위지만, 당시 독재정권 경찰의 압도적 물리력에 맞선 일종의 자위권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대학가에서는 여대에서 더 힘들게 '자위권'이 행사됐다는 정도의 가벼운 회상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여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와 성(性)이 다른 동년배인 그들을 포함해 젊은 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부분적이지만) 집단적 성취를 이뤄내는 경험을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서 검사의 고백이 상징하듯, 그들은 이후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만연한 성차별과 유형무형의 다양한 성폭력·성희롱에 노출되며 여성의 삶을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반면 나를 포함한 남자들은 물론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가해자 진영의 일원으로 남성의 삶을 살았다. 변명하자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남성'이란 성별이 디폴트(default)로 주어졌을 때 반대 성이 받는 차별을 인식하기란 노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가해자 진영의 일원이란 완곡한 표현조차 내 또래 거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더러 '억울하다'는 반응까지 보인다.
1987년의 폭발적 '미투'가 서 검사의 '고백'에 대해서는 (피해자로서 여성이든 가해자로서 남성이든) 비슷한 강도는커녕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라도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1987년 '그날'은 과거의 기억으로 아름답게 기억될 만큼 거리가 있지만, '서지현의 고백'은 남성에게든 여성에게든 (과거부터 이어지는) 현재의 사건이기 때문 아닐까? 현재의 사건은 고통받는 사람이 있고 고통을 주는 사람, 즉 가해자가 있다는 의미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고통의 현재성이 사건의 본질이다.
8년 만에 고통받은 사실을 고백한 서 검사와 달리, 피해자가 고통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이 고통을 가한 당사자임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또한 실존적 존엄을 무너뜨리는 이런 고통을 담담하게 고백하기란, 이미 알려진 여러 이유로 절대 쉽지 않다. 반대로 자신이 가해자임을 모르는 사람이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가해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알아서 그 행위를 고백하는 가해자를 찾기는 힘들다. 사죄와 처벌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식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1987년의 '미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서 검사 고백의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에 대해 주취 감경 논리를 거론하는 건 한국 남자 전체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약간의 기능은 갖겠지만, 기본적으로 난센스다.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은 조직이나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상갓집에서 후배 (여)검사를 더듬는 개인의 생활습관과 인격은 본인과 조직에 '성폭력' 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확신케 한다. 서 검사의 고백이 아니었으면, 묻힐 뻔했던 일이다. 심지어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일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러나 꼭 검찰 조직만 그럴까? 조직 특성상 조금 더 강하게 그러한 기제가 작동했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 전체로 봐도 하인리히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까? 이 사건이 검찰에서 불거져 검찰이 도마 위에 올랐지만, 이 또한 한국 사회 전체로는 빙산의 일각이다. 사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제도권에서 직장 생활하며 나이를 먹은 나 같은 중년의 한국 남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올바른지도 의문이다. 외람되게 서 검사의 고백에 박수를 보낸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인터뷰를 보며 눈물을 쏟았다는 어떤 여성처럼 그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1987년 '그날'을 앞다투어 '미투'하듯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방식과 내용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 '미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1987년은 지나갔지만, 2018년, 그리고 앞으로 많은 날을 우리는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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