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드디어 개헌안을 공식 발의했다. 문 대통령은 이로써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며 공을 국회로 넘겼다. 여야합의로 독자적인 개헌안을 만들어서 한 달 안에 발의하지 못할 경우 국회는 대통령의 개헌안을 표결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남은 불확실성은 국회개헌안의 발의가능여부와 대통령개헌안의 국회통과여부, 두 가지밖에 없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제1야당의 개헌 사보타지에 경종을 울리고 국회의 NATO(No Action Talking Only,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회의장이 당장 교섭단체회담을 주재하며 본격적 논의 틀을 갖췄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한부 고강도 개헌정국이 예고돼있다.
대통령 발의, 예고된 신의 한 수
여당과 제1야당이 각각 개헌저지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헌정치에서 절대강자는 없다. 무엇보다 여론의 향배가 중요한데 70% 가까운 지지율이 나오는 대통령과 여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무엇보다도 국민은 야당이 선호해온 이원집정부제를 전혀 선호하지 않는다. 그 연장선에 있는 국회추천총리제도 마찬가지다. 반면 대통령의 개헌안은 대체로 국민들의 공감과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대통령의 개헌안에 대해 대안 없이 반대만 일삼다가는 정치적 부메랑을 불러오기 딱 좋은 상황이다. 이는 향후의 개헌정국에서 촛불개헌에 유리하게 작동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이 개헌저지권을 행사해서 국회에서 부결시킬 경우 이는 제2의 노무현 대통령 국회탄핵소추사건과 같은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자유한국당은 6월 지방선거는 물론 그 후에도 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자유한국당이 국무위원과 권력기관장에 대한 국회동의를 매개로 극적인 막판타협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한마디로 국민과 약속을 지키기 위한 문 대통령의 예고된 개헌안 발의가 정치적으로도 신의 한 수가 된 형국이다.
개헌안 총평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대통령의 개헌안을 내용적으로 평가해보자. 넉넉한 점수로 합격이다. 다만 정부형태를 빼고 그렇다. 국민헌법자문특위를 불과 1달 남짓 가동시켜 만들어낸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은 예상했던 것보다 잘 다듬어졌다. 나는 새 헌법안을 읽는 내내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대로만 개헌이 돼도 촛불 들었던 보람이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현행헌법에서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을 제대로 짚어서 전향적인 대안을 제시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기본권과 경제헌법, 지방자치 관련조항들이 그랬다. 내용을 접하고 나면 누구든지 개헌욕구와 지지의사가 생길 수 있도록 최대한의 공감대가 가능한 필수개헌사항만 추려낸 선구안이 돋보였다. 행여 쓸데없는 논란거리만 제공하며 개헌열차를 정지시키지 않도록 내용적으로 최대한 절제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역력했다.
국회통과가능성을 의식해서 본격검토도 없이 폐기되었을 다양한 시민제안들을 대체로 접했던 내 입장에서는 정부안에 대해 아쉬움도 적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개헌안도 최소한의 글로벌 기준을 쫓아가기 바쁠 뿐 촛불시민혁명을 해낸 나라답게 민주주의와 인권보장 역사에서 개척자 정신으로 진보적 돌파구를 낸 부분은 보이질 않는다. 국민의 집단지성으로 만들어내는 좋은 헌법은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모두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는 인류의 최고 규범자산이다. 이번 개헌안에서 한국의 험난했던 민주헌정사에서 건져 올린 생생하고 보편적인 교훈을 담아내는 헌법의 토착화노력이 돋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예를 들어 국정원과 검찰, 군에 대한 과거청산원칙과 헌법통제원칙을 담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헌법기관장과 권력기관장의 정치편향 때문에 그토록 몸살을 앓았으니 이들의 정치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파격적인 임명절차를 선보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전 세계 개도국들에게 큰 영감과 희망을 주는 동방의 등불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개헌안이 제4차 산업혁명과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혁명적 사회변화의 한가운데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비해서 특별히 새로운 원칙을 마련하거나 기존원칙을 강화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요컨대, 이번 개헌안에서 민주주의이행기의 개도국들이 과연 한국이 다르다며 특별히 감동받거나 배울만한 부분이 있을지 의문이다. 더 분발했어야 했다.
권력구조와 관련해서는 합격점을 주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제왕적대통령제가 헌법설계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잘못된 운용실무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에 입각해서 몇 가지 작은 조정을 거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현행 대통령제의 기본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대통령 임기만 사실상 8년으로 늘려놓은 게 아니냐는 야권의 비난이 어깃장만으로 들리진 않는 이유다. 권력구조 개헌안으로 판단하건대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안의 4년 연임 대통령제에 대해 지나친 낙관주의를 갖고 있는 것 같고 야권은 그 대안으로 국회추천 총리제 등 지나친 절충주의를 제시하는 것 같다.
국민발안과 국민소환
먼저 정부안의 중요한 내용을 일별하며 간단간단하게 평가해보자. 국민발안제도와 국민소환제도를 도입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촛불시민정신을 받들어 주권자의 힘을 강화하고 직접민주주의의 비상구를 열어놓았다. 그러나 개헌에 대한 국민발의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실착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헌법조항을 국민이 직접 발의해서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는 개헌발의권은 주권자의 핵심권리다. 이게 있어야 지금처럼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할 때 국민의 힘으로 꼭 필요한 개헌을 추진할 수 있다.
국회입법에 대한 국민의 비상거부권으로 이해되는 국민투표제도를 신설하지 않은 점도 유감이다. 법률안발안권이 국회의 비상가동장치라면 국회입법 국민투표권은 국민의 비상제동장치로서 양자 모두 민심괴리국회를 보완하고 심판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와 법률안 국민발안권을 헌법에 도입하면서도 대강의 원칙과 기준마저 헌법에 정하지 않고 몽땅 국회의 입법에 일임한 것도 큰 실책이다. 국회의원은 속성상 국민발안과 국민소환을 아주 소극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몇 가지 원칙을 헌법에서 제시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이 부분도 놓쳤다.
정치기본권
정부안의 정치적 기본권 확대도 몹시 바람직하다. 18세 이상에 대한 선거권 보장을 환영하지만 성에 차진 않는다. 촛불혁명에서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을 똑똑히 경험한 터라 민주주의 최고선진국을 향한 열망과 의지를 담아 16세 이상으로 과감하게 낮췄더라면 대한민국이 그만큼 젊어졌을 것이다. 또한 정부안처럼 18세로 정하더라도 향후 선거연령을 더 낮추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부과했더라면 더 바람직했겠다.
공무원과 교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이 '직무수행'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도 높이 평가한다. 이로써 150만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에 필요한 탄탄한 발판을 얻었다. 선거운동을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점도 눈을 끈다. 마찬가지로 교사와 공무원의 선거운동의 자유가 인정받는 헌법적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사회경제권과 경제헌법
노동권을 강화한 점도 좋다. 공무원과 교사에게 군인 등 특별한 직종을 제외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겠다는 조항도 노동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국가의지의 표현으로 환영한다. 동일노동가치 동일임금과 관련해선 양가감정이 생긴다. 헌법에 명기돼 좋은 반면 노력의무로 그쳐 손해 본 느낌이랄까. 우리나라가 오래 전에 비준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따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은 객관적 법질서로는 벌써부터 우리법의 대원칙이자 기본인권이었다. 워낙 실효성이 없었기 때문에 급격한 충격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국가의 노력의무 대상으로 격하시킨 점은 몹시 아쉽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같은 삯을 받지 못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경제민주주의의 기업단위 핵심구성요소인 노동자의 경영참여권(노동이사제)과 이익균점권(이익공유제)이 이번 개헌국면에서조차 논의가 활성화되지 못한 사실도 못내 안타깝다.
이번 정부안에서 제일 기대되는 부분의 하나는 명시적으로 주거권을 보장하기로 한 점이다. 앞으로 저소득층가족, 특히 노인과 청소년, 신혼부부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주거권이 명실상부 보장되는 선진복지국가로 한걸음 내어딛는 불가역적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유휴토지의 효율적 관리와 사회적으로 발생한 부동산 불로소득의 환수를 위해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명시한 부분이나 경제민주화원칙으로 경제주체의 조화와 함께 상생을 추가하고 사회적 경제 진흥책임과 소상공인 육성책임을 국가와 지방정부에 부과한 부분은 모두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기업과 금융기관, 투자기관의 사회원칙이 이번 개헌안에서 빠진 것은 몹시 아쉽다. 이 정도는 담아내야 2008년 미국금융위기의 뼈아픈 교훈을 반영한 21세기 헌법이 아닌가 싶다.
지방자치분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계를 지방정부의 지방자치권 강화 쪽으로 조정한 건 바람직한 방향이다.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고 선언하고 지방자치분권국가회의를 신설했으며 지방입법과 지방조직, 지방재정과 지방과세에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자치권한을 강화했다. 이번 정부안에서 가장 획기적인 부분이자 가장 공을 들인 부분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지방자치분권이 실질적으로 뿌리내리는 제도적 계기로 작동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관련하여 개정안은 부칙으로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될 지자체장과 지방의원들의 임기를 3개월 단축해서 2022년 3월말에 종료되게 규정함으로써 이후로는 2022년 3월초부터는 매 4년마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를 수 있게 조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취임 1달 후인 6월에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 이 경우 매번 대통령과 여당에 유리한 선거결과가 예상된다. 6월 개헌국민투표로 대선과 지선을 동시에 치러 지방선출직의 임기를 예측가능하게 3개월 단축해야만 향후 대통령 취임효과 없이 공정하게 지방선거를 치를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이제 제왕적대통령제의 극복을 위해 대통령개헌안이 마련한 메뉴를 살펴보자. 개헌안에 따르면 대통령은 헌재소장 임명권을 내려놓고 감사원을 독립시키며 특별사면 실시를 제한받는다. 예산법률주의로 사후예산변경이 어려워지고 법률안제출에 국회의원 10명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지방자치분권 자체가 대통령의 법집행 및 예산집행 권한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겠다. 정부안은 국무총리 권한을 그대로 유지한다. 한 번도 실질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던 국무총리의 각료제청권과 해임건의권, 내각통할권이 효과적인 분권장치라는 투다. 나는 대통령이 자신의 보좌기관인 총리에게 각료제청권=내각구성권을 보장하는 게 과연 대통령제정부에서 타당하고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총리의 내각구성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지는 더 의문이다.
국무총리가 별다른 분권장치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볼 때 대통령이 헌재소장과 감사원을 놓아주는 정도로 과연 제왕적 대통령이 사라질지, 다시 말해서 그의 권력남용이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있을지도 지극히 의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권력남용을 안 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두터운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경우를 일반화하는 것은 헌법을 만드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면 헌법의 권력구조를 안이하게 접근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제왕적 대통령제를 잡기 위한 요체는 세 가지다. 첫째, 국정원과 검찰로 대표되는 권력기관이 더 이상 대통령의 수족노릇을 못 하도록 민주적 통제를 확립하고 권력기관장 임명에 국회의 가중과반수 동의를 요구한다. 둘째,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견제하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국회, 사법부, 감사원, 국가인권위 등의 통제권한을 강화한다. 특히 대통령의 인사권행사에 대한 국회의 동의대상을 장관(급) 전원으로 확대한다. 셋째, 중앙선관위, 헌법재판소, 감사원 등 헌법기관에 대한 3부 구성주의를 폐기하고 대통령의 지분도 과감하게 포기한다. 이것이야말로 제왕적대통령제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과 설명은 후속편에서 진행한다.
후속편에서 나는 제왕적 대통령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국무총리제 재활용론이나 재설계론 대신 국회권한강화방안을 내놓을 것이다. 국회와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국회의 민심 그대로 구성방안과 국회의원에 대한 시민통제방안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소한은 선거결과로 드러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대표하는 연동형비례대표제에 의한 국회구성이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선거제도 일대개혁이다. 최근에는 자유한국당까지 선거제도 개혁을 내걸고 있는 게 희망적이다. 국회의원에 대한 통제방안으로는 임기 중 국민소환, 국민발안 외에도 임기단축이나 선거주기 단축, 선수 제한이나 스태프 축소 등 다양한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개헌과정에서 이런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무안한 노릇이다.
제왕적 대법원장
대통령의 권력구조 개헌안 중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대법원장의 대법관제청권을 그대로 존치한 점이다. 대법원을 대법원장과 그의 제청(지명)을 받은 대법관으로 구성하면 결정적인 사안에서 어떤 대법관들이 대법원장을 동등자로 여길 수 있겠는가. 대법관제청위원회가 있다지만 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대법원장이 과반수의 구성지분을 갖고 있어서 대법원장의 영향력을 차단할 방법이 없다. 실은 이번 권력구조개헌안의 큰 목표 중 하나는 제왕적대통령제 못지않게 제왕적대법원장제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6차 사법파동이 진행 중이지 않았나. 이번 개헌안은 전국법관대표자회의와 같은 민주적 조직을 등장시키지 않고 대법관회의를 전면에 내세워서 대법원장을 견제하는 선에서 머물렀다. 나는 3부 구성주의의 이름으로 대법관회의에 중앙선관위, 헌법재판소, 감사원의 구성원 1/3 지명권을 주는 것 자체에 반대한다. 국민의 정치적 대표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헌절차
여야정치권과 국민이 개헌을 누가 주도하고 누가 발의할지를 놓고 그렇게 설전을 벌였으면서도 정부안에 개헌절차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긴 개헌절차 개헌안이 전혀 안 보이는 것도 문제다. 개헌절차는 국민이 직접 주권자로서 헌법을 만들어내는 절차이기 때문에 국민의 관점에서 특히 관심을 가져 마땅한 부분이다. 현행헌법상 개헌절차는 국회가 주도하고 국민이 종결한다. 국회(재적 과반수)와 대통령이 발의권을 가지며 일단 발의된 개헌안에 대해서는 국회 재적의원 2/3이상의 찬성을 거쳐 국민투표에서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한다. 이런 개헌절차가 과연 국민주권의 관점에서 국민의 헌법제·개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지 지극히 의문이다.
현행헌법의 개헌절차와 관련해서 3가지만 지적한다.
셋째, 국회의결과 국민투표는 개헌안 전체를 놓고 찬반을 표시한다. 국민투표가 의미가 있으려면 개별조문에 대해 따로따로 찬반표시가 가능해야 한다. 정부개헌안이 개헌절차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냥 지나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개헌안 발효 시점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개헌안은 개헌안이 통과할 경우 법률의 제·개정이 필요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공포 즉시 발효하도록 규정한다. 이로써 문 대통령은 자신이 5년 단임제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 단임 중 남은 4년 동안 개헌안에 따라 대통령직을 수행할 각오임을 밝혔다. 촛불시민혁명이 만들어낸 촛불대통령으로서 촛불헌법의 적용을 다음정부로 미루지 않고 본인부터 받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본인의 대통령직부터 적용할 헌법안을 만들면서도 헌재소장에 대한 임명권을 내려놓고 감사원을 독립시키며 특별사면권 제한을 수용한 문 대통령의 진정성도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실제로 문 대통령의 개헌안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할 뿐 보태는 부분이 전혀 없다. 이전의 권력 강화용 대통령주도 개헌발차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작금의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문 대통령은 국민과 약속을 지키고 국회를 자극하기 위한 최종방편으로 개헌운전석에 앉았을 뿐 정권차원의 불순한 동기나 목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쌍방대리 개헌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정헌법의 본인적용방침으로 말미암아 문 대통령이 현직대통령으로서 강력한 단기적 이해관계를 갖는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개헌발의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대통령의 국민대표성 때문이지 정권대표성 때문이 아니다. 물론 정권대표자의 모자를 내려놓고 국민대표자의 모자만 쓰고 개헌안을 마련하라는 우리헌법의 주문은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 미국헌법이 대통령(주지사)에게 개헌발의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딜레마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개정헌법의 본인적용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문 대통령은 본인에게 적용될 헌법안을 본인이 만들어 발의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다시 말해서 이번 개헌안을 작성할 때 문 대통령은 국민과 정부를 쌍방 대리한 측면이 있다. 이 경우 문 대통령이 아무리 주의와 경계를 기울여도 직접적 이해당사자의 단기적 계산속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법이 대리인의 쌍방대리와 자기대리를 금지하는 이유다. 나는 문 대통령도 이런 점을 의식해서 특히 권력구조 개헌안을 마련할 때 더 많은 역지사지를 실천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사권행사에 대한 국회의 동의대상을 조금도 확대하지 않은 부분에 이르러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 부분을 야당과의 막판협상 칩으로 일부러 남겨둔 게 아니라면 부지불식간에 자기대리의 덫에 빠진 결과가 아닐지 되돌아볼 일이다.
역지사지의 제도화
고작 3~4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달려 30년 개헌대계를 그르칠 위험성은 야당들도 예외 없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현실의 야당들은 특히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제는 여야 간 입장 바꿔보기를 통해 얼마든지 공정한 국가운영 틀을 만들어낼 법한데도 우리정치문화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예를 들어 국회추천총리제를 2년 후인 21대 국회부터 적용한다고 해도 야당들이 지금과 똑같은 강도로 목을 맬지 의문이다. 집권가능성이나 존속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정당들이 최소한의 권력분점장치로 매달리는 것과 달리 집권 경험이 많은 자유한국당이 총리 국회 추천에 앞장서는 모습은 무책임해 보인다. 여기서는 국민이 아니라 직접적 이해당사자들이 주도하는 쌍방대리 개헌논의는 팔이 안으로 굽기 쉽다고만 해두자.
요약과 향후 계획
이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구체적인 개정조항 중 기본방향이 잘못되었든가 규율내용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만한 부분은 내 눈에는 없다. 모두 30년 전 헌법이 갖는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한 바탕위에서 현실여건을 감안해서 전향적이고 진취적으로 고치려고 노력했다. 물론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손을 본 사항과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문제는 손대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이 말해주는 바가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특히 권력구조에 그런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은 이미 간단간단히 지적했다.
나는 이번 개헌안의 권력구조 설계가 어떤 잘못된 가정 위에 서있으며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를 좀 더 심층적으로 다루기 위해 앞으로 5회에 걸쳐 후속편을 진행할 계획이다.
첫째, 미국헌법의 대통령 권한과 우리 대통령의 과잉권한 비교, 둘째, 제왕적 대통령제의 존재양식으로서 3부 구성주의의 폐단, 셋째, 국무총리 재활용론(각료제청권)과 재설계론(국회추천) 비판, 넷째, 개헌절차가 갖는 헌법적 의의 및 합리적 개헌절차 방안 모색, 다섯째, 국회의원의 임기단축과 총선주기단축 기타 국회의원 힘 빼기 방안을 차례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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