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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왜 붓을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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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왜 붓을 들었을까 [인터뷰] 독립운동가 이효정·박두복 선생 아들 박진수 화백

"감동을 주는 사람, 감동을 주는 그림"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에 감동해 그 작품을 창작하거나 연기한 예술인에 대한 환상을 갖기 쉽지만, 실제로 가까이 그들을 알면서 존경하기란 쉽지 않다. 음악, 미술, 사진, 연극, 영화 할 것 없이 대개의 예술 분야는 종사자들에게 고도의 수련을 요구하는 일종의 전문기술직이기에 창작자나 공연자에게 충분한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지성까지 요구하는 건 무리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직업적 특성이 주는 순진무구에 가까운 순수함의 매력으로 족할 듯하다.


가끔은 그러나, 인간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오는 5월 12일 참여연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여는 박진수 화백이 그런 사람이다. 2018년 4월 17일 정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만나보았다.


이 날, 이 시각에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약속을 정한 이유는 조선공산당 93주년 추념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추념하는 조선공산당은 지금의 북한 노동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본식민지 치하이던 1925년 4월 17일에 결성되어 해방되기까지 20년 간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유일했던 한국인의 비합법 지하정당을 말한다.


식민지시대 조선공산당의 당원들이 감옥살이 한 햇수를 합치면 6만년이라 하고, 고문치사로 확인된 당 간부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 이날의 추념식도 공식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의 핵심이다가 고문치사 당한 권오설 선생의 88주기 추모식 형태로 치러졌다.


박진수 화백이 이 추모식에 참석한 이유는 아버지 박두복 선생과 어머니 이효정 선생 두 분 모두 조선공산당 계열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참석한 유족의 한 사람으로써 박진수 화백은 말한다.


"저희 아버님이나 어머님이나 혁명운동을 할 분들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다 학교 선생님이었듯이, 공부를 하실 분들이었다고 봅니다. 혁명운동 조직에 들어가도 이론에 밝고 가르치는 데 능한 분들이고 자기가 맡은 일을 꼼꼼히 할 분들이지, 앞장서서 정치적으로 타인을 선동하거나 지도할 분들은 아니었지요."


사실 이 점은 조선공산당 지도자들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당원의 대다수가 양반 출신이자 당시로서는 고학력이던 고등보통학교 출신들이니 말이다. 항일운동이 줄 것이라고는 감옥 아니면 죽음, 그리고 가난이었으니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뛰어들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해방직후, 박헌영에 이어 조선공산당 부당수라 불리던 이관술의 수행비서였던 이석도 옹은 살아생전 증언한다. 공산당 지도부가 매일 장시간 회의를 여는데 술 한 잔도 안마시고 크게 떠드는 사람 하나 없이 학교 교무실처럼 조용했단다. 오로지 담배 연기만 굴뚝처럼 뿜어 나왔다며, 강경파의 상징처럼 알려진 이주하조차도 소학교 선생님 같았단다.


어쩌면 이 무욕의 헌신성이야말로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장차 겪어야만 한 비극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박진수 화백 가족의 불행도 식민지 시절로 끝난 게 아니라,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방 후에도 좌익 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이번 행사가 열린 바로 그곳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뒤 종적을 감췄다. 1950년대 말, 북한의 공작원으로 남파되어 고향인 울산에 다녀간 것은 확실한 듯한데, 가족은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다른 이들만 만나고 갔던 것일까?


하지만 아버지의 월북과 남파는 어머니와 세 남매를 30년 가까이 모진 시련에 빠뜨렸다. 맏이인 박진수부터 제대로 한 군데 학교에 다니지를 못한 채 수도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간첩을 잡는다고 한밤중에 구둣발로 들이닥쳐 무차별 발길질을 해대고 옷장을 홀랑 뒤집어 놓고 가는 형사들, 아무 이유 없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따돌림을 놓고 폭행하는 동네아이들의 횡포 속에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했다. 이효정 선생은 수십 번이나 경찰서에 끌려가 당하던 중 팔목이 부러지기도 했다. 부러진 팔을 치료받지 못해 평생을 비뚤어진 팔로 산 어머니였다. 박 화백은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보고 경력을 쓰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배움 과정을 쓰라고 합니다. 경력이 있어야 쓰지요.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거나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가 없는 걸요."


어머니 이효정 선생은 당대의 고급 지식인이자 교사 출신이라 언론사까지 취업한 적도 있지만, 형사들이 나타나면 쫓겨나기를 되풀이 하니 한동안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겨 키운 때도 있었다. 그러니 따로 고향도 없어 울산 방어진이라고 하기도 하고 경주라 하기도 하는데, 경주에 머물던 15살 때가 9번째 이사였다고 한다.

▲ 어머니 이효정 선생 ⓒ박진수

이 와중에 두 아들은 그림과 조각을 배웠다. 아니, 터득했다. 고등학교 미술반에서 배웠을 뿐, 미술학원이나 미대에 다닌 적이 없으니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시인 이육사와 평론가 이원조, 그리고 어머니 이효정 시인을 낳은 수재 집안의 내력이리라.


18살이 되었을 때 만난 윤경렬 화백이 평생의 은사다. 돈은 내지 못했지만 일종의 사사 형식으로 윤경렬 화백의 집에 드나들며 박수근 화백, 윤이상 작곡가, 유치환 시인 등 여러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지나친 비료를 뒤집어쓰고 오히려 성장이 멈춰버릴'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한 시기였다.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던,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도 없던 그에게는 타고 난 미술적 재능이 오히려 업보가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 갑갑한 세상에서 정신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들길이든 물가에서든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으면 내 주변은 견고하고 고독한 공간이 되어 나를 아늑하게 보호해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모든 게 평화로웠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여기저기 공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두 동생을 둔 가장으로 의무와 책임이 무거웠다. 무의미한 단순노동으로 땀을 흘릴수록 그림에 대한 욕망은 더 커졌다. 현실과 꿈의 갈등은 그를 바싹 마르게 했다. 몸도 영혼도 말라만 갔다.


무언가 창작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심리적 고통 속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넘어서, 결혼까지 한 후였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환갑이 지나서야 보다 많은 시간을 그림에 할애할 수 있었다.

필자가 박진수 화백을 처음 만난 것이 2002년 서울 월드컵이 열릴 무렵이니 박 화백이 제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다.


날로 노쇠해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부천의 너무나 작고 초라한 연립에 살고 있던 박 화백은 여러 차례 취재를 갈 때마다 만사 제치고 곁에서 보조를 해주었는데 때로는 박 화백과의 대화와 취재가 더 의미 깊은 날도 있었다. 97세로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도 이영희 선생의 <대화>를 읽던 어머니 이효정 선생과 마찬가지로, 박 화백의 방대한 독서와 사색은 언제나 흥미로운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이효정 선생을 취재하러 가난한 연립에 드나들며 써놓았던 필자의 느낌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상대방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속에 사려 깊음과 총명함이 서려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목숨을 내걸고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듦으로써 완전한 순결을 얻은 그녀의 영혼은 해방과 전쟁의 혼란 그리고 이후의 빈곤과 치욕에도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다. 낮선 손님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지나치게 환대하거나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부드러이 웃어 줄 수 있는 기품 속에서 수십 년 동안 화제대상으로 올리는 것조차 금지 되었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거리낌 없는 이야기를 해주는 용기 속에서 한 세기를 살아 온 완성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묘사는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들 박진수 화백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밖에 없다. 실제 만나본 사람들은 알리라.

사람만큼이나 그림이 궁금했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가 혁명적 독립운동을 한 죄로 평생을 태생적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던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궁금했다.


이효정 선생과 먼저 가신 벗들과의 영혼의 대화를 그린 필자의 소설 <경성트로이카>는 우연히 박진수 화백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실제로는 어머니를 알고 난 후 박 화백을 만난다. 그러나 박 화백의 그림에 대한 묘사는 사실 그대로이다. 그의 화풍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인생파'였다. 필자와, 그리고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생파 그림이었다.


환갑이 넘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재개했다지만 여전히 극빈한 생계를 꾸려나가랴, 어머니 병구완을 하랴, 생활과 함께 해야만 하는 그의 그림에는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봄날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도 보이고, 폐지 구루마를 끌고 가는 노인도 있다. 갯벌에 쓰러져 누운 낡은 배도 있고 아무도 걷지 않는 고요한 푸른 숲길도 있다. 화사한 꽃잎 날리는 아름다운 산수화도 있다. 한 마디로 그의 그림은 다양하다.

유치원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해 미대 졸업 후 유학을 다녀온 후 대학교수로 안락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리는 보통의 화가들은 자기만의 소재를 갖고 평생을 되풀이 해 그리는 것을 중시한다. 화사한 꽃이나 물방울 같은 특정 사물만을 수천 장씩 재생하기도 하고, 직선이나 곡선만으로 수억 원짜리 그림을 양산하는 미대 교수도 있다.


이유는 같은 소재, 같은 주제의 비슷한 그림을 양산해야 그 작가만의 고유한 특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 같은 평범한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식 상품화, 상품 가치 높이기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박 화백 본인의 말을 들어보았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지 남을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언어 표현은 어눌하지만 뜻은 깊다.


"저는 화단에서 흔히 이야기 하는 컨셉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개념이라는 뜻인지 발상이라는 뜻인지. 공장에 가서 일하다가 1,2년 뒤에 돌아와 또 그리고, 다른 데 가서 일하다가 또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대소변 수발드느라 2년을 보내고. 생계도 있고 장남이라는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붓을 잡으면 생각이 끊어져서 그랬을까요? 미술평론가들이 원하는 콘셉을 저는 충족시키지 못하겠어요. 하나의 소재로 끈질기게 주제를 추구하라고들 하는데, 매일처럼 다가오는 이 충격적인 현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시하고 수십 년 간 매냥 똑같은 소재의 비슷한 그림을 그려놓고, 보는 사람에게 이 걸 왜 그렸고 무슨 뜻이라고 설명을 해주어야 하다니,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 끌다 10F (530 x 455 mm), Oilpainted on canvas, 2015

그냥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누군가 해석을 해주어야 훌륭하다고 감탄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박 화백은 확실히, 그림으로부터 심각한 무언가를 원하는 그런 이들에게 실망을 줄 수밖에 없겠다.


"그림은 이래야 한다거나 이런 그림은 안 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다양한 생각과 재료로 다양하게 그리면 되는 거지요. 다만 저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에 종속된 상업주의적 그림들을 그리기보다, 주변 사람들 누구나 보고 좋아할 수 있는 그림, 평범한 삶을 그리고 싶은 것이지요."


맞는 말이다. 능력에 비해 과도한 미술 애호가인 필자의 집에는 꽤 여러 점의 그림이 걸려 있는데, 늘 이용하는 식탁 옆 큰 벽에는 박진수 화백의 숲 그림이 걸려있다. 우리 식구들이 좋아하는 가장 편안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박 화백은 요즘은 운전도 그만 두었단다. 차도 손자에게 물려주었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까 근경이 보인단다. 인생의 자세가 바뀐단다. 지금까지 원경을 주로 그렸다면, 앞으로는 근경을 자주 그릴 생각이란다. 이 역시 단순한 소재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기대된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93세의 이효정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돌아가시기 4년 전이다. 늦고도 늦은 조치였지만, 그나마 후세의 기록으로 남게 되어 다행이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2년 간 옥살이를 한 아버지 박두복 선생은 여전히 울산 지역의 금기어로 남아있다. 요즘 그래도 박두복 선생을 기록해 두고자 하는 일부 노동자들이 있어 역시 기대가 된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밀다 15F (651 x 530 mm), Oilpainted on canvas, 2015

▲ 라면 8F (455 x 379 mm), Oilpainted on canvas, 2017

"시골의 노인이 꽃을 꺾어드니 온 세계가 봄이로다" 박진수 작품전

전시기간 : 2018년 5월 15일(화)~5월 31일(목)
오픈 행사 : 5월 15일(화) 저녁7시
장소 :참여연대 갤러리 (서울종로구통인동 132)
페이스북 : //www.facebook.com/parkjinsu7th
문의 : 02-723-5304
[email protected]

<박진수 작가 약력>

▲ 박진수 화백 ⓒ참여연대 제공

1938년 경남 울산 출생

개인전 6회
2015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 라온제나 갤러리
2010 ‘박진수' 전 / 일본 동경 긴자 ‘류' 화랑
‘황혼의 궤적' 전 / 경주 교육 문화 회관
2006 ‘思人思色’ 전 사인사색 / 국립 경주 박물관 특별전시관
1997 박진수 작품전 / 부천시 홍보 전시관
1995 박진수 작품전 / 부천시 홍보 전시관

단체전 다수

현재 인천 부평의 개인 화실에서 십여 년 째 그림모임을 진행 하고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안재성 소설가는 장편소설로 <경성트로이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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