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옛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 분수대는 5·18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사적지다. 80년 5·18에 관련된 많은 얘기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의 음험한 정권찬탈 음모가 진행중이던 80년 5월 16일 저녁 도청앞 분수대 일대에서 시민·학생들의 마지막 평화집회가 열렸다. 3만여명의 시민·학생 시위대가 운집한 이날 집회에선 400개의 횃불이 밝혀져 분수대와 인근 금남로 일대는 시위대의 함성과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그날 저녁 분수대 집회는 마지막 평화집회였다. 다음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이뤄지며 5월 18일부터 광주는 계엄군의 군홧발로 뒤덮였다. 시민 류재숙 씨(83)에게도 옛 전남 도청 앞 분수대는 아픈 고통과 쓰라린 회한이 서린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80년 5월 당시 류씨는 광주시청 급수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시민시위의 중심 거점이었던 분수대와 인근 금남로 일대 급수전이 모두 류 씨의 관리 책임 하에 있었다. 대다수 광주 시민들이 그랬듯이 류씨 또한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연일 금남로 시위에 동참했다. 그 무렵 계엄사령부로부터 류씨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분수대는 물론 금남로 일대 급수전을 모두 잠궈 시위대가 물을 사용할 수 없게 하라는 지시였다. 전화를 받고 류씨는 직원들과 함께 도청 앞으로 갔지만 차마 분수대와 금남로 급수전의 물공급을 차단할 수 없었다. 최루가스가 자욱한 거리에서 시위대가 얼굴을 씻거나 음용수로 사용할 유일한 공원이 분수대와 금남로 급수전이었기 때문이다. 류씨는 고민 끝에 물 공급을 차단하지 않았다. 지시가 이행되지 않자 계엄사는 거듭 차단을 종요했지만 류씨는 지시를 외면했다. 10일간의 피비린내는 항쟁이 유혈 진압된 며칠 후인 6월 3일 아침, 류씨 집 앞에 검은 색 지프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지프에 실려 보안대로 끌려간 류씨는 악몽 같은 며칠을 보내야 했다. 옆방에서 간헐적으로 비명소리가 들리는 폐쇄공간에서 류씨는 여러 장의 자술서를 써야 했다.
반역자 자식이니 공무원 직을 박탈해야 하느니 등등 거친 얘기들을 수없이 들었지만 다행히 구타와 같은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다. 보안대와 선이 닿는 지인의 도움 때문이었다. 결국 류씨는 사직서를 쓰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광주시청이 모범 공무원을 포상하기 위해 만든 제도인 녹색공무원 1호 지정자로 공직의 미래가 창창한 청운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후 류씨는 상수도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인으로 살았다. 생활을 유지할 수는 있었기 때문에 복직이나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고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지금 류씨는 “민주화 운동 공로자로 인정되고 가끔 관련 모임에 나가 그날의 얘기를 떠올리며 시민을 위해 공직자의 참 도리를 했다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고 소박한 심경을 밝히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류씨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날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5·18의 밝혀진 진실은 아직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삶이 일그러지고 훼손당한 아픈 진실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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