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가 올해 11월 20일까지 재검토를 앞두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변경으로 바뀌는 것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찢기기 쉬운 것은 귀한 것이기도 하다
이페메라(Ephemera). 뉴욕의 대표적 독립서점 가운데 한 곳인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inc.)에서는 이런 이름의 분류표가 있다. 한국의 서점에서 소설, 비소설, 에세이, 인문, 과학, 사회 식의 분류는 보았지만 ‘이페메라’란 분류는 정말 낯설다. 무슨 뜻일까. 단어의 어원이 될 ‘Ephemeral’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거기엔 "수명이 짧아 단명한다"는 의미가 적혀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책을 ‘이페메라’라고 부르는 걸까. 이페메라는 언뜻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기는 쉽지 않을 일회성 인쇄물이나 출판물을 가리키는 단어다. 프린티드 매터의 홈페이지에 한번 들어가보면 확인할 수 있다. (//printedmatter.org) 그림이나 글이 담긴 연습장 형태의 책, 광고 전단지, 포스터, 티켓, 책갈피, 화폐와 비슷한 모양을 띈 종이 쪽지들이 같은 분류 아래 묶여 있다. 독자에 따라서 이런 걸 대체 왜 파는 걸까? 이걸 책이라고 할 수 있나? 하는 의문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단지 ‘전단지’나 ‘찌라시’ ‘엽서 비슷한 것’이 아니라 ‘이페메라’라는 분류명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페메라는 영어 단어 ‘Humble’이 가진 양의성을 떠올리게 한다. 초라함과 겸손함이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찢기기 쉽다는 말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물론 모든 미국 서점이 이런 분류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페메라는 프린티드 매터와 같은 특별한 독립서점에서만 찾을 수 있는 유형의 출판물이다. 작고, 고유하고, 훼손되기 쉽기 때문에 유통하기 까다롭고, 대형서점의 진열 방식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책이 있으며, 수직으로 설 수 없기에 수평 진열이 필요한 출판물이 있다. 기성 출판의 책들이 엇비슷한 판형과 장정으로 만들어진다 해서 모든 책들이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책방이 없다면 새로운 책은 애초에 만들어지기 어렵지 않을까. 우리가 다양한 책을 만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상력이 용인되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독립(Independent)이라는 형식은 자본이 아닌 정신의 문제
내가 독립출판이나, 독립서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의 메이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한 이후의 일이다. 책에 관련된 일을 하는 많은 분들이 그렇듯 나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편집자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편집 일을 하면서는 책에 대한 애정이 점차 사라져간다고 느꼈다. 회사는 “좋은 책을 만드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납기 기한에 맞춰 책을 만들어 파는 것”이라 말했는데, 나는 그럴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들 책이, ‘사진 강의 노트(Teaching photography, OB PRESS)’를 쓴 필립 퍼키스가 말한 것처럼 ‘에소테릭(Esoteric)’한 것이기를 바랐다. 필립 퍼키스는 미국의 저명한 사진 교육자이다. 그렇지만 그는 40년 사진 인생에 걸쳐 단 한 권의 강의 노트를 냈다. 출판사는 OB PRESS라는 대학 출판부. 초판은 고작 300부. 나는 10여 년 전, 미국에 유학하던 친구를 통해 이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친구는 책을 구하고는 내게 물어왔다. “네가 찾던 책이 정말 이 책 맞아?” “왜?” “내 생각과 좀 다른 책이라서 놀랐어. 왜 그런 지는 직접 보면 알 거야.” 반 년 뒤, 한국에 온 친구에게서 책을 건네받곤 그의 말대로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나오는 보통의 책들과 달리 이 책의 모습이 정말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어떤 친구는 이 책을 보여준 내게 묻기도 했다. “이 사람 정말 유명한 사람 맞아?”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이 책의 지나치게 소박한 형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동안 고민했다.내용과 형식을 나눌 수 없는 책, 아티스트 북(Artist book)
내가 아는 어떤 독립서점 주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오랜 시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인생의 책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인생의 책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표지 디자인의 변화로 설명했다. 그는 이전 버전의 『오래된 미래』가 작가의 환경 철학을 닮은 디자인이었다면, 지금 버전은 코팅된 종이에 인쇄된 책의 만듦새가 책과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라, 두 책이 같은 책이라 느끼기 어렵다고 했다. 이처럼, 형식이 내용의 일부가 되는 책이 있음은 많은 분들이 느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내용과 형식을 아예 가를 수 없는 책도 있다. 책의 콘텐츠를 쓰기 전부터 형식이 고안되는 책도 있다. 특정한 형식을 통해서만 내용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한 예로 미국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Tree of codes>(국내 미출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을 쓴 이 작가는, 책 속에서 사진이나 그림, 이메일, 편지 등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실험적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런데 <Tree of codes>는 여기서 몇 발짝 더 나아간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인 브루노 슐츠의 <악어거리(The street of crocodiles)>라는 작품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자신의 책을 만들었다. 내용을 개작하거나 각색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속 단어들을 무수히 지워가는 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미래의 책과 작가를 위해서는 독립서점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책들은 문학 작가인 나에게, 아니 오랜 시간 미등단 상태의 작가 지망생에 불과했던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책을 쓰고 싶은가?’ 이때 ‘쓴다’는 말은 ‘책의 내용인 텍스트를 어떻게 써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어떤 형식을 통해 내용을 창출할 것인가. 어떤 형식을 통해 새로운 질문을 던질 것인가. 그리하여 어떻게 전에 없던 새로운 책을 쓸 것인가. 나는 오랜 시간 시를 썼으나 미등단에 머물고 있는, 그러니까 쓰고는 있으나 쓴다는 것만으로는 누구에게도 내가 작가임을 입증할 수 없는 유령작가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10여 년 간 공모에만 100여 차례는 응모했던 것 같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나는 무엇보다 자신이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는 너무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저 당면한 하루하루의 현실을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가 문제였으니까. 나는 어떤 글이 심사위원의 인정을 받을 만한 완성도 있는 글인지, 내가 누구보다 낫고 누구보다 못한지를 고민하면서, 보잘 것 없어진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며 지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제도가 나를 소모시켰을 뿐. 거듭된 투고로 작아질 대로 작아진 나에게 세계의 실험적인 책들은 용기가 되어 주었다. 책들은 우리 각자의 모습이 하나하나 다 다른 것처럼 누구나 고유한 목소리와 개성을 지니고 있음을, 타인의 인정을 구하기보다 너 자신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그렇게 2015년의 어느 날, 나는 공모전에 내기 위한 시 쓰기를 중단하고 한 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다. <진주>라는 제목의 책. 책은 이름 없는 민주화 운동가였던 나의 아버지와 그를 인내한 여성 가족인 어머니, 그리고 딸인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짧은 몇 편의 시로는 전달하기 어렵고, 에세이로 설명하듯 쓸 수는 없고, 픽션으로만은 말할 수 없는 이야기. 나는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논픽션도 아니며 동시에 그 모든 장르가 합산된 형식의 책을 쓰고자 했다. 그로써 문학의 경계와 금기에 저항하고 싶었다.장혜령: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소설 <진주>를 썼다. 2017년 문학동네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한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책을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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