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 일단 우여곡절 끝에 폐지하지 않고 현행을 유지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도서정가제의 쟁점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십오년이 넘도록 서대문구의 한 동네에서 세 군데 아파트를 돌아가며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내내 가장 가까운 서점은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처음에는 나들이 삼아 다녔지만 이내 편리한 온라인 서점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한데 얼마 전 내가 사는 동네에도 드디어 책방이 생겼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라는 한옥서점이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책방도 생기는구나’ 하며 혼자 감개무량했다. 비로소 내가 사는 곳도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된 것이다! 동네책방의 중요성을 절감한 건 2015년 무렵 동네책방 주인들을 인터뷰하면서부터였다. 가까운 곳에 서점이 있어 자주 가다 보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책방을 방문한 독자들은 “동네에 서점이 생겨서 참 좋다. 책방 문을 열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하지만 인터뷰가 이어지며 기쁨보다 “동네책방은 지속 가능할까. 동네책방에 미래는 있을까.” 이런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 질문을 따라 가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 출판유통 그리고 도서정가제였다.가격에 민감한 소비자
아침마다 알람이 울린다. 기상 알람이 아니라 오늘은 뭘 더 싸게 파는지를 알려주는 메시지다. 별거 아닌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광고 메시지를 클릭한다. 오늘은 스텐 냄비를 무려 82퍼센트나 할인하고, 극세사 밍크 담요 두 개를 11,900원에 살 수 있단다. 심지어 필요도 없는데 5단계로 밝기가 조정되는 캠핑용 램프가 8,700원이라니 한 번 눌러본다.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다. 소비자로서의 나 역시 가격에 민감하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실 정도다. 하루는 동네 야채 가게 아저씨에게 “다른 가게에서 야채를 더 싸게 판다”고 투덜댄 적이 있다. 아저씨는 무심하게 “세상에 싸게 파는 건 없어요.”라고 대꾸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 이런 야채 가게의 경제학자 같으니라고! 정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자를 위해, 소비자를 걱정해서 싸게 파는 일은 없다. 우리가 지금껏 구매한 저렴한 물건은 대충 두 가지 이유로 싼값에 팔 수 있었다. 싸게 팔면 상품 하나의 이윤은 낮을지 몰라도 대량으로 팔면 전체 이익을 높일 수 있다. 그러니 싸게 많이 파는 거다. 혹은 재고로 남느니 싸게 파는 편이 손해를 덜 볼 수 있다면 싸게 팔아 치워야 한다. 저가 의류 매장에 날마다 세일 상품이 있는 이유다. 같은 논리로 도서정가제를 살피면 훨씬 이해가 빠르다. 도서정가제는 유럽의 출판선진국을 중심으로 100여 년 전부터 시행되었다. 전 세계 국가 중에서 도서정가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노르웨이 등이다. 반면 도서정기제를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등이다. 실시와 미실시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뭘까? 딩동댕! 비영어권국가는 모두 도서정가제를 실시한다. 반면 영어권 국가는 도서정가제를 실시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 같은 영어권 국가는 출판의 수출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익을 극대화하고. 세계 시장을 상대하려면 도서정가제는 방해물이다. 필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상위 20개 정도의 대형 다국적 출판사가 97퍼센트 이상을 점유한다. 서점 역시 온라인서점 아마존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반면 독일의 사례는 흥미롭다. 100여 년 전 독일은 가격할인업자들이 등장해 지역 서점을 크게 위협했다. 이를 막으려면 출판사가 정한 가격에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출판사와 서점이 도서를 정가에 판다는 공동협약을 맺었다. 이후 오랫동안 지켜져 오던 도서정가제는 2천년대 초반 유럽연합이 들어서며 위기를 맞는다. 유럽연합은 독일의 도서정가제를 가격 담합 행위로 규정한다(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또한 독자가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며, 출판사가 이윤을 높이려면 가격경쟁력이 필요하니 도서정가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이 닥치자 독일 정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2002년 독일 정부, 서점, 출판계는 지금껏 협약으로 지켜오던 도서정가제의 법제화를 추진한다. 이대로 두면 도서정가제가 폐지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만약 도서정가제가 사라지면 자본력이 약한 중소 서점은 가격으로 경쟁해서 대형서점을 이겨낼 수 없다. 결국 중소 서점은 문을 닫을 테다. 또 베스트셀러는 가격경쟁력을 이용해 더 많이 팔수 있지만 그외의 잘 팔리지 않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은 유통될 수 없다. 결국 거대 출판 기업이 독주할 것이다. 그러면 전문출판사와 학술 서적은 위축되고 지식 산업 전체가 위험하다. 이런 판단하에 도서정가제를 법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도서정가제는 나라마다 전통과 환경이 상이해 운영방식이나 필요성은 다르다. 예컨대 우리는 신간과 구간의 구분 없이 모든 도서가 도서정가제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출간 후 1년 6개월에서 2년이 지나면 할인 판매가 허용된다. 이것은 다른 나라와 우리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는 지금까지 3차례 개정을 해왔다. 두 번째 개정된 2007년 도서정가제 법에서는 출간 후 18개월 이내 도서의 할인 판매를 허용했다. 그 결과 폐해가 엄청났다. 구간을 어마어마하게 할인 판매했고 급기야 신간이 설 자리가 없었다. 구간의 할인 판매가 허용되어도 한정적으로 적용하는 독일이나 기타 국가와 우리의 상황은 이렇게 다르다. 결국 2014년 도서정가제 개정 당시 구간과 신간의 할인 판매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밖에 없었다.무엇이 책인가
2003년 처음으로 법으로 제정된 후 3차례의 개정을 거친 도서정가제가 2020년 네 번째 개정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이번 2020년 개정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화두를 던지고 있다. 대체 무엇이 책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과거와는 또 다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36개 관련 단체가 결성한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는 도서정가제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를 유튜브 영상이나 SNS로 홍보했는데 이때마다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댓글이 달렸다. 이 주장의 핵심은 “이북, 웹툰, 웹 소설을 두고 책이다, 아니다 하지 말아라. 우리는(이북, 웹툰, 웹소설)은 공공재가 아니라도 괜찮으니 도서정가제를 풀어달라.”는 것이다. 2019년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하는 청원에 2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2020년 문체부가 제시한 도정제 개선안 4개 항목은 결국 무엇이 책이고 무엇이 디지털 콘텐츠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2020년 문체부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은 네 가지 사항으로 알려져 있다. 1)구간에 대하여 도정제 적용을 제외한다(舊刊, 발행 후 36개월이 경과하고 서점의 마지막 책 주문 이후 12개월이 경과한 책, 15% 이상 할인 허용). 2)문체부가 주최하거나 예산 지원하는 도서전에 한하여 도정제 적용을 제외한다. 3)전자책 할인율을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확대한다. 4)연재 중인 디지털 콘텐츠(웹툰 · 웹소설)는 완결 전까지 도정제 적용을 유예한다. 인류의 역사에 문자가 등장한 이래 사실 책이라는 미디어는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한때 두루마리가 책이었지만 지금은 종이책뿐 아니라 전자책과 오디오북 역시 책이라는 미디어에 포함된다. 언제나 미디어는 변하기 마련이지만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공존하듯, 텔레비전과 극장이 공존하듯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는 대개 공존한다. 다만 새로운 미디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숙제가 독자에게 남겨진다. 작금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에서 가장 큰 문제로 불거진 것은 ‘뉴미디어를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전자책과 웹툰, 웹소설을 포함한 디지털 콘텐츠는 책이며 도서정가제의 적용을 받을 것이냐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 중에서 웹툰 같은 디지털 콘텐츠는 국내는 물론 글로벌 독자를 대상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20년 웹툰의 시장 규모는 1조 원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가격경쟁력만 있다면 훨씬 더 많이 대량판매 할 수 있으니 당연히 도서정가제가 족쇄로 여겨질 테다. 미디어의 이행기를 맞이하였으나 지금껏 무엇이 책이고 무엇이 디지털 콘텐츠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한 적은 없다. 공대위의 공식적인 입장은 전자책과 디지털 콘텐츠가 도정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절실해 보인다. 이런 전제 없이 온라인상에서 이뤄지는 논쟁과 대립은 불필요한 감정싸움이며 가짜뉴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책은 부가세 면세사업이라는 점이다.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생필품 재화와 서비스는 부가가치세가 면제된다. 1차 생산물인 농수산물과 도서, 학원 등의 교육 서비스, 의료보건 서비스 역시 부가세 면세 항목이다. 부가가치세란 사업자가 창출하는 부가가치에 대해 과세하며, 가격의 10퍼센트가 부가가치세로 추가된다. 한데 책에서 부가세를 면제하는 이유는 다른 생필품처럼 서민의 부담을 줄여 소비를 주저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책은 정부가 인정한 공공재라는 뜻이다. 디지털 콘텐츠(웹툰·웹소설)가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대량판매를 원한다면 연재 중 도정제 적용 유예보다 도정제 적용을 받지 않는 대신 부가세를 내고 사업을 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맞다. 만약 연재가 끝난 후 책으로 만든다면 그때는 도서정가제를 따르면 된다. 지금처럼 도서정가제 적용은 받지 않고 부가세도 내지 않는 이중의 혜택을 원하는 건 곤란하다. 도서정가제가 법제화된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언제나 도서정가제는 자유경쟁 혹은 시장 논리에 밀려 차선을 선택하거나 타협해왔다. 그 결과가 10퍼센트 직접 가격할인이라는 꼬리표와 세 차례나 개정된 경품과 마일리지 조항이다. 2003년 도서정가제는 5년 한시법이었지만 2007년 개정 당시 이 규정을 폐기했다. 그럼에도 2014년 개정 당시 또 3년마다 타당성을 검토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 결과가 2020년의 개정 논의다. 인간이 지난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책이라는 미디어가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자 인간다움이다. 그런데 유독 도서정가제와 관련해서는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도서정가제는 시장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책 시장을 보호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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