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에게 외교 가르친 해리먼
그렇다면 바이든은 어떤가? 우선 그에게 조속한 협상을 기대하긴 어렵다. 트럼프 정책을 검토하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데 최소 6개월은 걸릴 것이다. 그 대북정책의 구체적인 성격은 어떤 것일까? 우리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걸 미리 그려보기 위해 먼저 살펴봐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애버렐 해리먼(Averell Harriman)이다. 그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민주당 행정부의 외교 '빅맨'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에는 마셜계획을 입안했고, 소련 주재 대사로 활약했다. 트루먼 대통령 때는 영국 주재 대사, 상무장관을 맡았다. 존슨 행정부 때는 국무차관이었고, 카터 대통령을 위해서는 대통령 특사로 활동했다. 그는 상원외교위원장을 지낸 외교 전문가 바이든에게 개인교사처럼 외교를 가르쳐준 사부이다. 1970년대 초부터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 등 워싱턴의 주요인물들을 집으로 초대해 외교사안을 놓고 토론하면서 상원 초선의원 바이든에게 외교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외교장관, 국회의장을 지낸 에드바르드 카르델(Edvard Kardelj)이 1979년 사망했을 때 해리먼은 미국의 특사였고 이때 바이든도 동행했다. 장례가 끝나고 해리먼은 당시 유고의 대통령 요시프 티토(Josip Tito)와의 면담을 신청했다. 처음엔 거절당했다. 안 만나주면 출국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면담이 잡혔다. 비밀면담을 위해 아드리아해 연안의 작은 도시 스트리트까지 갔다. 티토의 작은 별장에서 해리먼은 바이든과 함께 티토를 만났다. 티토로부터 히틀러와 싸운 얘기, 스탈린에 대한 증오, 비동맹노선, 다민족 국가 유고를 흩어지지 않게 묶어 둘 수 있는 방안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해리먼은 바이든에게 생생한 현장교육을 시켰다."적과도 대화를 계속해라"
해리먼은 바이든에게 외교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티토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외국이나 외국의 지도자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직접 가보고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적이라고 공언되는 대상이라도 계속 관계를 만들어 이익을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적과도 대화는 계속하라는 얘기였다.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덕목들이다. 해리먼은 그렇게 바이든을 데리고 다니고, 사람을 만나게 하면서, 덧붙여 그에게 실제 외교방안에 대한 교육까지 했다. 바이든은 자서전에 상세히 기록할 만큼 해리먼의 교육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 갖고 있는 북한 상대 외교에도 그가 교육받은 내용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은 그래서 높다. 이런 점을 고려하고, 그동안 바이든이 대선과정에서 얘기한 것을 종합하면, 바이든 대북정책의 틀을 짐작해볼 수 있다.북한과 단계적 협상
첫째, 북한과 어떤 식이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 할 것이다. 해리먼의 교훈이 적과도 관계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이 적성국이고 미국이 싫어하는 현상변경세력이지만, 해리먼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는 바이든은 대화하고 협상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둘째, 김정은과 정상회담도 필요하면 할 것이다. 외국은 가보고 외국의 지도자는 만나보라는 것이 해리먼의 충고였다. 평양에 직접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김정은을 만날 가능성은 높다. 다만 트럼프처럼 일단 만나고 보자는 식은 아닐 것이다. 실무협상을 충분히 해서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을 때 정상회담을 열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셋째, 단계적 비핵화 방안으로 협상을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대선 TV토론에서 바이든이 이미 밝혔듯이 북한의 핵능력을 축소한다는 데 합의하는 조건 하에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핵능력의 '폐기'가 아니고 '축소'를 조건으로 북미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단계로 영변 핵단지를, 2단계로 우라늄농축시설을 없애는 식으로 북한의 핵능력을 축소하는 데 합의하는 조건이면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협상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넷째, 트럼프식의 '탑다운'(top-down, 정상급에서 실무급으로)이 '아니라' 보텀업(bottom-up, 실무급에서 정상급으로) 방식을 선호한다. 김정은과 개인적인 외교, 친선외교를 하기보다는 전문관료가 나서서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가는 협상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을 충분이 가지면서 과정을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측가능성 높은 협상을 하겠다는 얘기이다. 다섯째, 동맹국을 중시하면서 협상할 것이다. 북한문제는 동맹국 한국을 중시하면서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도 이란 핵협상을 타결할 때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러시아와 함께 했다. 그런 식으로 동맹국의 협력을 기반으로 북핵문제도 풀어가겠다는 생각이다. 바이든은 그 자신이 상원외교위원장, 부통령을 지내면서 다양한 외교문제를 접한 외교 베테랑이다. 민주당의 외교이념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로, 국제사회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런 저런 의견을 들어가면서 문제를 풀어간다는 것이다. 고려할 사항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으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다가 바이든은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이 갖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을 제대로 해야 하고, 경제도 살려야 하며, 인종갈등도 해결해야 한다. 기후변화 대응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북핵문제가 앞쪽 번호표를 받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북한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북한은 경제건설총력전략 실행을 위해 미국과 조기에 협상하기를 원한다. 우리도 한반도의 해빙을 위해 조속한 북미 핵협상을 원한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해서 될 일은 아니다. 미국에 북미협상을 촉구하되 북한의 상황과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북한에게도 바이든 행정부의 속내를 깊이 파악해 전하면서 진중하게 협상의 모멘텀을 찾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우리 정부가 더 바삐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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