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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값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제 값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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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값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제 값을 주는 사람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12

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 일단 우여곡절 끝에 폐지하지 않고 현행을 유지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도서정가제의 쟁점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연재 바로가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값'이라는 단어가 과연 자신의 뜻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 뜻이 언젠가 두루 알맞게 쓰였으나 이제 와 더는 무용하게 되었다면 말 그대로 제 값을 하지 못하는 단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에는 제 값이 있다’고 할 때 ‘제 값’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제 값’을 ‘제 몫’이나 ‘값어치’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저마다 제 몫을 찾고, 자신의 값어치를 하고, 제 값을 받는 것은 한 사람이 살면서 여러 차례 시도하고 실패하고 때로 성공하는 일이다. 사람은 대체로 제 값을 따질 때 늘 모자라다고 느낀다. 충분하다고 여기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사람들은 어지간히 잔꾀를 부리지 않은 이상 자신이 임한 일에 최선을 다했고, 제 몫에 넘치는 노력을 했지만, 제 값은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내심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노동을 댓가로 자본을 취득하는 사회해서 반복되는 불평등과 빈곤의 가속화를 만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용자는 대체로 적정하게 여겨지는 값보다 항상 덜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동이 자본인 사람과 돈이 자본인 사람은 그렇듯 팽팽하게 대립한다. 나는 지금 두 개의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작가이면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얼핏 보면 흡사한 일에 종사한다고도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노동이 자본인 사람이고, 서점 주인은 돈이 자본인 사람이다. 작가로서 나는 나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지만 서점 주인으로서 나는 돈을 자본으로 하여 책을 사고 직원을 고용하여 노동의 댓가를 지불한다. 서점 주인으로서 내가 세운 몇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직원을 고용할 때 내가 시간 당 받고 싶은 금액을 시급으로 책정했다. 내 서점의 시간 당 급여는 1만원이다.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10퍼센트 할인가에 구입할 수 있지만 서점 주인으로서 나는 책에 적혀 있는 금액 그대로 팔기로 결정했다. 배송을 원하는 경우에는 배송료를 받고 있는데 이 또한 온라인 서점에서 무료로 배송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책을 살 때마다 적립금이 생겨서 그다음 책을 구매할 때 돈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서점에서 책을 살 것이며 부러 나의 서점에서 배송을 받으려고 하겠는가 생각해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라곤 ‘제 값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밖에 없다.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냐고 내게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서점의 주인으로서 제 값을 주려는 사람들과 책을 매개로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나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고 싶지 않다. 작가의 노동을 사용하는 자들은 대체로 작가가 하는 일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무한한 욕지기가 열리게 될 테고, 나는 이 글의 논점에서 벗어날 것이 분명하다.) 물건을 주문하면서 배송료가 무료이거나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 배송 기사에게 천 원을 건낼 때 한번쯤 우리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택배 기사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SNS에 적으며 윤리적으로 남들보다 나은 사람인 척하기 전에 말이다. 제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누군가 제 값으로부터 배제된다. 그 누군가는 무조건 가장 약한 자로부터 시작해 영역을 넓혀간다. 우리가 할인과 무료 배송으로 제 값을 지불하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십 년? 이십 년? 한 사람이 이삼 천원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결과는 여러 사람의 죽음이다. 우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들의 결정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결정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오히려 동조하는 시스템에 가담해 왔으며 그것이 유지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해 왔다. 우리가 제 값을 지불하지 않는 동안에 자본주의 가장 꼭대기에서 제 값이 아닌 것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므로 반드시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들이 제 값보다 훨씬 싼 값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동안에 제 값을 주지 않은 사람은 어째서 절대로 부를 축적할 수 없는지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당장 눈 앞의 것을 본다. 뒤에 무엇이 올지 모르고 웃고 운다. 뒤에 무엇이 올지 알고 앞서 웃거나 먼저 울고 있는 자들이 본 것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해야 한다. 누군가 당장 좋은 것에 엄중히 경고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스스로 죽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제 값이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죽는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의 목숨값이 얼마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나는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유진목 시인, 시집 <연애의 책> <식물원> <작가의 탄생>을, 산문집 <디스옥타비아> <산책과 연애>를 썼다. 부산 영도에서 서점 ‘손목서가’를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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