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폭령위반 수배자가 되다.
1980년 서울 민주화의 봄, 그리고 5.18 포고령 위반자로 수배되어 급전직하 시국사범에 빠져들게 되었다. 1980년 다행히 졸업한 나는 임진택 선배 소개로 '창작과 비평사'에 취직했다. 편집 디자인 파트에 배정되어 막 일을 배울 때였다. 삼개월 지난 1980년 5월 어느날 5.18이 터지고 출판사로 광주의 대학생 애독자들이 그곳 소식을 전화로 전해 왔다. 그 내용은 지금 국민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전화 통화 끝머리에는 꼭 이 소식을 서울에 알려주십시오 하였다. 귀를 쫑긋 세워 다 기억해두었지만 계엄정권의 통신 단절로 광주 소식이 두절되었다. 우리 탈춤반 대학동아리 연합 모임이 발빠르게 모처로 모였다. 기억으로는 서울대 이대 연대 홍대 한양대 서강대 탈춤반 동아리들 대표자들이 모인 것 같다. 서울대는 좀 많아서 황선진, 박우섭 등 복학생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대책 논의 끝에 광주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만행을 우선 서울시민들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방법은 전단을 만들어 뿌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광주5.18에 대하여 잘 아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들어서 아는 소리가 제일 많았다. 그런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꾸 나를 처다보며 나서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차마 하라는 강요는 없지만 유인물 초고를 김봉준 당신이 써야겠다는 피치 못할 대답을 듣고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5.18 이야기를 전단으로 써서 나누자는 것이다. 참석자 모두 나의 결단을 바라듯이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결정의 시간이 얼마나 괴롭고 길었는지 모른다. 이걸 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찾아올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5.18 광주학살 진상을 알린다> 전단 작성자가 되었다. 우리 서울의 대학탈반 동아리 학생들은 조를 나누어 서울 전역에 골고루 뿌리기로 하였고 전단 인쇄는 서울대에서 맡은 것 같다. 나도 명동에서 뿌리고 도망쳤다. 내 임무는 잘 완수했다. 그게 오월이 가기 전일 것이다. 서울에서 1980년 첫 5.18 관련 유인물 배포사건은 '대학탈춤반 연합모임'에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 공대학생이 서울역에서 뿌리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 것이 왔구나! 계엄군 폭력에 최소 주동자로 나를 체포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밀려왔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집을 나오고 직장도 더는 다닐 수가 없었다. 입사 3개월도 안되어서 사직을 해야 했다. 발행인 백낙청 선생님에게 조용히 사정을 말하고 오늘 당장 그만두어야겠다고 말씀드리니 허락하시면서 위로금으로 두 달치 월급을 더 주신 것이다. 이 돈은 참으로 귀한 나의 도피자금이 되었다. 퇴직한 다음 날 계엄군이 나를 체포하러 창비사로 급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친구 화실로 우선 몸을 피하기로 했다. 광화문 옆 통인동 일제 적산가옥 같은 2층 목조건물이다. 작은 공간 간이침대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수배자는 너무 오래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다시 상계동 판자촌으로 숨어 들었다. 거기선 무명 만화가라고 소개하고 작은 월세방 하나 구해 자취했다. 친구 화실에서 나와서 상계동 판자촌으로 들어가 방에는 만화를 그려 벽에 붙여 놓고 불암산을 매일 올라 산천을 스케치하며 보냈다. 거기는 청계천 판자촌에서 쫓겨와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살던 난민촌이었다. 거기서 4개월 정도 살다가 청계천7가 주물공장으로 들어갔다. 길에서 만난 고교 후배가 집에서 운영하는 신주 철물 주물공장이었다. 주택용 장식물을 제작하는 곳이었다. 세면대 받침대나 문고리 창틀 등을 만들었는 데 거기서 시다를 했다. 나는 그 공장 함바집에서 먹고 자면서 기약 없는 수배자가 되어버렸다. 겨울에는 뚫린 천장에서 하늘을 보고 잤다. 그해 겨울 잠자리에서 떠 놓은 물그릇 물은 얼어있었다. 누구의 신세나 피해도 지기 싫었고 이 기회에 노동자 체험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수배자들끼리 시국대응을 위해서 비선으로 연락망을 갖고 있었는 데 내게 연락을 주는 여성이 한 분 생겼다. 이화여대 국문과 다니는 이대 탈춤반의 이선형, 이 여성과 접선하다가 연심이 생겨 나는 손을 잡고 구애를 한 것이다. '수배자 뒤에는 여자가 있다'는 속설이 맞았다. 사회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도망자 청년은 사랑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장기 수배에 큰 힘과 격려가 되었다. 어찌 이 애틋한 사랑을 평생 잊을 수 있겠나. 나는 훗날 청혼을 했고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가난과 저항의 길이 뻔한 이 무명의 청년 예술가는 평생 동반자가 되어준 아내가 늘 고맙고 위대해 보였다. 1981년 봄 계엄포고령을 해제해서 자수했고 한 달 투옥 당해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계엄포고령이 해제되었으니 특별한 다른 범법 사실이 없는 한 남대문경찰서는 풀어주어야 했다. 이렇게 사회로 복귀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더 막막하였다. 나는 1980년 5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수배에서 풀려났어도 블랙리스트 예술인이 되고 있었다. 군사정권에선 더는 정상적인 직장생활에 복귀하기 힘든 인생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성산동 화실시대
1980~1년 1년 장기 수배와 투옥생활로 나에게는 많은 것이 변했고 이를 느끼게 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이고 문화운동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 물음에 답을 찾아야 했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어서 성산동에 작은 화실을 장만하고 그림과 판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내 곁에 가끔 와 주었고 참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이 때 나온 목판화들과 <만상천화> 걸개그림은 내 미술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2년, 기간 수배 중 못 그리던 그림을 원 없이 그렸다. 이 때 그린 그림들이 내 미술의 밑천이 되었다. <어머니 돌아왔어요>, <목칼을 찬 조상>이 대표적 판화다. <아리랑고개>는 판놀이 '아리랑' 유인렬 연출 김경란 안무의 마당극에 얼굴 포스타가 되었고, <목칼을 찬 조상>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김민기 연출 연극에 포스타가 되어주었다. 탈에서 시작해서 황모장필 겨레붓이 밑천이 된 걸개그림과 목판화는 수십여점이 나오게 되었다.농민 속으로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이나 보다. 굴래방 화실을 하면서 1982년 내게 맞는 직장이 찾아왔다. 허병섭목사, 유인렬 친구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민중교육연구소를 차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비상근직 농민회 문화간사로 날 소개 시켜주었다. 기독교농민회에서 농민만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주 미션이었다. 농민들이 글을 안 읽어서 책으로 학습하기 힘드니 차라리 만화로 농민문제를 알리자는 것이다. 당시는 농민은 초등학교도 못 나온 농민들도 많았다. 본부 사무실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기독교농민회이다. 전국으로 농민회 회원들을 만나러 가며 취재도 농민회에 풍물도 전수하고, 행사 뒤풀이 놀이기획도 했다. 집에서 재택근무도 되는 자유로운 직장이었다. 농민교육장이 있던 전북 이서로 자주 다니며 농민교육을 참석해서 자료를 얻고 농촌현장을 다니며 농민만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농민만화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처음 하는 일이다. 독일의 한국 민중운동 지원 프로젝트의 하나로 농민회 나상기 사무국장이 만든 아이디어 같았다. 현장 농민이었던 배종렬회장, 정광훈 교육부장 등이 <농사꾼 타령 >만화가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만화는 농민 체험에 기반을 둔 이야기 그림이니까 농업경제, 경제학 책이 아니었다. 연역적 접근이 아니라 감성과 논리가 동반한 농민 이야기의 귀납적 정리다. 이 만화책이 일년 만에 출간되자 또 난리가 났다. 무허가 불온서적이 출판되었다고 저자를 잡아넣겠다고 동대문경찰서에서 난리다. 나는 피신해 또 있어야 했다. 경찰은 저자가 누군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회는 나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정광훈 교육부장이 소환되어 자기가 만화를 그렸다고 진술했으나 그럼 그려보라고 해서 들통이 났다. 그 다음 배종렬회장이 수사가 더 이상 질질 끄는 데 한계가 있어 나 대신 자수하여 구류 25일 판정을 받는 고역을 당했다. 이것은 만화출간 첫 탄압이었다. 끝까지 나를 보호해 주신 배회장님은 아직도 전남 함평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다. 이제 팔순 노인이 되셨다. 그 먼 곳에서 서울로 회의를 주재하러 오시고 단체 대표로 위험한 일들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분에게서 농민 지도자의 품성을 보았다. <농사꾼 타령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권에 맞선 농민 만화가 그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품에 비해 턱없이 낮은 농산물 가격 '울어버린 순이 아버지', 작은 농토에서 농업하는 소농의 비애 '메뚜기 아저씨 이야기', 시사비평만화 '농업문제 본질' 등을 만화답게 재미있고 웃음이 나게 그렸다. <농사꾼 타령>은 내가 배우고 놀았던 탈춤과 마당극의 미학과 표현력에서 받은 영향도 크다. 만화 주인공들이 탈춤처럼 마당으로 튀어나와 한바탕 놀고 들어간다. '고바우'나, '고인돌' 같은 만화, 이문구의 농촌 소설도 도움이 되었다. 만화책을 보고 토론주제를 내주어서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학습자료로도 이용하게 했다. 이 만화의 줄거리를 잡기까지 해남의 정광훈 농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남도 농민의 맛깔스럽고 현장감 나고 찰진 말씨가 말풍선으로 담게 되었다.[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ershouche688.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사) 민족미학연구소 ([email protected]) 채 희 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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