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에게 탈춤을
1985년 겨울 무렵 민문협에서 임기를 마칠 즈음 민문협 실행위원회에 의제가 하나가 올라왔다. 미국 뉴욕에 있는 교민단체에서 우리 문화 탈춤과 풍물을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논의 결과 김봉준이 적절할 것 같으니 갈 의향이 있는가? 묻길래 신혼 초 집안 살림도 일구기 힘든데, 사실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다녀온다는 말에 좀 엄두가 안났다. 아내에게 우선 물으니 아이 낳고 몸조리도 해야 하니 처가로 들어가서 아이는 낳을 터이니 다녀오라는 것이다. 평소 배포가 큰 여성 같다. 남편을 넓은 세상으로 풀어주려 한 것이다. 거기가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넓은 세상 공부도 할 것이니 여긴 염려 말고 다녀오라는 것이다. 그래도 출산과 육아 책임이 막중한 나는 더 머물며 아내의 출산을 돕고 아이 돌잔치까지 치르고 나서 1987년 봄 3월에야 미국 뉴욕으로 출국했다. 안양 신혼집은 정리하고 아내는 장인댁에서 살게 된 것이다. 아내는 미술사 석사 공부도 다 마치기 전이고 한 살짜리 어린 딸을 두고 홀로 조국을 떠나기도 참 어려웠다. 이 땅은 민주화운동으로 점점 더 뜨거워지는 데 조국을 떠나기로 하는 것도 찹찹해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해외에서 우리 문화를 배우겠다는 청년들이 많아지니 거기서 탈춤 풍물을 가르쳐 문화패를 만들어 주는 일도 길게 보면 한국 민주화와 민족문화 확장에 도움 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결행을 했다. 1987년 봄 두세 달 예정으로 뉴욕으로 떠났다. 우선 강습은 무료로 해주고 나의 판화를 팔아서 모금한 것으로 경비를 충당해야겠다는 생각에 판화와 붓도 갖고 갔다. 이런 준비는 장기체류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 뉴욕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도착해서 아무 일도 못하게 발이 묶여버렸다. 나는 뉴욕 지역단체인 '뉴욕한인청년민중연합'(이하 민중연합, 대표 서경석)의 초대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데 강습일정과 주체가 결정이 안 돼 행사를 못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민중연합에서 초대했는데 한청련은 뭐지? 거기서 하지말라면 강습도 못한다는 거였다. 동포단체끼리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다. '미주한인민주청년연합'(이하 한청련) 대표 윤한봉은 5.18수배자였는데 밀항으로 망명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다. 여기 미국에서 한인청년동포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마냥 체류할 수만도 없는 처지라 그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김봉준은 탈춤 풍물강습은 민중연합 초대로 왔으나 한청련에서 거기서 강습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려면 한청련에 와서 하라는 것이다. 초청해서 온 사람을 다른 단체로 와서 하라는 것이다. 나를 놔두고 민중연합과 한청년이 서로 싸우다 두 달을 허송세월 보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그럼 민중연합과 한청련과 김봉준, 삼자가 같이 논의해서 풀어보자고 했다. 회의장으로 한청련 뉴욕사무실에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한청련이 초대해서 한국에서 와 있는 두 분, 김용태 사무총장과 유홍준 미술평론가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단체 사무국장들과 나는 회의를 하려는 데 뭔가 아쉬워서 김용태 총장을 찾아가서 같이 논의해서 고견을 말씀해 주시라고 청했다. 한국 민미협 사무총장이고 나를 파견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이기도 하니 논의에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을 가로로 저으며 너희들끼리 논의하라 한다. 유홍준님과 바둑을 두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끼리 많은 토론에 합의가 나왔다. "뉴욕에서는 두 단체가 공동으로 함께 강습회를 열고, 뉴욕을 떠나서는 한청련이든 다른 지역 단체든 가리지 않고 요청을 하면 자유롭게 강습을 열 수도 있게 하자"라고 합의했다. 이런 결정이 합리적이다 싶었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숨었나? 삼자의 결정에 궁금했는지 김용태 총장이 바둑을 마치고 다가와 어떻게 결정했냐? 물었고 한청년 실무자가 김봉준선배가 제안한 의견이 합리적이라 다 동의한 안이 나왔다. 두 단체가 같이 강습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라고 했더니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손바닥으로 전광석화처럼 내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당한 일이다. 눈물이 핑돌고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누구 맘대로 그렇게 결정해!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동물적 분노가 치밀어 대들려고 했으나 주변 청년들이 양팔을 붙들고 막는 바람에 확전이 안 되었다. 나는 겨우 진정하며 한청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사태란 말인가.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그것도 젊은 청년 동포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왜 이런 사태가 생겼는가. 내막이라도 알아야 대응하겠는 데 바로 알게 되었다. 이 일로 두 단체 대표 운한봉과 서경석이 담판을 했으나 서로 싸우다 헤어졌다. 한청련(전국대표 윤한봉)과 로칼 조직 민중연합의 깊은 조직노선 상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윤한봉이 조직한 한청련 민족해방민주 노선과 서경석이 조직한 민중연합 일반민주주의 노선이 부딪친 것이다. 동포문화강습 하나도 서로 싸워서 못하는 관계였다. 한청련 편에 섰던 김용태 총장은 내가 민중연합을 도와 강습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입장을 미리 내게 이야기 하고 나를 설득하던가, 같이 논의해서 반대의사를 말하던가 해야지 회엔 안들어오고 결정을 엎어버린다고 이런 깡패같은 폭력을 문화계 후배한테 휘둘다니! 그것도 이역만리 외국 땅까지 같이 와서 동포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갈기는 폭행을 하다니, 객관적으로 봐도 이건 비민주적 폭거로 이상한 짓이고 못된 행동이다. 민주주의 원칙을 믿고 토론과 합의로 그동안 문화운동을 실천했다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이런 반민주적 폭거가 소위 우리편 선배한테 나올 줄 몰랐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쩔 줄 몰랐다. 분노와 슬픔이 오랫 동안 가시지 않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윤한봉, 황석영, 김용태로 이어진 동지의식은 NL노선으로 끈끈하고 강한 것이었다. 한청련은 뉴욕에서 그전부터 민중연합과 노선적 갈등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민중문화운동협의회로 뉴욕 '민중연합'이 초대장을 보내서 왔다. 비행기표도 받고 기숙제공 받으며 왔으니 민문협과 민중연합의 파견 초청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청련으로 냉큼 건너가서 강습을 하는 것은 상식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중재안으로 두 단체와 나 사이 삼자 실무자 회의로 민주적 결정이 되어도 무시했다. 한청련과 김용태에게는 통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한청련은 윤한봉의 지도노선이 강하게 작용하는 단체였다. 일이 이렇게 된 바, 민중연합은 단독으로 행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돌아보았다. 문화사업은 정치운동에 마냥 끌려다니는 건가? 정치운동만 전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운동도 전략이 있으면 안되나? 한국의 민문협은 의견 조정을 바랬지만 그저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문화사업은 이념이 달라도 비정치적 영역있으니 같이 하자고 삼자가 합의한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문예는 정치이념과 다른 괘도를 가면 안되나? 미주동포사회 문화운동은 필요하지 않은가? 별별 생각이 다 났다. 합의는 깨지고 이젠 민중연합 단독으로 강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은 단순히 김용태와 김봉준의 사적 갈등만이 아니었다. 물론 김용태의 폭행으로 발단은 되었지만 미주지역 한청련과 민중연합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내재해 있고, 한국과 미주동포 사이에 넓게 영향을 주고 있는 민족해방노선과 민중해방노선과 일반민주주의 노선 간에 갈등의 근원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노선들을 경직되게 갖고 있는 운동노선은 한국사회운동에 이십여 년 정치사상 갈등을 이어오게 했었다. 1980년 이후 NL과 PD가 한국의 반독재투쟁에서 근본주의 이념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과 대통령선거 투쟁에서 서로 심하게 싸우며 갈라졌다. 대선이 양김으로 분열한 후 민주연합전선은 깨지고 더욱 갈등이 심해졌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도 진보정당 정치운동에서도 이어온 고질적 노선갈등이 되어버렸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지적이 유명한 말이 될 정도다. 이것은 아직도 진보정치의 분열로 진보정당이 성장하지 못한 원인이 되어버렸다. 옳고 맞으면 좋은 데 한국사회 사회구성체로 보나 현실 대중의 불수용으로 보나 대중운동에선 맞지 않는 관념적 노선이다. 우리가 남미도 아니고 무장투쟁을 할 대중적 지지도 전무한 데 무슨 무장투쟁 해방노선이 가능하단 말인가. 말로만 이론으로만 급진적인 노선은 이미 현실 노선이 아니다. 이런 관념적 정치운동은 미국에서는 망명가로 체류하며 모국지향의 NL노선(정확히는 NL비주사파)에 한계가 드러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부터 NL PD의 갈등이 한국사회뿐만아니라 미주동포 현실에는 안 맞는 지식인의 관념적 이념주의로 보이기 시작했다. NL은 민족모순에 지나치게 경도된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PD는 계급모순에 지나치게 경도된 세계관을 고집한다. LA 민중문화운동연구소 초청으로 가서 동포청년들과 학습하며 '미주동포사회운동의 과제와 비젼'에 대하여 토론하며 그 결과를 공동집필해서 축전 행사 팜플렛에 실었다. 운동노선 비판으로 정면 승부를 건 것이다. 딱 5년 후 미국동포사회에서도 LA 흑인폭동사건을 만나면서 관념적 정치노선은 명백히 오류로 드러났다. 미주한인동포사회운동을 하려면 미국사회에서 민중과 지역사회에 먼저 뿌리 내려 거기서 신임을 얻으면서 개혁적 성과를 만들어야지 그곳 흑인, 스페니시, 아시안 등 비주류 소외계층과 교류는 외면하고 조국만 바라보는 한국 민주화와 민족해방운동은 출발부터 오류를 잉태하고 있었다. 1992년에 일어난 LA 흑인폭동사건은 미주한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흑인의 폭력과 약탈은 잘못되었으나 한인들이 지역사회 커뮤니티와 친교하기보다 흑인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기들끼리만 살던 습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미주한인도 이민을 간 이상 한국국민이 아니다. 거기서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만들고 그곳 사회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우선이다. 미국 같은 사회는 다문화 다중정체성이고, 이주민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새로 만들며 그 사회에서 적응한다. 자기 정체성 확립을 해야 존재의 자존감도 생긴다. 한국민주화운동은 정체성 확립 이후,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뿌리를 내려도 늦지 않다. LA 흑인폭동사건을 겪은 후 LA 민중문화연구소는 마이너리티 사회계층 속으로 들어가서 노동상담소와 문화사업을 병행하는 노선으로 정리했고, 한청련은 윤한봉의 귀국과 함께 조직이 와해되었다. 나는 미주지역과 독일동포지역을 10개월간 순회하면서 얻은 상처가 컸다. 민미협 민예총은 김용태를 중심으로 나를 배척했다. 큰 조직이 한 개인을 왕따시키는 건 쉽다. 술자리 안주감으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술동인 <두렁>도 와해되고 대선 실패하고 민문협 민통련은 해체되었다.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예술가 활동을 못할 것 같았다. 화인 아티스트의 꿈을 일단 접고 서울에서 가까운 공단이 있는 부천 인천 지역에서 활동할 생각으로 처자식 데리고 이사를 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윤석양 이병이 보안 사찰하는 민주인사 명단과 수사 현황을 메모리 카드를 갖고 탈영을 한 것이다. 내부고발자에 의해 군보안사 사찰이 폭로되었다. 군이 간첩은 안 잡고 민주인사 명단을 갖고 사찰과 조직적 빨갱이 죄를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던 것이다. <말>지 별책부록으로 발매되어 나도 구해서 보니 내가 그 명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오백 몇 번 사찰관리 번호까지 있고 나에 대한 정보가 순서를 매겨 적혀 있었다. "김봉준은 5.18 포고령 위반자, 문화운동을 하며 민문협 기획국장 역임, 미주지역에서 동포들을 반정부로 선동하고 북괴 간첩과 접선함, 현재 A급 수사중."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내가 북한 간첩과 접선해서 A급 수사 중이라니!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래서 그동안 누군가 미행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구나. 나도 그런 저런 간첩단의 일원이 되어서 갑자기 체포되고 '동포조직과 한국청년 간첩단 사건 일망타진!' 이란 기사가 신문마다 도배할 위기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 폭로 후 조용해졌다. 윤석양 이병의 사찰 내부고발로 도리어 보안사가 곤욕을 치루게 되었다. 나는 윤석양이병에게 큰 빚을 지고 산다. 그 많은 민주인사들이 사찰명단에 있었고 보안사 음모에 곤욕을 치를 사람들도 대기하고 있었는 데 이 폭로사건으로 보안사의 빨갱이 프로젝트가 무력화된 것이다. 언젠가 윤석양님 보고 싶다. 만나거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ershouche688.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사) 민족미학연구소 ([email protected]) 채 희 완 ([email protected])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