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 홀로 가기
1993년 여름 이제 도시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부천시 공장들도 제3의 해외기지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더 이상 도시에 살기 싫어졌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가기 힘들다고 혼자 가란다. 붙드는 딸아이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도시를 떠났다. 혼자서라도 가고 싶었다. 내 몸이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못살 것이다. 지금까지는 탈춤운동과 민중운동 속에서 '묻어가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홀로 가기' 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부터가 내 인생 진짜 진검승부 같았다. 나는 미술작가로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내 목소리에 음색이 있듯이 내 시색을 찾아 거듭나고 싶었다. 창작예술은 세계관의 거처가 있어야 한다. 거창하게 사상의 거처는 못 찾아도 내 미의식이 힘 솟을 거처는 더 이상 도시가 아니었다. 자연과 어울려 살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부천 복사골마당 마련 기금마련에 판화를 구입하였던 강영석 내과 원장이 계셨다. 이분이 사둔 강원도 원주 문막 땅을 구경 간 적이 있었는데 일당산 중턱 깊은 산골에 파농한 산비탈 농지를 갖고 계셨다. 고교 선배님이기도 한 강영석 내과원장에게 그 땅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화실을 그곳으로 옮기고 싶다 했다. 즉각적으로 허락을 해주시니 이렇게 해서 여기서 살게 된 지 이제 30년이나 되었다. 숲만 보이고 집 한 채 없는 산 중턱이었다. 대충 집터가 있었다는 곳에 조립식으로 집을 지었다. 부천에서 강원장님 소개로 중고 건축자재를 지원받아서 인건비만 200만원 주고 40평 집을 지었다. 나머지는 나와 1993년 한 여름 일이다. 사람들보다 자연이 좋았다. 함바집에 살아도 싱그러운 공기가 좋았고 짐승 울음소리도 노래처럼 들렸다. 직접 맨땅에 집을 짓고 처자식 놔두고 혼자 들어온 화실 생활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나를 도시에서 탈출하게 놓아준 아내와 딸, 그리고 터를 내주신 강영석 형님께 늘 고마워하며 산다. 가난한 화가에게 후원자란 소중하다. 누구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나 미술품을 누가 구매를 하는 지도 작가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예술인의 작업은 지원자가 누구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돈 가는 데 마음이 끌린다. 나는 몇 분의 패트론과 무명의 시민 고객들과 공방 미적 기술자로 생존해왔다. 4종 철인종목 운동선수처럼 나는 판화 회화 조각 서예를 같이 하는 미술가로 생존력을 키웠다. 탈춤을 추던 벗들도 도시에서 민주화운동 같이 하던 동지들도 잊혀져 갔다. 농산물 산지 직거래하듯 산골화실을 베이스 캠프 삼아 작품을 현지에서 직판하며 나의 미적 이상을 굽히지 않았다. 끝까지 이 길에서 예술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 탈춤 추던 광대처럼, 풍물 치던 굿패들처럼, 장날에 민화장처럼 민간의 생활마당에서 질기게 생존하는 민간문화 예인이고 싶었다. 나의 자랑 하나 있다면 산골에서 돈을 벌어서 아내에게 매월 빠지지 않고 생활비를 보냈다. 산골 생활 30년을 돌아보면 주력했던 공부가 있다. 탈을 그리다가 우리 겨레붓을 나 는 좀더 자유롭고 익숙하게 다뤄야 했기에 이 황모장필로 고구려벽화, 조선초상화, 풍속화, 산수화 등을 수 년간 독공했다. 마침 동아일보 연재 하일지 판 아라비안나이트 신문삽화 2년, 매일경제, 영남일보에서 소설 삽화 의뢰가 들어와 3년간 근 1000장의 조선 붓으로 그린 삽화도 도움이 되었다. 이 붓그림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고구려벽화에 쓰던 붓이 이런 황모장필 붓이었다는 확신과 닥종지에 황모필이 우리 회화의 원형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점점 흐르며 조선의 무화 불화 민화 풍속화 진경산수화로 확산되며 조선 회화의 주류를 이룬 것이다.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이어지고 있음도 알겠다. 붓을 어디를 쥐고 어떻게 쓰느냐의 차이이지 거의 같은 붓, 동이족의 붓 내림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국립박물관 풍속화실이나 산수화실에 가서 고서화를 관찰해 보시라. 거의 모두 닥종이에 황모필이다. 화선지에 백모는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것이다. 탈춤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춤과 우리 조선후기 탈춤은 연결되어 있다. 풍물도 마찬가지다. 내가 1977년 배운 고쩨의 지리산 풍물굿을 배우며 이 가락과 춤과 뜰밟이는 무지무지 오래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축전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 농부들도 몇 날 며칠을 술 마시고 춤추며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굿치고 뜰밟이하며 놀았을 것이다. 우도농악과 다르게 산골 풍물 농무는 아래 위로 겅중겅중 뛰는 무당춤과 흡사했다. 이런 도무를 집단적으로 추니 한 덩어리처럼 출렁출렁거렸다. 오랜 예술이 이 땅과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음은 참 고마웠다. 동학이 일어나고 탈춤과 풍물이 우리 시대로 계승되어 마당극 마당굿 탈춤 굿 소리로 그나마 한 모퉁이지만 생존하고 있는 것이 기적 같은 부활이다. 우리 K팝, K드라마, K한글, K방역, K아트가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것과 우리 겨레 신명의 예술 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K컬쳐의 씨알 같은 문화를 공부했던, 탈춤운동 했던 세대가 자랑스럽다.숲으로 가다
나는 1993년 이곳 강원도 원주 문막 산골로 이사 와서 내년이면 햇수로 산천 생활 30년이다. 회향 30년인 것이다. 이제는 여기 풀벌레 소리가 익숙하고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사는 게 익숙한 내 삶이 되었다. 사람 소리 거의 없는 조용하고 청정한 땅에 환경 귀족처럼, 산골 중처럼 숲 속 옹기 굽는 즈엄 장인처럼 살고 있다. 이게 내가 청소년 적부터 꿈꾸던 미래였으니 지금 꿈 꾼대로 살고 있다. 여기서 <산 그리메 물소리>로 붓그림을 정리했고,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로 판화를 정리했고, <신화순례>를 집필했다. 45년을 탈춤에서 시작해서 <신화미술관>을 세우고 신화예술까지 달려왔다. 이제 내가 일할 수 있는 해는 10년 정도이다. 이제 세수 68, 많이 살았다. 앞으로 10년 그 이상은 힘이 벅차서 못할 것 같다. 지금도 어깨 팔 근육이 쑤시고 허리도 아프다. 다행히 왼팔부터 왔으나 사방이 고장 난 몸이 될 터인데 십 년만 하면 끝이다. 내 주변에 갑자기 사라지는 선배 동료들 보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세상을 뜬 분들
세월에 장사 없다. 내 주변에도 사람이 떠나고 있다. 우선 아버님이 2017년에 떠나가셨다. 나를 엄하게 키우시려 했으나 나에겐 그것이 상처가 된 추억만 있는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미술임을 아시고 끝까지 밀어 주셨다. 만일 아버지가 대학을 가지 말아라 하셨다면 나는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공부를 좋아하셨고 고교 선생님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아들 큰 장래를 우려하셨다. 아버지는 4.19 당시 중앙고교에 계셨는 데 그 때도 학원민주화운동이 일어 학생들 추대로 '학원비리개선대책위' 같은 것을 맡으신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1년 후 5.16을 만나서 학교를 사퇴해야 했고, 다시 지학 책을 집필하여 검인정 교과서 공모에 냈던 것이다. 당시 새로운 교과목이 만들어지면서 첫 검인정교과서 보급이 필요한 문교부는 공모를 실시해서 새로운 지학 교과서를 발간한 것이다. 다시 당당히 명교사로 학교로 복귀할 수 있었다. 수학 물리 지학의 교사자격증을 다 갖고 계신 아버지는 훗날 자식들 넷을 다 대학 보내려고 학원강사로 전환하게 된다. 아버지는 내가 홍대 미술대에 들어가서 교직선택을 안한 것을 걱정하셨다. 졸업 후 직장으로 미술교사가 편한 데 가급적이면 하라는 것이다. 나는 끝내 아버지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아빠처럼 교사로 평생을 바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박인배 님이 나의 아버지 장례식에 조문왔었다. 소식을 알리지 않았는 데 뜻밖에 출현이다. 그날 조문을 끝내고 배웅하는 데 걸음걸이가 영 힘이 없고 비틀거리는 것이 뒤에서 보인다. 병이 깊어졌다. 오랜 당뇨병을 앓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말하고 웃기를 즐기는 낙천적인 사람. 그는 서울대 문리대 물리과를 나왔으면서도 연극에 심취해서 마당극운동을 펼친 문리대 연극반 재원이다. 특별한 재기는 없는 데 풍물을 좋아했고 노래패 <꽃다지> 창작하고 연출하여 1990년대 노동자 대형 노래마당을 대학가와 노동조합으로 노동자 단결의 노래, 민주투쟁의 노래를 대중화한 인물이다. 세계마당극축제도 이끌었다. 한 때 나와 함께 현장파 문화운동자들로 불렸던 사람이다. 박인배, 황선진, 연성수, 김봉준 등을 노동 농민 현장으로 민중문화를 앞장서서 보급하고 공연하던 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민문협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우리 이제 다시 모이자." 이런 말을 하고 헤어졌던 박인배를 장례식 영정으로 보았다. 나보고 조의의 말 한마디 해 달라는 갑작스런 제안에 준비 없이 한 마디 했다. "박인배, 이 분은 1980년 계엄군에 붙들렸다가 취조 도중 탈출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그 시절부터 지병 당뇨병을 앓으며 40년을 살았다면 짐작이 간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몸을 지켜야 했고 그만큼 고생을 더 하면서 문화운동을 했다. 그는 시민이 예술가다는 지론을 실천했다.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이 자기표현을 하며 광장의 예술가로 등장하는 모습을 먼저 알아보았다. 바람보다 먼저 쓰러지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섰던 영원한 문화운동가다." 박인배 장례식장에 머리를 빡빡 깍은, 그러나 낯익은 한 분을 만났다. 김구한님이다. 세브란스에서 암치료 받으러 입원했는 데 박인배 장례식을 알고 내려왔다고 한다. 깜작 놀라서 무슨 암이냐 물으니 폐암 말기였다. 우우, 암중에서 가장 치료가 어려운 폐암 말기라니.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문화운동계 후배들 보고 오히려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김구한 님, 이분은 서울대 국악과 입학 후 학풍이 안 맞는다고 다시 시험 쳐서 서울대 미대 조소과로 다시 입학한 미술가이다. 그러나 이 학풍도 마뜩치 않아 이천 도공들에게 찾아가 도자기를 배운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접하고 도저히 이런 사치스런 예술공부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삶의 예술도 아니고 약속권끼리 위안이나 삼는 화인아트가 체질에 안 맞는다는 것이다. 이런 형을 만나러 '80년대 초 채희완 선배와 이천 도예공방 현장으로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뜬 후였다. 일본의 여인이 찾아와 살림하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그후 오오사카 교민 중심으로 <우리문화연구소>를 차린 주역이었던 사실을 알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형님에게 미술실천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분이다. 내가 도시를 떠나 산골에서 공방생활을 막연히 그리워할 적에 먼저 그 모범을 보이며 이천에서 자기 가족들 모아 가족 노동으로 삼인행 동예공방을 만들고 자력으로 생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인아트는 자기들 약속권끼리 주고받는 가짜 유통시장이다. 공방에 찾아가면 늘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단호하게 "지금 미술은 민간생활과도 상관 없고 민중과 소통도 아니다"는 일갈을 들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선배가 있다니! 반갑고 든든했다. 동경대 미학과 석사를 나오고도 한국의 대학으로 진출하지 않고 장인으로 살다 간 민간예인이다. 이분이 돌아가시고 유골함 무덤을 그가 살던 <삼인행> 공방 뒤뜰에 묻었는 데 김구한추모위원회(회장 주재환)는 도자기로 비석 하나 세웠다. 내가 글그림을 황모필로 이렇게 아래 그림처럼 썼다.[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ershouche688.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사) 민족미학연구소 ([email protected]) 채 희 완 ([email protected])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