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과 나’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을 듯하다. 하나는 말 그대로 탈춤과 나의 만남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춤이 매개가 되어 내가 맺은 사람들과의 인연에 관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 바로 사람이다. 탈춤이 매개가 되어 만난 이들이나 탈춤 자체도 사실은 사람으로 인해 유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이들과 함께 지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들처럼. 하지만 지금은 헤어져 어디에 사는 지 알 수 없는 이들이 태반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다. 탈춤이 필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다면,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탈춤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도록 만들었다면, 그것은 분명 누군가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그 시작은 물론 한국외대 탈춤반이다. 박창희 선생님과 여러 선배들 덕분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볼 건 보고, 느낄 건 느끼고, 할 건 했다. 그러면서 만났던 많은 분들. 여전히 살아 계시어 호리호리한 몸매에 웃는 얼굴로 나타나실 것만 같은 봉산탈춤 김선봉 선생님, 백구두 신은 채 오토바이 타고 전수관으로 출근하시던 고성오광대 허판세, 허현도, 허종복 선생님, 양주별산대 여러 선생님들과 특히 춤 못 춘다고 따로 배우라고 핀잔주던 석종관 선생님. 덕분에 오기가 생겼나? 아니면 그런대로 춤추는 것이 좋아서 그러했나? 그렇다. 탈춤이 참 좋았다. 탈로 얼굴 가리고 땀 뻘뻘 흘리며, 하늘 높이 펄펄 뛰면서 한삼을 휘휘 휘두르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긋한 듯 힘찬 듯 솟구쳤다 풀썩 주저앉아 물 흐르듯 흐르니 몸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했다. 들썩들썩 어깨짓에 잔망한 손놀림이 작은 우주를 연출하는 듯했다. 탈춤은 너른 품만큼이나 자유로워 또 다른 몸짓, 발짓, 손짓으로 필자를 인도했다.
1978년 공간사랑에서 펼쳐진 공옥진 여사의 병신춤은 사람의 얼굴이 곧 탈이 될 수 있다는, 사람의 몸이 저리 굴신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자 깨우침이었다. 그제야 장단과 춤이 어울리는 법을 보았다. 아직 타령과 굿거리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 다채롭고 풍요로운 장단이 한참 동안 귀를 맴돌아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온갖 쇠와 가죽이 한데 울리는데 시끄럽지 않고 춤꾼과 관객이 함께 들썩이는데 소란스럽지 않았다. 밀양백중놀이에서 하보경 옹이 상투 틀고 홑적삼에 중의 걷어 올리고 한 손에 북채 들고 추던 북춤을 보면서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대 다녀온 후인 1983년 국립극장에서 몇 회 계속해서 열린 명무전을 볼 때도 그러했다. 아, 그렇구나. 저게 우리의 몸짓이거나 발짓, 손짓이구나. 그게 그렇게 좋았다. 탈춤은 이미 민족이거나 민중의 대변자가 되었고, 때로 투쟁의 선두에 섰지만 여전히 나는 탈춤에 매료되어 헤매고 다녔다. 2학년 때 크리스천 아카데미 탈춤반에 들어간 것도 그곳에서 김선봉 선생님에게 봉산탈춤 전과장을 배울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 배운 것을 밑천 삼아 전남대학, 부산대학, 경희대학, 순천대학, 상명여대, 덕성여대 등 여러 대학 탈꾼들과 함께 어울리며 탈춤을 추었다. 부산대학의 경우처럼 전수가 끝날 무렵 선생님이 오셔서 세세한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다. 배우면서 익히고 가르치면서 배웠다. 제주에 내려와 재직하고 있던 대학의 우리문화연구회에 지도교수를 맡았을 때도 그리했다. 1996년 몸이 불편하셨음에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바다 건너오신 선생님에게 배운 학생들은 선생님의 마지막 대학 탈꾼 제자가 되었고, 이듬해 공연에서 팜프렛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고 김선봉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또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1983년, 서울 대학로 소극장. 성근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장년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허리에 머리가 둘 달린 인형을 매단 채 익숙한 가락이 어울리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들뜨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분의 얼굴이 무언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웅변하고 있었다. 그 살벌한 시대에 그 분은 몸과 인형, 그리고 음악으로 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춤추며 절규하고 있었다. 쌍두아雙頭兒, 이미 고전이 된 심우성 1인극의 첫 번째 작품이자 대표작이다. 공연이 끝난 후 흥분하여 분장실로 달려가 선생님을 만난 기억이 새롭다. 얼마나 기뻤는지. 관념속의 통일이 구체적인 몸짓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이 보여주는 연희의 진정성이 짜릿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의 학생이 되었다. 왜 하필이면 인형극, 그것도 1인극을 고수하시는지, 조선의 탈이 왜 거의 대부분 웃고만 있는 것인지? 소주와 삼겹살, 그리고 불판에 올려놓은 김치를 함께 먹으면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민속이란 민중 의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민족적 형식이라는 것도, 민중의 문화를 그 대상으로 하여 민중의 거짓 없는 생활사의 줄기를 보는 학문이 바로 민속학이란 것도 모두 선생님에게 귀동냥하여 얻은 지식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덕분에 귀주貴州의 나희儺戱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난생 처음 <만석중 놀이>의 일원으로 일본 오사카로 해외공연을 가기도 했으며, 동문선 출판사에서 번역서를 서너 권 출판하기도 했다. 특히 오사카 공연이 끝난 후 쓰루하시(鶴橋) 조선시장 인근에 사는 재일동포들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들과의 만남이 바로 심우성 선생님과의 인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1990년 선생님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배우이자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까닭을 알려주셨다는 점이다. 선비와 광대라! 이 기묘한 결합을 당신께서 몸소 보여주셨으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어찌 남의 눈을 두려워할 것인가? 제주로 내려온 후 제주 입춘굿 탈놀이 복원에 일조한 것이나 제주 아시아 1인극 축제(비록 2회로 끝나고 말았지만)를 기획하고 개최할 수 있었던 것도 선비이면서 광대일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2006년 어느 날 선생님이 제주에 사시겠다고 내려오셨다. 제주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는 잘 웃어주시는 좋은 할아버지로, 춤꾼들에게는 격려와 애정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생님으로, 그리고 나에게는 든든한 배경이자 방패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대한 선생님의 자료를 둘 곳이 제주에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슬펐는지. 그리고 다시 선생님은 제주를 떠나셨다. 마지막으로 뵌 것은 평소 좋아하시던 인사동 벽치기 골목 '푸른별이야기; 구석방이었다. 오사카 쓰루하시에서 효유씨 부자가 와서 인사드리러 갔을 때인데. 이후 거처를 옮기셨다가 공주 요양원으로 내려가셨는데, 끝내 찾아뵙지 못했다. 2018년 8월 어느 날 아일랜드 어딘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문자가 들어왔다. 선생님의 부고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무엇보다 죄송한 마음, 가시는 길 배웅조차 하지 못할 처지가 가슴 아팠다. 받아먹기만 하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송구스럽기만 했다. 선생님은 고집스럽지만 외곬이 아니었으며, 세상을 가슴 가득 품으셨지만 세상물정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흔한 호號조차 알려주시기 않은 채 떠나셨다. 홀가분하실까? 이제 당신이 그토록 바라시던 남과 북이 너랑 나랑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웃음 지으실까? 오호, 애재라! 슬픔과 그리움의 정을 어쩌지 못하며 선생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 따름이다. 선생이 어찌 연장자만 있을 것인가? 필자에게 후배이나 또한 선생과 다름없는 이가 있다. 그는 고영일, 이제는 망자가 된 그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군대를 제대하고 탈반으로 복귀한 후였다. 처음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가 탈춤반에 풍물을 도입한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춤 장단과 영 다른 풍물장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춤, 특히 그의 고성오광대 춤을 보고 있으면 이내 편안해졌다. 바람 따라 흐르되 나풀되지 않고, 굴신이 자유로웠지만 절도가 있었다. 하여 고성오광대에 관한 한 모든 대학 탈춤반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두레 탈꾼들도 그의 오광대춤을 배웠으며, 연탈 78학번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이대 무용과 출신의 춤꾼들이 만든 춤패 '불림'도 마당춤판 <이 땅의 춤을 위하여>에 고영일을 특별 출연하도록 부탁했다. 나는 그를 ‘천하의 고영일’이라고 부른다. 그의 미묘한 예술 감각과 탁월한 풍물 실력이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1985년 졸업을 앞두고 우리는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에 집착한 후배들과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관심을 둔 선배들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덮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두루나눔'이다. 별도의 의상 대신 흰 러닝셔츠에 판화를 찍어 무늬를 만들고, 북춤으로 우리의 소리를 대신했다. “이것은 올바름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속에서, 공동의 사랑과 그 실천으로서 아픔에 대한 동참으로, 어둠에 대한, 옳지 못함에 대한 항거로 이어진다.”
'두루나눔' 춤판의 참 의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썼다. 아쉽게도 졸업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지면서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되고 말았지만, 그 인연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제주로 내려온 후 제자, 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제주 두루나눔」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해외공연을 하면서 그가 참가한 것도 또한 자연스럽다. 그에게 꽹가리나 장구는 아마도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깊은 마음의 울림이었으리라. 그는 우리의 시대를 풍미한 이념이나 거대담론과 관계없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우리 악기, 우리 춤이 지닌 이념성을 그만큼 여실히 드러내고자 한 이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춤꾼은, 놀이패는, 그리하여 딴따라는 몸으로 소리로, 울림 깊은 풍물로 노래한다는 것은 그는 진즉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악기 잘 치는 이, 춤 잘 추는 이로만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속내는 이로 인해 점점 더 깊어지고 아려지며, 급기야 고황膏肓까지 병들어갔는지도 모른다. 2016년 12월 26일 향년 54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유고시집 <바람이 꿈으로 돌아가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결국 / 내가 이 땅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 허위허위 걸어가는 이유는 / 무엇인가 / 무엇인가 / 나는 누구의 습작이기에 / 걸맞지도 않은 세상을 / 연습인 양 살고 있는가?” 그는 이렇듯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문하고 있지만, 그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아니 우리는 즐겁고 행복했다. 한 번도 그는 나에게 ‘아니’, 또는 ‘안’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그는 ‘그래’, ‘맞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겨울, 동학기행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이 함박눈이 오는 고부 황토현에서 시린 막거리를 나눠 마실 때, 타박타박 전주성을 향해 걸었을 때, 허름한 여인숙에서 소주를 나누어 마실 때, 그 즐거움과 행복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루쉰魯迅은 <무덤(墳)>에 나오는 '천재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并未鬼才很久)'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교목이 있기를 바라거나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좋은 흙이 있어야 합니다. 흙이 없으면 꽃과 나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흙은 진실로 꽃이나 나무에 비해 더욱 중요합니다. 꽃과 나무가 흙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좋은 병사들이 없으면 안 되는 법입니다.” 탈춤이 왜 그리 좋았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하지만 탈춤을 통해 만난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허우적거리며 예까지 온 것이 아닐까? 분명 그러할 것이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ershouche688.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email protected]) 채 희 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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