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
1. 나는 1893년 부안군 백산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걸인이 찾아오면 손수 밥을 갖다 주는 등 동정심이 강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방면에 관심을 갖게 된 요인도 거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은 논 350두락을 가지고 쌀 위탁판매업을 할 정도로 넉넉한 소지주였고 부모님들의 교육열도 남 못지 않으셨다. 일곱 살 때 이미 '맹자'를 전부 외우고 '시전'도 다 뗄 정도여서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랐다.
나를 가르치신 훈장은 서택환 선생으로 그 분에게서 한국의 선비정신과 민족의식에 관해 차츰 눈 뜨게 되었다. 서택환 선생은 합병되기 2, 3년 전 "우리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며 침통해 하셨다.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왜 우리 좋은 산천이 일본 놈에게 넘어 가냐며 꺼이꺼이 울기까지 했다. 그 뒤 사상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묻길래 나는 서택환 선생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자 재판정이 술렁였다. 보통 마르크스나 레닌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적 유교 집안에서 자라 한학을 공부했고 유교에 뿌리를 두고 독립운동을 위해 사회주의에 접근하게 되었다. 내가 운동을 접고 죽기 전까지도 여러 예술인들과 교류하면서 수많은 시와 글씨로 소일하게 된 것도 그 영향이라 생각한다.
2. 고향 보통학교 시절 내 시험지를 베껴 쓴 일본인 교장 아들이 1등하고, 내가 2등으로 발표되자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교장에게 따지고 학교를 그만두어버렸다. 그리고 군산 금호학교로 옮겨 갔는데 여기서 김성수를 만나고 그의 권유로 스무 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 대학 정치과 실과에 입학하여 한 살 아래인 장덕수를 만나고, 1914년 그와 함께 친구 7명을 모아 '곡귀단(哭鬼團)'을 조직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 죽더라도 끝까지 통곡하는 귀신이 되어 뜻을 관철하자는 결의였다. 차츰 도서관을 다니며 '사회주의 신수(神髓)', '제국주의론', '평민주의' 등 사회주의 노동운동 관련 서적을 정독했고 장덕수와 함께 사회주의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3. 나는 차츰 학교 공부를 그만하고 상해나 싱가포르, 인도 등지로 나갈 생각을 했다. 학교 공부는 일반적 사회활동을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와 같이 특수 목적을 관철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는데, 일본에 있는 동지들이 자꾸 편지를 보내와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강권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도 돈은 넉넉히 보낼 테니 걱정 말고 떠나라며 적극 찬성하시는 게 아닌가.
일본에 다시 온 나는 사정이 넉넉해져 매사에 자신감을 갖고 적극성을 보이다 보니 일본 학생들과 싸움이 잦았고, 한편으로는 유학생들 중에서도 나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 번은 조선청년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사를 초빙하여 시국 강연회를 가진 자리에서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병하여 사이좋은 형제국이 되었듯이 일본과 조선도 그와 같은 사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듣고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단상으로 뛰어올랐다.
"이것은 강연이 아니오. 이런 강의를 왜 들어야 하오. 삼택(三宅)은 내려가시오."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며 삼택을 단상 아래로 떠밀었다. 강연을 듣고 있던 최남선이 "끝까지 강연을 들어봅시다" 했으나 나는 들은 체하지 않고 끝내 삼택을 단상 아래로 내려오게 했다. 장내는 연사를 야유하는 소리, 나 김철수를 칭찬하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 후로 항시 형사가 따라붙었고, 이 일로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제법 인기가 높아져 동지들도 많아졌다. 친구들도 나를 초봉(初峰)이라고 부르며 매사에 앞장서 주기를 바랬다. 와세다 대학 졸업 사진에는 이름만 들어도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가득했다. 최두선,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 김영수,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김명식, 김양수, 이병도, 김종필, 현상윤, 고지명, 이현규 등등.
4. 1915년 대학 2학년 스물세 살 되던 여름 첫 비밀결사인 열지동맹(裂指同盟)을 결성한다. 정노식, 윤현진, 장덕수, 김효석, 김익지, 양산 사는 김철수 등의 벗들과 비밀히 모여 손가락을 찢어 낸 피를 섞어 서로 돌려 마시며 맹세를 했다. 국내에서든 나라 밖 싱가포르, 상해, 만주, 시베리아로 나가든 서로 연락하고 서로 사상을 같이 하면서 피압박 민족의 독립을 위해 쉬지 말고 운동할 것을 결의했다.
다음 해 봄, 같은 대학에 다니는 동지들이 찾아와 중국 사람들이 조선, 중국, 인도 등 약소민족들이 합심하여 일본을 때려 부수는 반제 운동을 일으키려 하니(신아 동맹) 함께 하자고 제의한다. 나는 하상연, 최익준과 함께 동경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 가서 중국 측 대표 황각, 등결민, 팽혁영을 만났고 며칠 후에 결단식을 가졌다. 조선 측에서는 나를 비롯해 최익준, 하상연, 윤현진, 정노식, 장덕수, 김명식, 김양수가 참석했고, 중국인으로는 황각, 대만인 팽혁영 등 삼십 명이 넘게 모여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다.
5. 1920년 가을에는 국내 사회주의 운동 사상 최초의 비밀결사인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나,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이중림, 도용호, 김종철, 최혁, 김달호, 홍도, 엄주천이 최린의 집에 모여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그 다음에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원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선결문제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나가야 한다는 것, 이후 사회주의자의 힘을 길러서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사회혁명당'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세력인 '한인사회당'과 결합해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상해파 고려공산당) 1923년 초까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6.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는 과정에서 진독수, 황각, 모택동, 구추백, 이립삼과도 만났다. 나는 모택동과 나이가 같았기에 큰 호감을 갖기도 했다. 공산당계 해외 독립운동은 이동휘 선생과 내가 속한 상해파와 러시아화 한 한인들이 지배한 이르쿠츠크파와의 대립이 심각했다. 상해파는 민족주의 경향이 공산주의보다 강해서 자신들의 운동이 러시아화한 한인들에게 지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때 상해파는 조국 해방투쟁의 지원을 얻기 위해 러시아 혁명 정부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나는 러시아 국경을 넘나들며 대러 교섭에 열을 올렸다. 여권 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었지만 이봉수와 나는 서로 몸을 내던지기로 맹세했다. 웨르흐네진스크에서 양파 연합대대회가 있었는데 이르쿠츠크 대표로는 김일성(金一成) 장건상이었고, 상해파 대표로는 이동휘, 윤자영, 내가 참석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해외에서의 한국인에 의한 공산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셈이었다.
7. 23년 7월 귀국해서 김제군 금구에 있는 친구 장현식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만다. 거주제한 조치를 당해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 제한이 풀리자 나는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식에 이어 박헌영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다. 11월 검거 선풍으로 전부 검 속되었고, 26년 4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6·10만세 운동 모의가 누설되어 제2차 조공도 와해되고 만다. 그 후 나는 은밀히 당 재건을 위해 동지들과 연락해서 9월 제3차 조선공산당을 출범시키고 책임비서가 된다. 12월에 열린 제2회 대회에는 전국에서 많은 당원들이 모일 걸로 기대했지만 검거를 피한 수십 명의 지방 대표들만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8. 26년 12월 17일 전후 나는 당 대표로 모스크바로 가서 다음 해 2월경 코민테른에 당 재건 과정을 보고했고, 이어서 코민테른은 3차 공산당을 승인했다. 이후 소련에서의 활동이 계속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28년 조선공산당은 정식으로 해체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결의에 따라 당 재건운동을 숙명처럼 받아들고 나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돈화까지 240km를 걸으면서 생전 처음 겪는 무지막지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동경성 앞을 지날 때는 사타구니가 얼어 더 걸을 수가 없었다. 목수건을 끌러 녹여가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호수 위로 거울같이 펼쳐진 얼음판을 걷는 십 리 길은 지금 생각해도 퍽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
9. 28년 12월 말 은밀히 귀국했다. 청진, 함흥, 원산을 거쳐 서울서 동지들과 회합을 갖고 고향을 찾았다. 변장을 하고 밤중에 집에 들어갔을 때 집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아우 복수를 만나 여비 때문에 들렀다고 말했더니, 아버지가 돈을 챙겨주며 어서 갈 데로 가라면서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머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신다. 어머니는 이불을 덮고 우셨다. 한참을 같이 울었다.
10. 1930년 2월 부산 제주를 거쳐 양산으로 다시 대구에서 동명이인인 김철수를 만나러 갔다가 체포되고 만다. 당시 치안유지법 최고형인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변호사인 김병로와 여인은 당장 항소하자고 했지만 나는 일본 놈들에게 꿇리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우리가 포로인데 일본제국주의 법률을 시인하느니 차라리 기꺼이 수의를 입기로 한 것이다.
11. 1934년 경성감옥에 있을 때 악독한 형벌로 일시 실신한 일이 있었지만 시를 읊어가며 자신을 위로했다. 또한 이질에 걸려 이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교도관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국화 한 그루를 청해 그걸 보고 또 시를 지어 위안을 삼기도 했다. 젓가락으로 골필을 만들고 난로 연통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물을 찍어 가래 뱉는 종이에 써서 중병감 일광욕하는 데로 던지니 김동삼 선생이 그것을 풀어보았는지 그 뒤 시 한 수를 적어 던지기도 했다.
그 뒤 김동삼 선생은 옥사를 하게 되었고 아무도 시체를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만해 한용운 선생이 손수레에 싣고 심우장으로 모셔갔다. 나는 대전형무소로 전감 되었다가 38년 10월 28일, 만 8년 8개월 만에 만기 출옥했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행히 원기를 되찾아 39년 여름에 그토록 보고 싶던 금강산에 올랐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12. 1940년 서대문형무소에 신설된 예방 귀 금소에 수감되었다가 당시 가장 악명 높았던 공주 감옥으로 전담되고 나니 나는 다시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졸도하기를 여러 번 위경련으로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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