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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번호 1996번, 그때까지 살면서 통일을 봐야겠다 희망을 걸었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11. 지운 김철수 선생, 마이크 잡다②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

13.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42명과 같이 감옥에서 나왔다. 일행에게 나는 몸이 아파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니 여러분은 서울 가서 군중 앞에 나아가 민족주의정치범 통일, 공산주의 통일, 민족공산통일을 부르짖는 것이 급무라고 외쳐야 한다고 일렀다. 9월에 여러 사람의 권유로 나는 상경해야 했다. 박헌영이 당을 재건한다고 나섰기에 모두 망라해서 파벌 없이 당을 조성하길 바랐다.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중순 경 나는 박헌영을 직접 찾아갔다. 조공의 조직부장인 이현상이 "무엇 때문에 박헌영을 만나려 하는가,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라"고 하였다. 벌써 인의 장막이었다. 나는 "지금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텐데 무슨 건방지고 철모르는 짓인가" 꾸짖으니, 이현상은 "동지가 이력만 믿고 너무 사람을 멸시한다"고 투덜거리더니 박헌영에게 안내했다. 나는 박헌영을 만나 "내가 이제야 상경한 것은 당 조직문제로 당신과 대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며 각파를 다 어우르도록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미군이 점령하니 미군과의 충돌을 피해가면서 당의 조직과 선전을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둘째로는 이른바 민족주의자들과 원만히 타협해서 정부를 빨리 세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4.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었을 때 나는 공산당, 한민당, 국민당 및 72개 단체의 대표 200여 명과 함께 협의회에 참석했다. 여운형, 백남훈, 정노식, 안재홍, 손재기, 김석황과 함께였다. 얼마 안 있어 공산당은 '독촉'을 탈퇴하여 이승만과 결별한다.

​이후 정파 당파 싸움이 연속되는 가운데 박헌영 일파의 독선을 비난하자 당에서 나에게 정권처분을 내렸다. 나는 분열과 분파로는 역량을 결집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김철수는 죽었다. 모든 정치 문제에서 발을 빼고 관여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5. 고향에 돌아와 나는 오직 농사에만 집중했다. 자연인 김철수는 살고 정치인 김철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있어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1948년 장덕수, 윤치영이 찾아와 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달라했다. 나는 껄껄 웃으면서 "나를 잊으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나는 내 자신의 정치적 은퇴가 사상의 전환이라든가 변절은 아니었기에 사회주의자로서의 내 입지에 대해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이 일생을 걸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민족 해방을 위하여 사선을 넘나드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해방된 조국은 나의 가족을 풍비박산으로 내몰았다. 내 가족들은 나의 흔적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만 것이다. 두 아우는 북으로, 큰 사위와 작은 사위는 한국전쟁 중에 죽었고, 이후 큰딸도 5남매 자녀를 두고 죽었으며, 손자들도 할애비인 내 이력으로 인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일용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실제로 내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내 몸을 던져 활동한 것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조국과 동포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 1급 감시 대상으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은 '반공시대'의 서막이 열리고 내 삶도 더욱 고행의 연속이었다. 아무 정치적 활동이 없었는데도 수복 뒤 우파들에게 집이 불태워졌고, 빨갱이로 몰려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했다. 다행이 현장 지휘관이 나를 알아보고 사지에서 벗어났지만 집이 불타면서 틈틈이 써오던 항일운동 수기 및 기록물 전체를 잃어버려야 했다.

16. 돌이켜보면 해방 전에는 감옥이요, 해방 뒤엔 지옥이었다. 은퇴한 사회주의자인 나는 농사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마저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든 식구가 떠난 1968년, 부모 묘소 곁에 흙집을 지어 안사람과 단 둘이 살았다. 흙집은 겨울에도 모기장을 치고 살아야 할 만큼 쥐들이 득실거렸지만, 이만하면 편안하다 해서 이안실(易安室)이라 부르며 죽는 날까지 그 곳에서 살기로 다짐했다.

​의재 허백련에게 대수리에 작은 토담집을 지었다고 하자 의제는 우물도 없는 집이 무슨 집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화광동진 화이불류(和光同塵 和以不流)라고 응수했다. 동쪽에 창문이 있어 해가 뜨면 햇빛에 먼지가 같이 돌아다니지만 합쳐지지 않는다는 뜻. 토담집에서도 나는 여유와 꿋꿋함으로 살고 싶었다. 우물을 파라고 허백련이 준 돈을 산지기 아들 학자금으로 집어주면서까지.

▲ 김철수 선생의 화두는 통일이었다. 붓글씨를 쓰고서도 한반도 모습에 통일(統一)이라 새긴 두인(頭印)을 항상 작품 위쪽에 찍었다. ⓒgoogle.com

17. 나의 화두는 죽는 날까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었다. 붓글씨를 써서 주변 이웃들에게 주면서 한반도 모습에 통일(統一)이라는 두인(頭印)을 화선지 위에 찍어주곤 했다. 통일을 가로막는 교육 현실을 걱정하여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주 말했다.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한 거여. 요새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반공 교육만 허니 머리가 잘 클 수가 있겠냐고. 원래 좌나 우가 같이 필요한 거여.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거지." "통일하려면 좌‧우익, 진보‧보수 가리지 말고 멀리 보고 강물 흐르듯이 함께 가야 혀."

내 수인번호가 1996번었기에 그때까지 살면서 통일을 봐야겠다는 희망을 걸었다. 임정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던 신익희가 대통령이 되길 바랐지만, 그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니 나는 하도 팍팍해서 남모르게 많이 울었다. 나는 더 의재 등 문우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밤을 지세우기도 하고 이웃들에게 글씨를 써주기도 하며 소일했다. 특히 범중엄의 '악양루기' 마지막 문장을 좋아했다.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後天下之樂而樂)' 천하가 근심하거든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하거든 그 뒤에 즐거워하라는 뜻을 담는다.

틈틈이 지리산과 설악산을 올랐고 87세 때는 대청봉을 밟았다. 눈 덮인 설악산을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올라가는 나를 공원 관리자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두 번이나 탈진하면서도 끝내 뜻을 이루었다. 또 울릉도에 진달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종달새 수 쌍과 진달래를 가지고 가기도 했다. 마침 울릉도 절벽에 있는 수령 2천 5백년의 늙은 향나무를 보고 일필휘지 '고고고고(古枯孤高)'라 한 적도 있다. 단종이 귀양살이하던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밤배를 타고 가다가 전복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내가 토담집 단 칸 방에 기거하는데도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주워 늘 고마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방문자에게 따뜻한 자리를 권하고 내 서화나 화초를 원하면 기꺼이 주곤 했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갈 물건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분단된 조국에서 부당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공이라는 걸 국시로 내걸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올 때마다 겨울의 칼바람은 추웠고 공안 감시는 뼛속까지 싸늘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나는 의연한 산을 생각하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머리 속에 그리며 기나긴 세월을 견디어 나갔다. 즐겨 돌 같이 살리라 했다.(석불능언시오사(石不能言是吾師))

​18. 나는 1986년 3월 16일, 내 나이 94세로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광주의 허백련 제자들은 무등산에 묻힌 의재의 묘 옆에 나를 안장하려고 했다지만, 나는 나 때문에 말없이 고생하며 살다 먼저 간 아내가 묻혀 있는 선산을 택했다. 내 5남매 중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 생전 나를 수발했던 둘째 딸 용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독립운동과 감옥생활로 20세가 되어서야 나를 처음 상면할 수 있었다. 내가 소개해서 결혼한 남편과는 고작 1년 6개월밖에 살지 못했고, 한국전쟁 때 사위는 사망한 것으로 알 뿐 시신도 확인하지 못했다. 큰딸 내외가 5남매를 남겨두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망하자 용화는 두말없이 조카들을 거두어 들였다. 가장 가까이서 나를 보살피고 안쓰럽게 살아서 늘 마음이 찡하다.

19. 내 인생의 절반이 되는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져왔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은 외세의 영향도 컸으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의 독립 불기정신이 그 만큼 외세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해방 정국에서 분단 현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고, 어떻게 찾은 해방인데 조국 분단이라니. 분단의 긴 시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남북이 갈리고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으니 우리 민족 모두에게 그런 참화가 더 있으랴 싶다. 서로를 증오하고 멸시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이 정권 연장 같은 정략적 생각을 하루 빨리 버리고 나아가 주변 강국들과의 이해관계를 풀어나가는데 매진하길 바랄 뿐이다.

20. 남북이산가족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생이별의 한을 안은 채 점점 이승을 등지고 있다. 나아가 해방 칠십년간 남북이 서로 증오를 키워오면서 민족적 자존은 계속 허물어지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겨눌 힘의 원천이 민족공동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많은 젊은이들이 연목구어로 허송세월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좋은 생각, 값진 설계, 우수 제품은 다 자존심의 산물이라지 않는가. 민족적 긍지를 이름이다.

***​

끝으로 먼저 북한 당국에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 이후 근 70년 동안 세계 최강국 미국의 경제 봉쇄에도 꿋꿋이 버텨낸 저력을 인정하고 치하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또 생각보다 빨리 변할 것인데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쉽게 패배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변화와 개방에 따른 내부 결속력 약화라든지 이에 대처 대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내부 결속과 대응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민족은 주변의 수많은 외침에도 굳건히 나라와 민족을 지켜낸 특유의 뚝심과 결속력이 있음을 자산 삼아 정치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바란다. 가까운 이해득실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를 보고 조국과 통일에 부합되는 일에는 손해도 감수한다는 생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것을 다 얻으려다가 죄다 다 잃게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남한 정부에도 말하고 싶은 것은 놀라울만한 경제 성장과 민주 역량을 배경으로 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자신감을 갖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판하는 저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보다 큰 틀로 세계의 눈과 귀를 끌어 모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내부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바로 보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고 싶다. 부당하고 정통성 없는 정부를 이어가기 위해 내건 반공 이념과 그에 순종한 언론, 학자들. 그렇게 요령 좋고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세상은 일제 치하에서도 있었고, 이를 격퇴하기 위한 독립운동 아니었나. 해방 후 정리하지 못한 일제 친일 세력과 이에 편승한 아류들, 쿠데타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기득권자들, 이런 구태는 하루 빨리 벗어던져야 할 것이다.

'춘풍추상'의 뼈를 깎는 정신으로 무장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부단한 참여의식이 절실하다고 본다. 지도자가 사심 없는 마음과 역량을 발휘하여 이를 독려하고 적극 받아들인다면 어려울 것도 없을 것이다. 남북 간에도 우위에 있는 한국 정부가 군사적 충돌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남북의 체제를 상호 인정하고 존중하면 남북경제협력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문화 교류와 시민단체 등의 남북 왕래 등으로 남북 상호 간 증오와 반목을 거두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서서히 해나가는 현실적인 통일 정책과 방안을 강구하기 바란다.

​주변 4대 강국 이른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국가에도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 먼저 우리 민족의 정치적 자결권을 존중해주기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강대국들이 즐겨 쓰는 세계 인류의 보편적 양심 아니겠는가. 그러니 좁은 이해관계를 떠나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너그러이 협조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특히 4대국도 인류 평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역할을 했다는 세계인들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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