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봄 외대 가면극연구회에서 마당극 「잠들지 않는 남도」를 공연할 때만 해도 내가 제주에서 30년 넘게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83부터 89학번까지 처음으로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삼은 마당극을 준비하면서 현기영 선생의 순이 삼촌과 이산하의 <한라산>을 읽었다. ‘삼촌’이 여성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해 겨울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차마 4.3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제주로 갈 수는 없었다. 사실 1988년 제1회 민족극한마당이 서울 종로 미리내 극장에서 개최되었을 때 제주 놀이패 한라산이 참가했었는데, 때마침 놀이패 한두레의 「한춤」 공연에 여념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인연인지 1992년 봄, 제주에 내려와 제전(제주전문대학)에 근무하면서 30년이란 세월이 후딱 지나고 말았다. 제주로 처음 내려오기 전날 한두레 선배들과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 소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내려가면 아무개, 아무개가 있을 거야.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을 만났다. 문무병, 김수열, 정공철 등등. 제주에서 극단이 생긴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문예를 통해 급박한 현실적인 문제에 온몸으로 부딪치기 시작한 극단은 아마도 1980년에 창단된 수눌음이 아닐까 싶다. 전두환 시절 공안당국의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고 있을 때 제주의 현안을 마당판에 그대로 옮기고자 했다는 것은 곧 맘먹고 싸워보겠다는 뜻 아니었겠는가? 1983년 강제로 해체되기는 했으나 1987년 8월 놀이패 한라산이 그 뒤를 이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는 대학 문예패의 전성기였다. 내가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는 탈패 우리문화연구회(우문연)와 풍물패 풀매달래가 활동하고 있었고, 옆집 제대에는 탈춤연구회와 탐라민속문화연구회(탐민), 농악대, 노래패 외에도 단과대학에 수리, 녹두, 불뫼, 터울림 등 마당극과 풍물을 위주로 문예활동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을 통해 앞서 말한 한라산이 창단되고, 이후 풍물패 신나락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역량이 모여 1994년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2016년 제주민예총으로 개칭)가 창립되는 토대의 일부가 되었다. 특히 제주 4.3은 1989년 「제주4·3연구소」가 창립되고 최초의 4·3 증언집인 <이제야 말햄수다>가 발간되면서 다시 한 번 재차 점화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또한 1992년 강요배 화백의 서사그림 「동백꽃 지다」 연작은 4.3에 대한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후 봇물 터지듯이 4.3에 관한 마당극이 연출되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에 놀이패 한라산이 있었다. 올해 제17회 4.3평화인권마당극제가 성황리에 끝났다.
쿵기닥, 쿵기닥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절로 쿵닥, 쿵닥거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난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술꾼이 어찌 누룩내음 풍기는 주막을 모른 채하고 지나가랴? 몇몇이 장구를 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많이 본 듯한데, 바다를 건너면서 바람에 날렸는지 빠진 것이 있는가하면 새로 붙은 것도 있었다. 그날 그들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우문연 지도교수가 되었다. 봉산탈춤이라면 나도 조금 출 줄 알지만 춤이 틀리다고 제멋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선배에서 후배로, 다시 새로운 이들에게 전수되면서 나름의 전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틀린 것을 그대로 둘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김선봉 선생님(1922~1997년)을 모시는 일이었다. 옆에 있는 제대 탈춤연구회 학생들도 끼어들어 1996년 더운 여름날 간만에 선생님을 모시고 쿵닥거렸다. 이듬해 봉산탈춤 공연을 하면서 팜플렛 뒤편에 ‘고 김선봉 선생님을 추모하며’라고 썼다. 그리고 학생들은 선생님 살아생전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제전과 제대 탈반 졸업생들이 찾아와 몇몇이 모여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모임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니 문득 두루나눔이 생각났다. 원래 두루나눔은 외대 탈반 졸업생 몇몇이 만든 단체 이름이다. 1985년 창단공연을 하고, 1998년 한일농촌우정문화 교류회에 참가하면서 그해 7월 18일부터 8월 11일까지 25일간 일본 지바현千葉縣 나루하마 소학교를 시작으로 아비꼬我孫子, 나루토成東, 군마현群馬縣, 나가노長野, 우에다上田, 요코하마橫濱,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등지에서 10여 차례 탈춤과 풍물을 선보였다. 당시 NHK 피디였던 하네다 상이 동행하면서 우리 공연을 촬영하여 「탈춤이 왔다」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주를 붙여 ‘제주 두루나눔’이라고 정했다.
‘두루나눔’은 말 그대로 두루두루 나누자는 뜻인데, 무엇을 두루 나누나? 두루 나누려면 가진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가진 것은 쥐뿔. 하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새파랗게 젊은 친구들이 탈춤이 좋아 추겠다는데 누가 말리랴. 그러던 차에 문무병 박사가 입춘굿놀이에 탈놀이가 있는데, 한 번 같이 해보겠느냐고 제안했다. 고 심우성 선생님을 따라 다닐 적에 민족예술연구지인 <서낭당>(제1집)에서 제주 입춘굿 탈놀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1914년 6월 6일 제주에서 연희된 입춘굿 탈놀이 장면을 찍은 것이다. 현재 중앙박물관에 입춘굿놀이 관련 사진 13장이 유리원판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제주목사를 역임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탐라록>에 입춘굿놀이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고, 일본인으로 동경제대 인류학과 교수였던 도리이 류조(烏居龍藏)가 쓴 <일본 주변 민족의 원시 종교(日周圍中国的民族の原史宗敎)>에 입춘굿 탈놀이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문제는 약간의 기록과 탈 사진 외에 전승자라든가 대본 등이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복원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문무병 박사는 ‘원리적 복원’이란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나는 ‘창조적 계승’이라고 덧붙였다. 입춘굿 탈놀이는 1988년 제27회 제주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강원호 선생의 대본과 연출로 오라동 주민들이 공연한 바 있고, 1997년과 그 이듬해에 김영돈 고증, 김윤수 자문에 한재준이 연출을 맡아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999년 민예총 제주도지회 주관으로 열린 입춘굿놀이에서 문무병 대본, 필자 연출로 탈놀이가 연희되었다. 필자는 「입춘굿 탈놀이의 전승과 과제」(제주학회, <제주도연구>제17집)라는 소논문에서 입춘굿 탈놀이가 무언극이며, 심방들이 연희한 것이 아니라 떠돌이 뜬패에 의해 연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굳이 무언극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대신 처음 시작할 때는 대사보다는 제주의 민요를 활용하고, 춤은 제주 심방들의 몸짓이나 봉산탈춤과 고성오광대, 그리고 일부 한국전통무용에서 차용했다. 민요를 구성지게 부르는 민요패 소리왓의 역할이 컸다. 탈은 처음에는 고성오광대 탈을 제작하던 이도열 선생에게 부탁드렸다. 이후 제주 민미협의 김영훈 선생이 만든 탈을 사용하고 있다.
2000년 입춘날(2월 13일), 봄이 드는 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다. 어설펐지만 진지했다. 이후 제주 두루나눔은 한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입춘날이 되면 관덕정 앞마당 또는 그 안에서 제주입춘굿놀이에 참가하여 탈놀이를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탈춤 보급과 공연에 나섰다. 대학에서 탈춤반이 점점 사라지는 마당에 우리는 견고하게 탈춤을 고집하기로 작정했다.
왜 굳이 탈춤을 추냐고 묻는다면, 그냥 씩 웃기만 할지 모른다. 말을 하자면 길고, 길면 지루하다. 그렇지 않아도 왜 탈을 쓰냐고, 벗자고, 다시 쓰자고, 탈춤에서 마당극으로 다시 마당굿으로 가야만 한다고 오랜 세월 말하고, 행했다. 그걸 다 말하자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분명한 것은 탈춤이 여전히 우리들에겐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그치지 않고 이어가다보면 언젠가 흐뭇해질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가끔씩 백구두를 신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제주 두루나눔 사람들은 생업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춤을 추기로 마음먹었다. 나누려면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필요하다면, 유의미하다면 우리가 경비를 각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저 탈꾼이니 탈꾼다워야 한다고 믿었다. 몇몇 분들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하고 고문 역할을 맡았다. 양성완, 홍성직, 김석윤 선생님 등이 우리와 함께 했다. 어떤 일이든 그러하지만 ‘지속성’이 중요하다. 생명은 이어짐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이다. 현재 제주 두루나눔의 입춘굿 탈놀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매년 조금씩 춤도 바꾸고, 대사를 고치기도 한다. 봉산탈춤을 보면 미얄이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면서 “전라도 제주 망막골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미얄이 제주 출신이라고 가정하고 새로운 탈춤 「춘경야사」를 만들기도 했다. 영감놀이 마당에서 할망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거듭 고민했다. 한 번은 상여가 나가기도 했고, 탈을 태워 상징적인 해원을 시도하기도 했고, 굿을 한 적도 있다. 지금은 죽음 대신 영감, 각시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처리했다. 옛날 제주의 상황을 견주어보면 오히려 이것이 실제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모른다. 또 어떻게 바뀔지. 언젠가는 봉산탈춤의 안초목安初木처럼 누군가가 좀더 짜임새 있는 입춘굿 탈놀이를 재창조할 지도 모른다. 기대한다. 2004년부터 제주 두루나눔 식구들은 매년 휴가철에 일본을 비롯하여 러시아 사할린,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지로 해외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사단법인 제주 한 문화네트워크를 통해 우리 문화를 세계에 두루 나누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다음에는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글쓴이 심규호 :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78학번), 동대학원 문학박사, 외대 가면극연구회 회원. 제주산업정보대학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교수 역임,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사) 제주 한문화 네트워크 이사장, 탈패 제주두루나눔 고문. (사)지구마을 평화학교 이사장.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ershouche688.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email protected]) 채 희 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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