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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민심, MB 서민 정책 잘못해 60년 만에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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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산 민심, MB 서민 정책 잘못해 60년 만에 최악" [고성국의 정치in]<74>'영원한 YS 사무처장' 김종순
'영원한 사무처장'으로 불리는 김종순 고문의 집은 부산 송도 해수욕장 초입에 있었다. 남포동에서 송도로 막 꺾어지는 곳 좁은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돌섬횟집이 김 고문의 집이었다. 1층은 횟집, 2층은 살림집인 이곳에 터를 잡은 지 50여 년, 돌섬횟집은 김 고문의 50년 정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고, 50년 횟집 운영으로 김 고문의 정치를 내조해온 부인 정양순 씨의 평생이 담겨있는 곳이었다. 아직 봄이 오기전이라 썰렁한 기운이 도는 2층 거실에서 김 고문과 마주 앉았다. 김 고문은 자꾸 전기히터를 내 쪽으로 돌려 주었다.

"처음 봤을 때 YS에 쏙 빠졌다…나는 YS의 정치적 노예"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 처장님 이라고 할까요?"
"현직으로 불러주시죠. 고문."
"김 고문님?"
"예. 제가 부산시지부 상임고문이니까"
"부산시지부 상임고문"
"네, 부산시지부 상임고문은 저 혼자뿐입니다. 다른 시도지부에는 국회의원 출신이 하지만 평당원으로서 상임고문은 전국에서 하나 뿐입니다."
"그러시구나, 어떻게?"
"국회의원을 안 했어도 한 길로, 정당을 한 번도 안 옮기고 YS 만나서 입당 을 했는데 그간 당명만 바뀌어 왔지. 한 번도 탈당한 사실이 없고, 또 한길만 걸어오고, 정 당에 큰일이 있으면 도맡아오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몇 년 되셨습니까?"
"제가 스물일곱 살 때(1959년) 김영삼 씨를 알아서 입당을 했습니다."
▲ 김종순 고문 ⓒ프레시안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몇 살 이었습니까? 두 분 나이 차이가?"
"나이는 다섯 살 차이고 경남고등학교는 4년 선배고 그렇습니다."
"아,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 서른두 살 때 고문님 스물일곱 살 젊은 청년시절에 만나셨군요. 그 후로 김영삼 대통령과 지금껏 함께하고 있습니까?"
"예. 정당에 입당한 동기가 그렇습니다. 그 어두운 자유당 시절에 내가 아미동 살 땐데 그때 야당의 이름 높은 허남춘 씨, 서민호 선생, 그 분들도 아미동 이웃에 살았어요. 어찌된 판국인지 잠옷 차림에 슬리퍼로 포승에 묶여서 경찰에 연행 당하는 거 보고 나도 정당을 해야 되겠다, 투쟁을 해야 되겠다. 그때부터 정치에 뜻을 가졌습니다."
"보통은 겁이 나서 도망 갈 텐데. 국회의원이 잡혀가는 거 보고 더 화가 나서 독재와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말할 것도 없지요. 그때 김영삼 씨가 거제도에서 초선을 하고 부산 서구에 와서 떨어졌어요."
"아, 김영삼 대통령도 국회의원에서 떨어진 적이 있습니까?"
"서구에 처음 왔을 때 떨어졌어요. 그때 서구에는 갑구와 을구가 있었는데 대신동 지역이 갑구이고, 이쪽(암남동) 지역이 을구인데 (YS가)갑구 지역에 나왔어요. 나는 을구였기 때문에 그 사람을 도와야겠다 싶어서 그 사람 몰래 암암리에 선거운동을 했어요. 그 후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신민당을 만들었을 때, YS가 부산시 당위원장을 했어요. 그때 신파, 구파가 있었는데 구파가 모두 신파 쪽으로 팔려가고 YS 혼자만 남아 있었어요."
"구파가 모두 신파로 전향했는데 YS 하나만 구파를 지켰군요."
"네. 그때 부산 서구 갑구 을구가 하나로 합해졌어요. 그 무렴 YS가 내가 경남고등학교 후배인 것을 알게 되었고, 제 선친의 고향이 거제도라는 것도 알게 돼서 나를 서구지구당 선전부장을 시켰어요. 제가 임무를 잘 완수해 내고 신임을 받았지요. 특히 YS는 선전 위주의 정치를 하니까"
"(YS)정치스타일이 그렇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YS의 신임을 받아 부위원장, 상임위원장으로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서울일이 바쁘니까 나를 지구당위원장 직무 대리를 시켰어요. '직무대리가 알아서 운영을 해라' 하면서 운영비만 보내줬죠. 서석재, 문정수가 우리 후배입니다. YS가 합당하고 나서 당대표가 됐을 때, 서석재는 조직국장으로 발탁이 되고 문정수는 총무국장으로 발탁이 됐습니다. 나는 서구에 계속 있었고. 나는 어쩌면 (YS의)정치적 노예였지요. YS 정치스타일이 통 크게 맡기는 건데 내가 워낙 조직 관리를 잘 하니까 '(종순이)너만 있으면, (나는)등록만 하면 된다' 내가 서구에서 나서 토성초등학교, 경남중·고등학교, 부산대학교, 그때는 부산대학교도 서구에 있었거든요. 모두 서구에서 나왔고 평생을 서구에서만 살았어요."
"서구는 김종순이 지키고 있으니 (후보)등록만 하면 된다?"
"그 덕을 본 사람이 서석재, 문정수 같은 사람들이지요. 두 사람은 (YS)곁에 있어야 됐거든요. 그 후에 부마항쟁이 나고 수배 당했는데 그때 전국을 안 돌아 다닌데가 없었어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지요."

YS의 정치노예였다는 대목에서 김고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YS와 함께 한 50년 정치역경이 주마등처럼 지나치는 듯 했다. 그러나 곧 다시 평온한 목소리로 대담을 계속했다.

"스물일곱 살 때 YS를 처음 봤잖아요? 첫인상이 어땠습니까?"
"첫인상이 여자가 좋아하는 얼굴같이 생겼어. 말 잘하고 학교 선배고, 야당 좋아하고 투쟁하는 거 좋아하고 그러다보니 (내가) 쏙 빠졌지요."
"근데 지금 사람들은 YS를 말도 잘 못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아. 안 그렇습니다. 말은 쫌 짧게, 대화를 짧게 합니다. 중요한 일 같은 거는 길게 이야기하죠. 그 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정치적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 있는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고. 그 양반은 돈을 몰랐습니다. 왜냐? YS 아버님께서 거제도에 최고 큰 어장을 갖고 있었어요. 멸치 어장에서 거둬들인 멸치를 들고 와서 나눠주고..."
"멸치어장이 옛날에는 돈이 컸습니까?"
"컸지요. 아들 정치하라고 다 내줬어요."
▲ 김종순 고문과 YS ⓒ프레시안

'YS멸치'얘기가 나온 김에 야당 정치인들에게 가장 아픈 대목을 짚었다.

"옛날에 야당에 월급이 있었습니까?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없었습니다. 내가 결혼을 늦게 했기 때문에 큰형님이 이발소를 운영하시면서 도움을 주셨지요."
"주변에서 도와주셨습니까?"
"내가 팔남매의 막내입니다. 5남 3녀인데 다 돌아가셨어요. 내가 11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내가 참 외롭게 컸습니다. 옛날에 판잣집에 살 때 이북에서 월남해 고무 모퉁이 테이블 세 개 놔두고 횟집을 했는데...하루는 YS가 김동영, 최형우 그리고 김광일을 우리 집으로 불렀어요. 김광일이 음식 먹을 때 기도를 주재했지요. 그 날 비가 왔어요. 근데 거기가 하꼬방 판잣집이니까 위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어요. 하필이면 빗방울이 회 접시에 떨어졌어요. 김동영이 말하길 '빗물이라도 안 새게 해야지. 이게 뭐냐!' 그러자 YS가 동영이를 나무라더군요. '이런 동지가 나를 대신해서 지역구를 하고 있는데. 자네는 있는 집에서 살아서 (이 어려움을)알겠냐? 종순이 심정을 알겠냐?' 그때만 해도 두 사람 호칭이 YS는 나를 보고 '종순아' 하고 나는 '형님'했지요. 대통령 되기 전까지 '형님, 동생' 으로 지냈지요. 물론 공석석상에서는 못했지만..."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때 야당같이 하시던 분들 다들 가난하게 살았잖습니까?"
"다 그랬어요."
"근데 YS는 돈을 모르니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실제로는 잘 몰랐죠?"
"잘 몰랐죠. 그때는 나이도 젊고 하니까 자기 인기로 다 되는 줄만 알았어요. 밑에 있는 사람만 죽을 지경이었죠."
"손명숙 여사가 (사람들을) 챙겨주려 애썼다고 하던데요?"
"예. 손명숙 여사는 평소에 날 보고 말하길 '아버님께서 연세가 많으시니까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 상복을 입겠다'고 그랬다고요. 막상 제 선친께서 돌아가셨는데요. 그때 김영삼 씨는 연금 중이어서 못 오고 손 여사더러 '당신 내려가라. 부산 내려가라' 했어요. 그래서 YS 여동생 남편과 손 여사가 왔어요. 출상하는 날, (손 여사가)상복 내놓으라고 상복 입겠다고... 그런데 그때가 (김)현철이가 결혼하기 일주일 전이에요. 일주일 후에 아들이 결혼하는데 혼주가 어찌 상복을 입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안 됩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극구 만류를 해 기도만 올렸습니다. 손 여사의 그 마음이 참 고마웠지요. 내가 부산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송기인 신부하고 둘이서 했어요."
"86년쯤 되겠네요?"
"네."

"YS에 의리 지키려 DJ의 국회의원 제안 거절"

"그런데 고문님은 왜 국회에 진출을 안하셨습니까?"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대중이 엄창록이라는 사람을 우리 집에 그것도 새벽 네 시에 보냈어요. 김대중 씨가 나를 국회의원 시키겠다고 보냈다는 거예요. 김대중 씨가 어떻게 나를 알고 그렇게 했겠나 보니까... 옛날에는 부산에서, 조방 앞에 30만, 40만 명씩 모여서 시국연설회를 했어요. 함석헌, 양일동, 장준하, 이철승, 김대중, 유진산... 이런 사람들이 연설을 많이 했어요. 내가 당시 선전국장이었어요. 시당 대변인이었지요. 그때 대중연설을 더러 하곤 했는데 그게 김대중씨 눈에 띠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시국강연회 할 때는 지도자들이 다 나오는데 내가 사회를 봤거든요. 사회 보기 전에 우선 한 삼십 분 정도 제가 연설을 합니다. 자화자찬이지만 내가 참 연설을 잘했어요. 참, 내가 중고등학교, 대학 때 농구선수를 했거든요. 그래서 동작도 빨랐어요. 당시 DJ가 나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보니 부산지역에 자기사람을 심어두기 위해서 앞서 말한 엄창록이란 사람을 보내서 내게 국회의원 자리를 주면서 회유를 하려 했던 거지요. 내가 '나는 평생을 한 길로만 가는 사람이다. 국회의원 아니라 국회의원 할아버지라도 싫다'고 돌려보냈지요. 언젠가 서울에서 행사를 마치고 4층으로 올라가는데 누가 내 등을 탁 쳐요. 돌아보니까 DJ예요. 날 보고 말하길, '여기 국제 바보 올라가네' 하더라고요. 딱 한 마디, 바보도 그냥 바보가 아니라 '국제바보'... 그때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네요."

▲ "DJ가 날 보고 말하길, '여기 국제 바보 올라가네' 하더라고요. 딱 한 마디, 바보도 그냥 바보가 아니라 '국제바보'... 그때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네요." ⓒ프레시안
"YS한테 의리 지킨다고요?"
"그렇지요. 그런데 여태껏 내가 YS한테는 이 이야기를 안 했어요. 사실 내가 YS한테 섭섭하긴 섭섭해. 마지막에 자기 지역구였던 (부산)서구를 3당 합당 뒤에 내게 넘겨줄 줄로만 믿었어요. 내심 '타이밍은 이때다' 마음속으로 준비 하고 있는데 YS가 마지막에 그러더라고. "내가 대통령 큰길로 나가기 위해서 3당 합당까지 했는데 내가 지역구를 양보를 해야 대통령의 큰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게 표가 나지 않겠나?" 안 될라 하니까 끝까지 안 되더라고 DJ가 제안했던 12대 때가 언제입니까, 12대 때가. 지금이 몇 대입니까?"
"요번이 19대입니다."
"하, 참"
"그래서 그때 서구에 곽정출 씨가 내려온 거군요?"
"그래요."
"곽정출 씨 선거도 도와주셨군요?"
"그럴 수 없었어요. 곽정출 측 인사들이 날더러 어떻게 할 거냐 묻더군요. 사실 (곽정출 씨는) 경남고등학교 선배입니다. 내가 우대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합당했으니까 이제는 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사건이 하나 생겼어요. YS가 서구를 민정계인 곽정출에게 물려주니까 그동안 배를 쫄쫄 굶고 고생하던, 야당 동지들이 반발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국회의원선거 끝나고 얼마 안 됐을 때거든요. 곽정출 측 운동원에게 맞아서 머리가 터지고 했던 사람들이 실밥도 채 빼기도 전에 합당해 놓고 지역구까지 양보한다고 하니까 시끄럽게 된 거지요. 이 사람들과 당원들이 차 한 대를 불러가지고 '쳐들어가자, 이게 뭐꼬?' 이렇게 된 겁니다. 내가 못 가게 그렇게나 말렸는데 YS에게 가 항의를 해야 된다며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때 제가 말하길, '서산에 해가 기울었는데 이 사람들아 이러면 다시 뜨나' 하면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사정을 하고, 출발하는 버스에 매달려서까지 만류를 했지만 결국 그 버스는 서울로 달려가고 말았지요. 이 사람들이 상도동에 가서는 온 집안에 흩어져 드러누워 버렸어요. YS가 이 모양을 보니 참 기가 차거든요. 나중에 기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석재하고 홍인길, 두 사람을 불러서 농성하는 사람들을 달래고 호텔에다 재우고 한 뒤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 보냈다 하더라고요. 이런 해프닝이 있고난 뒤에 한 사흘 지나니 YS에게서 전화가 오더군요, 올라오라고.

예전에 제가 서울 갈 때면 밤차를 타고 갔습니다. 서울역 앞에,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하 목욕탕이 있었어요. 거기서 목욕을 대충하고 상도동으로 갔는데 그날 비가 보슬보슬 왔어요. 1층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조깅을 마친 YS가 들어오더군요. YS는 비가 와도 조깅을 했어요. YS가 나를 한 번 보더니 2층으로 올라간 지 한 시간 쯤 됐을 거야. 그때서야 올라 오라더라고요. 올라가 보니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한동안 창문을 바라보고 서 있더니 큰 소리로 한 마디 하더군요. '니는 맨날 성격이 급해서 탈이야' 저는 한 마디도 안 하고 듣고만 있었지요. 그랬더니 한참 뒤에 '내가 통지할 테니 부산에 내려가 있어' 이러더라고요. 내가 '네' 짧게 대답하고 내려오는데 다른 방문 하나가 열리더니 거기서 손 여사가 나오더라고요. 손 여사는 늘 나를 보고 '부산아저씨'라고 불렀는데 '부산아저씨,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내가 차를 한 대 준비를 해 놨으니 이 차를 타고 설악산에 가서 한 일주일 있다가 동해바다로 해서 부산 내려가서 좀 쉬세요'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여사님, 이 기분에 지금 설악산 가게 생겼습니까?'하고는 곧장 부산으로 내려와 버렸지요.

내가 정치정화법 3차해금자였어요 YS가 4차해금자고. 서석재는 1차, 문정수는 2차 에(해금이)됐지요. 서석재는 그때 부산 5공실세 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허삼수한테 부탁을 해서 1차에 해금이 되어서 제가 맡아야 될 서구를 차지하게 됐고 국회로 나갔지요. 당시 한 선거구에 둘이 당선되는 중선거구여서 거저먹은 셈이지요. 그래서 서구를 서석재에게 뺏겼죠.

서석재가 나를 많이 견제 했어요. 내가 지구당을 하고 있는데 낯선 젊은이가 와서 지구당 책상 위에 턱하니 앉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당원들 다 있는 앞에서 '당신이 누구 길래 남의 사무실 책상위에 앉아 있냐?' 굉장히 야단을 쳤어요. 조금 있으니까 YS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와요. 알고 보니 그 친구가 YS의 매제였던 겁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왜 관여 하느냐, 당신 오빠(YS)가 나에게 맡겨놨단 말이야, 여기는 당신 것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YS 여동생한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어요. 그러고 전화를 딱 끊었는데 그 다음날 아홉 시에 YS 매제가 날 만나자고 전화를 했어요. 그 양반이 나더러 '어제는 왜 그랬냐?' 하길래 '왜 그러긴 왜 그래. 이건 당신집도 아니고, 내가 김영삼 씨 지역구를 관리하고 있는데 조직부장 책상 위에 걸터앉는 게 잘한 거요?' 그러니까 그 양반이 '아니,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이딴 게 다 있노?' 하면서 웃통을 벗고 난리가 난 거예요.

내가 그렇게 서구 조직을 관리하면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등록을 안 하고 할 수 있는 게 산악회더란 말이에요. 김영삼씨 호가 거산(巨山) 아닙니까? 이름이 얼마나 좋습니까. 큰 산... 그래서 (산악회 이름을)부산거산산악회라고 지었어요. 어느 날 등반을 하고 있는데 죽은 김동영이 전화를 했어요. 여기 비행장인데, 서울로 올라가는데 YS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당시 거산산악회는 등산복 뒤에 '거산산악회'라고 크게 써 부치고 다녔는데 비행기 떠날 시간에 맞추려니까 (내가)집에 가서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등산복을 입은 채로 바로 택시를 타고 갔더니 (YS가)날 보고 '종순아, 니 뒤로 한 번 돌아 봐라. 거산산악회가 뭐고?' 이래요. 그래 내가 그랬죠. '산악회는 법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산산악회를 옛날 동지들과 산에 다니면서 (YS가)정치 활동 재개 할 때까지 조직 보존을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고요.

민주산악회 조직은 누가 뭐라 해도 거산산악회가 모체이자 원동력입니다. YS는 알아요. 거산산악회를 보고 가서 민주산악회를 만든 거예요. 민주산악회 초대 부산지부장이 내게 와서는 '부산조직이 거산산악회를 조직해서 산에 다닌다는데 어떤 일을 하냐'고 묻길래 '우리는 산에 가면 빨간 리본에다 민주회복이라 써서 소나무에 막 걸어 놓고 다닌다. 회원들이... 그러면 경찰관들이 정보를 알고 무전기를 매고 몇 사람들이 와서는 그거 떼러 다니고'라고 설명해줬어요. 우리 거산산악회회원 중에 2명이 국회의원이 됐어요."

"김영삼이 죽을 때까지 민주 회복될때까지 맨 앞에 서겠다"

70~80년대 3김시대를 살아 낸 YS의 최측인 김종순이었다. 그 시절 얘기가 끝이 없을 것 같았고 이야기 하나 하나가 다 역사의 기록이었다. 별다른 질문 없이 그가 풀어내는 얘기를 계속 들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인터뷰였다.

▲ 젊은 시절 김종순 고문 ⓒ프레시안
"좀 더 얘기를 해 주시죠. 당시 상황을."

"어느 날 검찰에서 우리 집에 왔어요. 그때 내가 없었는데 검사가 몇 호실로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갔더니 검사가 하루 종일 말도 한마디 안하고 앉혀 놓는 거야. 지는 다섯 시에 퇴근하니까 네 시 반쯤 와서는 몇 마디 묻더라고, 검사가 '만약에 당신이 정치정화법에서 풀려나면 또 정치를 하겠느냐' 그러는데 내가 '김영삼 씨를 비롯한 지도자들 죽을 때까지, 또 민주회복이 될 때까지 언제나 맨 앞에 서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도장 찍으라고 하데요, 손도장. 나중에 다른 사람이 다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검사가 그러더군요. '당신 발톱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고. 한 마디 하고는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데요. 그 뒤에 들으니 그 서석재가 (내가)돌아다니면 방해가 되기 때문에 겁 줄려고 불러서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제일 괴로웠던 때가 선거할 때입니다. (YS가)부산 내려올라치면 서울에서 (YS가 탄)비행기가 뜨기 직전에 경찰에서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는 지리산, 거창, 함양 구경시킨다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러다가 다시 YS가 탄 김포행 비행기가 공항에서 떴다 하면 집에 보내주고...한두 번 당한 게 아니라 늘 그랬습니다.

옛날에 도망 다녔을 때 하루는 밀짚모자 쓰고 대나무에 돌이랑 줄을 달아놓고 낚싯대처럼 해서 낚시꾼이라고 가장하고 전라북도를 가고 있었어요. 대둔산이더라고요. 그런데 겨울에 산에 사람이, 그것도 낚싯대를 들고 올 턱이 있습니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더라고.. 순간적으로 내가 정공법으로 나갔지요. 신분증을 보여주니 부산서부지구당 김영삼위원장직무대리 김종순이라고 돼 있거든요. 단번에 그 경찰관이 갖고 있는 수배자 명단에 걸려들었지요. 내가 수중에 있던 이십만 원을, 그때 돈으로 이십만 원이면 컸어요. 제가 들고 간 돈의 3분의 2였는데... 누님이 주신 돈 가운데 일부를 손에 쥐어 줬죠. '본 사람이 하늘, 산, 땅, 당신 그리고 나 다섯뿐이란 말이요. 누가 알겠소. 당신이 나를 안 본 걸로 하면 될 거 아니요? 날 좀 봐주라. 나 도망 다닌다'

시골사람이 돈 십만 원 벌기가 쉽습니까? 그렇게 해서 풀려나 가던 길로 가는데 아, 이 사람이 다시 오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가니까 그 경찰관이 '내가 지금 파출소까지 가는데 안전한 곳까지 수행해주겠다' 이러더라고. 가만히 보니 '이렇게 해놓고 날 끄집어 내리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그러나 어쩔 수 없지요. '운명에 맡겨라'하는 심정으로 경찰차를 타고 갔어요. 한참을 가다가 시골파출소 앞을 살짝 지나치더니 '안녕히 가십시오' 하더라고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92년에 마침내 YS가 대통령이 됐잖아요. 그날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바다를 바라보면서...요 앞이 그때는 매립이 안 됐을 때였어요. 저쪽 길 앞이 바로 바다거든요. 거기서 한바탕 울었지요.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부산 민심, 60년만에 최악"

인터뷰하는 내내 김고문은 책상위에 쌓인 자료와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내게도 보여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중 눈에 띠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언제입니까?"
"(YS가)대통령하고 난 뒤죠."
"대통령하고 난 다음이에요? 그럼 최근 사진이네요?"
"부산에서 찍은 것 같은데요. 아내가 나 몰래 기사 나오는 건 늘 스크랩을 해놔요."
"부산은 원래 야도(野都)였죠?"
"야도였죠. 부산은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 정권 뒤로 제일 큰 고비가 지금입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국회의원들이 가만 보면 자기 일하는 스텝만 밟지, 공익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요."
"옛날 정치인하고 요즘 국회의원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정당을 오래 하다 보니 자꾸 젊은 세대를 따라 가거든요. 그러면서 뭐가 옳은가를 계속 살펴보거든요. 젊은 사람들을 국회의원을 시킨다고 해서 전부 다 100퍼센트 잘하는 건 아니지만...이제 국민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 내세워서 해봐야 뻔하기 때문에 싫증을 느끼는 것 같습디다.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볼 때, 지금 지탄을 받고 있는 게 정치경험이 없기 때문에, 경영인으로서 경영을 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정권을 찾아온 것은) 자랑스럽고 잘한 일이고요. 그런데 경제적으로 봤을 때 서민경제에 대해 눈을 안 뜨는 거 같아요, 서민경제에."

▲ "박근혜의 상대 후보에 따라 다르지요.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지금 저쪽에서 말하는 대통령 후보감으로서는 박근혜 씨를 못 이긴다고 생각해요." ⓒ프레시안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해, 20년 만에 찾아 온 선거의 해다. YS의 평생 동지인 그는 대통령선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올해 대통령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습니까?"
"박근혜의 상대 후보에 따라 다르지요.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지금 저쪽에서 말하는 대통령 후보감으로서는 박근혜 씨를 못 이긴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박근혜 씨는 꾸준히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아왔어요, 꾸준히. 박근혜 씨는, 내가 그쪽 아버지한테 당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고 딸은 딸이지요. 아버지가 나쁜 짓 했다고 딸이 대신 벌을 받아서는 안 되거든요. 박근혜 씨는 내가 봤을 때 첫째,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아버지가 하는 정치를 봐온 데다 육 여사 돌아가시고 난 다음 얼마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 했지요. 그 다음에 정치를 하면서는 국민한테 쭉 정직함을 보였죠. 그런 면에서 박근혜 씨가 나는 좋아요. 잘할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원희룡 씨, 공부 잘했던 사람. 크게 흠집도 없고 젊은이들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에요. 앞날이 상당히 밝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안철수 씨는 국민에게서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인상이에요. 그러나 국회의원도 아니고, 정당 경험도 없고 해서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이 겉보고 인기 좋다고 되는 게 아니고 선거 막바지에 가면 표가 거의 없습니다."
"문재인은 어떻습니까?"
"노무현 비서한 사람?"
"네."
"그 사람은 국민들에게 호감을 받을 수 있는 인상이에요. 참 어질고 안철수 모양으로 (안철수는 안 웃지만)웃는 거 보면 인상이 상당히 호감을 얻을 수 있어요. 노무현 실장 했다는 게 최고 경력인데....내가 볼 때에는 정치인으로서 여당을 하거나 야당을 하거나 간에 좀 이렇게 딱딱 끊고 맺고 그런 게 있어야 되거든.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게 없어요. 하는 거 보니까."
"김두관은 어떻습니까? 경남지사, 인상이 어떻습니까?"
"덕상입니다. 그 사람 얼굴은 덕상입니다. 뭐 남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머리로 정책 대결하는 건데 덕상이라고. 내가 이렇게 딱 보고 예측하면 거의 다 맞습니다. 딱 보고 결과를 보면 대부분 맞습니다."
"이번에 부산에서 새누리당이 얼마나 떨어질 거 같습니까, 부산에서?"
"한...세 개? 잘못하면 세 개 더 떨어집니다. 내가 볼 때에는 세 개에서 다섯 개 정도...? 내가 부산에서 정치 시작하고서는 최악입니다, 최악."
"민심이 왜 이렇게 상했습니까?"
"민심이 상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서민경제 정책을 잘못 한데다가 그걸 이용한 야당의 선전 전략이 겹쳤어요."
"민심을 다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난국입니다. 왜 난국이냐 국회의원 선거 두 달도 채 못 남았는데 (정당들이)공천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은 정치역사상 없는 일입니다. 정치 혼란이 오면 사회혼란이 오게 되고 그 뒤로 경제 혼란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지금 제일 급한 게 여야가 공천을 빨리 마치고 선거 태세에 들어가서 공정한 선거를 해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겁니다. 여야가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해요. 우리나라 노조들이 생각을 달리 해야 합니다. 나는 보수이기는 해도 진보적인 정책 가운데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우리나라 노조들이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어 놨어요. 이번에 한국노총 전체가 (민주통합당과) 합당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에요. 모두 노총을 탈퇴하고 그 정당에 입당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거지만 노총은 정당이 아니란 말이에요. 합당 형식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단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정치 질서가 안 잡히는 것은 대통령도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눈여겨보는 후배 정치인이 있습니까?
"지금 부산에 젊은 신인들 중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요. 일단 자기가 지나온 과거가 깨끗한 사람. 공직을 했던 사업을 했던 간에 깨끗한 사람이 필요해요. 첫째가 국민들 앞에 딱 서면 덕 있게 보이고 호감을 줄 수 있는 인상이어야 합니다. 정치인은 그렇게 태어나야 됩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제일 빨리 성공합니다. 김영삼 씨가 그런 인상이죠. DJ 보세요. 모진 투쟁이야 YS보다 많이 했다고 하지만은 그건 당시 여당에서 그렇게 만들어 준 거고...실제로 강하기로 따지면 YS입니다. 국회의원직 제명당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또 있습니까?"
"제명당한 사람은 YS가 유일하죠."
"그 다음에 YS 단식 투쟁하는 거 봤어요? 내가 (단식)21일째 가보니까 비쩍 말라있는데 참 못 보겠더라고요. 그런 투쟁을 김영삼이 잘하고 또 강합니다. 정말로 강합니다. 그리고 누구 앞이든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은 굽히지 않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같이 못난 사람은 평생을 두고 따라 갑니다."

▲ 고성국 박사와 김종순 고문 ⓒ프레시안

"YS, 다른사람은 모르는데 나한테만은 말로 때우더라. 허허"

인터뷰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을 넘고 있었다, 항암 치료 중인 팔순의 김 고문에게는 상당한 무리가 될 수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아주 안 좋아요. 글이 이렇게 커도 잘 안 보여요."
"한 쪽 눈은 언제 실명하셨어요?"
"옛날에 다대포와 장림에서 선거유세를 할 때였는데요. 내가 먼저 연설을 하면서 사람을 모아서 YS를 소개해 놓고 다음 장소에 가서 또 연설을 하고 있으면 YS가 그곳으로 와서 유세를 하고 그랬거든요. 하루는 연설을 하는데 갑자기 주먹만한 돌이 날아와서는... 눈을 이렇게 만들었지요. 내가 이렇게나 오래 정치를 하면서도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은 게 한이 돼서인지 담배도 못 끊지만, 예전에는 또 술을 엄청나게 먹었어요. 그래서 대장암에 걸려서 대장 70%를 끊어냈지요. 하나뿐인 아들, 우리 홍일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옛날에는 하도 자주 경찰에 불려가 맞아서 허리 협착증인가 뭔가도 있고 누워 있다가 일어날 때나 걷는 데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지요."
"옛날에 같이 정치하시던 분들도 다 가시네요?"
"그렇지요."
"역시 인생무상, 이런 것을 느끼십니까?"
"인생무상!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팔남매인데요. 형님 넷 누이 셋에다 아이들도 집안에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남을 속이거나 나쁜 짓을 해서 파출소를 간 일이 없습니다. 언젠가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일인데요. 서울의 한 모임에서 YS가 나를 가리키며 말하길 '오늘 이 자리에는 참으로 고생하는 부산의 김종순 동지도 왔고....' 뭐 그러는데 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YS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말로 다 때웁니다. 내한테는(웃음)..."
"동교동이 라이벌이잖아요. 당시 라이벌 중에 '참 저 사람은 선수다' 인정하는 사람은?"
"그것은 과거지요."
"DJ 쪽은 김상현, 권노갑..."
"김상현은 뭐 DJ가 미국 간 다음에 YS에게 붙기도 하고... 그럼 못써요."
"가끔 상도동과 동교동 모임이 있잖아요, 일 년에 한두 번."
"예. 민주동지회 옛날하고 다르게 이제는 함께 옛날을 이야기하고 그러지요."
"요새는 그런 맛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런 거 같아요."
"요즘 정치인은 집 문도 안 열어 놓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요. 정치가 지금 현재 퇴보돼가는 기분이에요. 그러나 신선한 사람들 보면 참신한 맛이 나요. 누구든 하려고 하면 들어와 가지고, 정식으로 (코스를)밟아야 돼요. 국회의원 출마해서 사년 동안 해보고 멋지게 국민 앞에서 승부를 펼치는 거지요. 져도 깨끗하게, 멋있게 사나이답게... 이기면 더 좋고 지면 또 어떻노? 그런 정치인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는 꼭 정계에 진출하십시오."

두 시간 반 동안 인터뷰가 계속 됐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김 고문은 힘들어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필자에게 정계진출을 여러 번 강권하는 바람에 인터뷰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역사의 뒤안길을 묵묵히 걸어 온 김 고문의 애환이 서려 있는 돌섬횟집 2층 집을 나서자 눅눅한 찬바람에 짠 바닷내가 훅 덮쳐왔다. 이내 몸이 후줄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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