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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최장집의 한반도 평화체제 논쟁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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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최장집의 한반도 평화체제 논쟁에 부쳐 [진보논평] 평화 만들기, 한반도 넘어서는 시야 필요하다
한계

지금 세계는 거대한 격변의 시기를 맞고 있다. 세계는 지금 지난 20세기 초반 세계를 뒤흔든 '전쟁과 혁명' 시대, 그리고 그 뒤 1968년 다시 세계를 휩쓴 '68혁명(운동)'에 이어 그와 같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격변이 다시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1989년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1980년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합이 낳은 세계가 마침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급변도 기본적으로는 그 연속선상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백낙청-최장집' 선생(이하 존칭 생략)의 논쟁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전에, 일단 시의적절하며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백낙청-최장집' 논쟁은 이제까지 한반도에 들씌워 있는 이른바 '53년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논의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백낙청은 최종적으로 '통일한반도'를 통해서만, 최장집은 남북이 각각의 국가를 유지하는 속에서 '평화'를 달성하는 형태여야 '53년 체제'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백낙청은 '통일한반도'가 민족주의 차원이나 1953년 이전으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남북이 각각 별개의 국가를 유지하는 한 '평화'는 요원하고, 그것이야말로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바라고 최장집을 반박한다. 반면 최장집은 '통일한반도'를 현실의 목표로 하는 것은, 아마 백낙청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가능한 '평화'조차 이루게 어렵게 할 뿐이며, 따라서 '통일한반도' 여하는 후 세대의 과제로 넘겨야 한다고 백낙청을 비판한다. 이 차이는 쉽게 화해하기 어려운 차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53년 체제'를 극복하는 문제는, '53년 체제'의 형성이 그러했듯이, 남북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통일'이든, '평화'든 결국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제국주의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모두 실현되기 어렵다.

물론, 백낙청-최장집 또한 이를 당연히 모르지 않는다. 아니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속에서 각각 '통일'과 '평화'를 말하고 있으며, 그게 바로 제국주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백낙청, 최장집이 말하는 제국주의 문제는 그것을 단지 '외세'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려 왔다. 이 같은 현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으로까지 여겨져 왔으며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외세'는 자본주의 이전의 양상과는 전혀 다르다. 오늘의 제국주의는 단순한 '외세'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세'는 자본주의 이전의 그것과는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제국주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제국이 사라지면 그에 따라 약소국 문제도 해소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알다시피 세계체제를 이루고 있다. 자본주의의 특성인 '불균등결합발전' 때문에 비록 제국의 서열이 바뀔 수는 있지만, 제국주의 현상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으며, 최근 눈앞에서 펼쳐지고 미·중 갈등과 대립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정치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 그 원인이다. 이른바 '북핵' 문제 문제가 발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역내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경쟁의 차원과 양상이 달라질 뿐이다. 따라서 '통일'이든, '평화'든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또 하나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는 국내 계급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최장집이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백낙청이 또한 그를 극구 부인하는 이유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약소국 민족주의, 즉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인정한 것도 그 일환이다. 오늘의 남북은, 비록 제국주의 현상 때문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민족해방이 당면 과제가 되고 있지는 않다. 자본주의 극복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다. 다시 말해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가 직접적 과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통일'이든 '평화'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치지어야만 비로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통일'이나 '평화'는 무엇이 옳든 반쪽짜리 일 수밖에 없다.

주목

한편 '백낙청-최장집' 논쟁에서 주목할 부분은 지난 '촛불운동'과 현 한반도 정세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지점이다. 그 둘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느냐, 다시 말해 '촛불운동'이 현 한반도 정세를 이끌어 내는 데 영향을 끼쳤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부분에서는 백낙청이 옳다. 다만 백낙청의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촛불운동'을 빼고는 현 정세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담아 낼 수 없다. 문재인은 말할 것도 없고 트럼프나 김정은도 '촛불운동'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제 미국이라도 한국 시민사회가 동의하지 않는 무력행사를 감행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럴 경우 미국은 한국 노동자민중의 격렬한 저항을 각오해야만 하며, 이는 곧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악화로 곧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으로서도 한국 노동자민중의 도움 없이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철회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핵·미사일'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결코 될 수 없다. '촛불운동'이 김정은의 결심-결단을 이끌어 내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더욱 '촛불운동'을 거스를 수 없다. 아니 문재인 정부의 유일한 지렛대는 '촛불운동' 밖에 없다. 그런데도 최장집이 이 둘을 연결시키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촛불운동'이 현 한반도 정세를 이끌어 낸 결정적 동력, 즉 이른바 스모킹 건이 되었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이 전면적으로 가시화되고 있지 않는 현실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알다시피 현재 '촛불운동'은 문재인 정부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대로 말하면 시민사회의 독자적인 운동이 미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통일'이든 '평화'든 무엇이든 간에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행동과 정치가 없이는 모두 신기루에 불과하다. 설령 모종의 '통일'이나 '평화'의 외양을 띤다하더라도 그것은 왜곡된 형태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즉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를 개선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행동과 정치를 조직할 정치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을 다시 기대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재 약점이 되고 있다.

또한 '촛불운동' 자체가 갖는 한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지난 '촛불운동'은 지배세력사이의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는 데 머물렀다. 말하자면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맥락에서의 문제제기나 주장과 요구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이는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는 힘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문제는 '통일'이든 평화'든,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이 또 다른 차원의 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측면을 보지 않거나 배격하고서는 급변하고 있는 정세를 따라잡기 어렵다.

진전

'백낙청-최장집' 논쟁은 또 다른 논쟁으로 더욱 진전되어야 한다. 논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하나는 '통일'이냐 '평화'냐를 말하기 전에, 아니 그것들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문제를 그것들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와, 또 하나는 '통일'이든 '평화'든 누가, 즉 어느 세력이 주도할 것인가를 또한 전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통일'이든 '평화'든 이 두 가지 문제를 뺀 상태에서의 논의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일부에서 제국주의 현상 때문에 한반도 평화체제는 불가능하거나 모종의 평화체제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항구적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행동과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만 그렇다.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를 말하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때문에 한반도 평화체제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실제 현실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맥락에서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럴 경우에만 노동자민중이 정치적 구경꾼에 머무르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

보다시피 지금 세계자본주의는 극심한 불안정성에 휩싸여 있다. 미·중 무역 전쟁이 어떻게 펼쳐질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설령 일정한 타협점을 찾는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미·중 무역 전쟁을 불러일으킨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세계자본주의가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는 지금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대전환을 이끌어 내는 계기로 다가 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절대적 패권을 누려왔던 미국의 힘은 약화되고 있다. 중국이 급부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그만큼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제국주의조차도 시나리오를 갖고 있지 않다. 갖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갖기 어려운 정세에 직면해 있다. 바로 이 같은 조건에서 어쨌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대전환의 서막이 올랐다.

물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대전환이 꼭 긍정적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그대로 지속되기는 이제 쉽지 않다. 북도 '핵·미사일'을 지렛대로 다시 쓰기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그런 점에서 보장은 어렵지만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세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적극적, 능동적 개입과 역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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