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언행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자신이 할 바는 하지 않으면서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압박만 높여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이와 같은 진단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일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한국 정부와 북한의 철도·도로 현대화 사업이 국제사회 대북 압박 캠페인과 병행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남북관계 개선은 비핵화와 별개로 진행될 수 없다"고 답했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철도·도로 연결은 올해 안에 착공식을 하는 게 목표"라고 밝힌 것에 대해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피력한 셈이다.
또한 21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남북연락사무소의 제재 위반 가능성을 묻는 한국 언론의 질문에 "남북관계는 비핵화 진전과 반드시 속도를 맞춰서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특히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가 미국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익명의 미국 관리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8월 10일에는 '한국 정부가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 인도주의 지원을 집행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미국의 소리>의 질의에 "성급히 (북한에 대한) 경제적·외교적 압박을 덜어주는 것은 비핵화 목표 달성 가능성을 약화시킨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미국이 비핵화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한국의 손과 발을 묶어놓겠다는 심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 납득하기 힘든 행태는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통해서 나오고 있다. 그는 최근 언론을 통해 "1년 내 비핵화는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동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 대통령은 '비핵화가 빨리 될수록 한국과 일본의 원조, 외국의 투자 등 개방의 혜택도 더 빨리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북한 비핵화를 1년 내에 해버리자'고 했고, 김정은은 '예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볼턴이 자신의 구미에 맞게 한미 정상회담 내용을 마사지를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볼턴의 언급은 "비핵화는 경제적 흥정물이 아니다"라는 북한의 일관된 입장과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문 대통령은 비핵화를 위해서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및 북미관계 정상화의 필요성도 줄곧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턴은 미국이 할 바는 쏙 빼놓고 한국과 일본의 원조 및 외국의 투자만 언급했다.
볼턴이 한미 정상회담 발언 내용을 무단으로 공개하는 것도 모자라 자의적으로 짜깁기까지 했다면, 이건 보통 외교적 결례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아니고 두 번에 걸쳐 이런 발언을 내놓은 것을 보면 악의적인 의도마저 남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핵화를 이유로 남북관계에 제동을 걸고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 책임의 일부를 문재인 정부로 돌리겠다는 심사가 아니면 납득할 수 없는 언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트럼프 행정부의 행태는 올해 상반기와 비교할 때 뚜렷이 대비된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의 한미군사훈련 연기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대화와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참가에도 환영의 뜻을 나타냈었다. 특히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에 문 대통령의 역할에 사의를 표명했고, "종전은 축복"이고도 했었다.
그런데 하반기 들어서는 또다시 '최대의 압박' 모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종전선언을 뒤로 미루려고 하고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신뢰구축을 통한 비핵화'를 추구하기로 한 북미 공동성명의 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미국이 변심한 것인지, 변심했다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또다시 미국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방기한다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마이크 폼페이오의 방북 및 그 성과 여부는 미국의 진정성을 가늠할 '바로미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미국이 보여줘야 할 것은 '최대의 압박'이 아니라 '최대의 신뢰'이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협상 개시 선언은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고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관계정상화,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대북 제재 해제는 비핵화 프로세스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드는 유력한 방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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