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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혁신'이 말장난에서 벗어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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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혁신'이 말장난에서 벗어나려면… [박동천 칼럼] 마음을 열지 못하면 진보가 아니다
지난 주에 이 칼럼을 통해 강기갑,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을 비판했다. 나는 진보당을 혁신하려고 한 그들의 노력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이 취한 방법에는 굉장히 많은 허점들이 숭숭 뚫려 있다고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한국 정치의 현재적 특성상, 어쨌든 그들의 뒤집기가 성공만 할 수 있었다면 저런 허점들은 묵과하고 넘길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 의견도 표명하지 않고 몇 달 동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모든 노력들이 좌절로 끝났다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지난주에, 이 문제에 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뒤집기 시도가 실패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전략적 고려가 빠진 막무가내식 사유가 결국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언이었다.

강노심유가 탈당을 하든지, 신당을 만들든지, 민주당에 들어가든지, 당에 남아 혁신을 추구하든지, 나는 여전히 당권파보다는 그들이 꿈꾸는 진보 이념을 존중하고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와는 별도로 나는 그들이 무슨 진보 이념을 어떻게 추구해서 어떤 결과를 달성하고자 하는지에 관해 의심이 적지 않다. 내가 그들에 대해 가지는 의심은 진보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한국 정치세력의 한 축이 이 나라 유권자들의 맘속에서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진보개혁 세력이 좋은 뜻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아마도 유권자 과반수가 찬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집권해서 좋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긍정하는 비율은 현재의 시점에서 30% 주변에 그칠 것이다. 나는 통합진보당을 혁신하기 위한 강노심유의 노력이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는 진보적 기획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지난주에 썼듯이, 무엇보다 생각이 헝클어져 있었기 때문이고, 생각이 헝클어진 까닭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빼먹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해, 지난주에 쓴 내용 중에 두 가지만 추려 다시 따져 본다.

우선 대리투표는 절대악이 아닌데 강노심유는 마치 그것이 절대악인 것처럼 대응했다. 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절대악이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것을 놔두는 한 다른 모든 선한 노력이 무산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무슨 수단을 써도 정당화되는 종류의 악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대리투표는 경우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것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선한 노력이 모두 무산될 리가 없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에도 금도가 있어야 하는 일에 해당한다.

거동이 불편해서 투표장에 갈 수 없는 노인이 투표를 하고 싶을 때, 대리투표가 허용된다면 유권자의 의사 표시가 용이할 것이다. 선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대리투표를 허용할 이유는 사실 적지 않다. 투표소가 너무 멀어 투표하기 어려운 재외국민들의 경우, 대리인을 지정해서 투표용지에 기표할 수 있다면 투표의 편의가 현저하게 증가할 것이다. 이처럼 대리투표는 선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지 않는 까닭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무게가 선용될 가능성의 무게보다 중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투표를 전면적으로 허용할 수는 없다. 단, 부분적으로는 이미 공직선거법에서부터 허용하고 있는 셈과 같다. 부재자투표에서 허용되는 우편투표의 경우 기표를 직접 했는지 여부는 따지지 않고, 적법절차에 따랐으면 직접 기표한 것으로 간주한다. 선상투표에서 허용되는 팩스 투표 역시 적법절차에 따랐으면 본인이 직접 기표한 것으로 간주한다. 모바일 투표, 인터넷 투표의 경우 역시 주민등록번호나 인증번호가 입력되는 것으로 본인이 인증되었다고 간주하는 양해 위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실제로 본인이 자기 손가락으로 번호를 입력하고 기표를 했다고 확인한 위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대리투표가 선용될 가능성을 보면 투표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하다. 대리투표가 악용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막아야 할 일이다. 선용될 가능성을 무겁게 볼지 악용될 우려를 무겁게 볼지는 유권자들의 정치적/도덕적 개명도와 여러 가지 통신기술상의 여건 등에 따라 판단이 갈릴 수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해, 대리투표가 선인지 악인지는 절대적인 지평에서 결정될 사항이 아니라, 현실의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할 일인 것이다.
▲ 통합진보당 혁신모임의 유시민 조준호 심상정 노회찬. ⓒ연합뉴스
강노심유는 통진당 경선과정에서 일어난 대리투표를 악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판단이 현실의 여건과 맥락 안에서 고려한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지평에서만 고려한 결과였다. 이를 악으로 판단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에 대한 답이 자동적으로 내려져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들이라는 것은, 투표를 대리한 사람과 대리 당한 사람들은 처벌의 대상이 아닌가, 대리투표된 표만 무효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대리투표가 있었던 선거를 무효화할 것인가, 등의 문제이다. 강노심유는 이런 문제들을 일일이 가려내기 어렵다는 지극히 편의주의적이고 전제적인 발상에 매몰되어 경선 전체를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는데, 대리투표가 절대악은 아니라는 점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함정이다.

두 번째로 지적해야 할 점은 대리투표에 대해 강노심유가 대응한 방식이 이 문제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턴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못마땅한 사건이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절대악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마치 다른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다는 듯이 접근하는 태도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가리키기 위해 단일주제정치(single interest politics)라는 용어가 정착되어 있고, 시민사회 운동권에서는 그 속성상 단일주제정치를 불식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답습해서는 안 될 행태라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 전체사회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들은 단일주제정치에 빠지면 안 되고 오히려 온갖 운동권들의 단일주체정치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책무를 져야 한다는 뜻이다. 조정과 해결의 능력이 리더십의 관건인 것이다.

강노심유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진보"나 "개혁"이나 "민주"를 표방하는 진영 전체가 반성해야 할 핵심 사항이 바로 이와 같은 단일주제정치의 심성이다. 따지고 보면, 강노심유가 혐오해 마지않는 당권파의 볼셰비즘 역시 일반범주로는 단일주제정치의 한 극단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자기 눈에 어떤 목표가 하나, 추구할 목표든지 제거할 목표든지, 포착되고 나면, 다른 일들은 조직의 단결과 순수성과 권력유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도외시하려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으로서 지율 스님이 지금까지도 천성산 터널에 반대하는 집념을 나는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 의기를 높이 평가한다. 나는 KTX를 가끔 이용은 하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정책결정과정에서 심사숙고를 통해 더 나은 대안을 찾을 길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만약 어떤 정치인이 지금 당장 천성산 터널을 다시 막고 KTX 노선을 바꾸는 데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나선다든가, 그런 것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면 멍청한 짓이라고 강하게 성토할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절대적 진리를 찾아나가는 참선의 행보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문제들과 관련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통하게 만드는 사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라크에 파병한 일 때문에 노무현 정부를 악마처럼 취급했던 정치의식, 한미 FTA를 저지하겠다고 나섰다가 국회를 통과하자 이명박의 서명을 막겠다고 설쳐댄 무모함, "진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단일주제정치의 사례들은 무수히 열거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으로서 의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하지만 진보정치가 나갈 길이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각자 생각하는 목표를 마냥 결사적으로 들이대는 것으로 그치는 곳은 사실 진보 여부를 떠나 애당초 정치가 없는 힘겨루기의 정글에 불과하다.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는 진부한 저주의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원인이 있다.

진보정치를 추구하려면, 무슨 일이 잘못이라고 판단될 때, 그러한 일차적 판단으로부터 나머지 모든 결론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못인지, 어떻게 대응할지, 현실의 세력균형은 어떠한지, 어떤 대의를 지키기 위해 어떤 편의는 양보할지, 그렇게 양보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결과들을 어떻게 저울질할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더 좋은 일을 위해 덜 좋은 일을 양보하고, 더 싫은 놈을 피하기 위해 덜 싫은 놈과 협력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핵심에는 뭘 더 좋아하고 뭘 더 싫어해야 할지를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본질적인 난제가 도사린다.

진보정치를 지도하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이 본질적인 난제에 관해 자기 내면에 무슨 신념이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형태로 세워져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래야 진보정치의 환골탈태가 말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체계성도 정합성도 없이 몇 마디 구호에 의존해서 목전의 권력투쟁에서 이겨보는 정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면,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유권자 중에 과반수로부터 지지를 얻을지 자문해야 한다. 운이 기적적으로 좋아서 혹시 유권자 과반수가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날이 찾아온다고 해도, 복잡하게 뒤얽히고 내면적으로 모순되며, 환상과 원한과 탐욕이 이치보다 대개는 더 많이 혼입되어 있는 각양각색의 기대를 어떻게 정리해서 충족시킬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해 자랑스럽게 공표할 만한 답이 내면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정치는 결국 권력을 향한 개인적인 또는 파당적인 추구에 불과하다. 보수정치야말로 권력을 위한 계급적인 추구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항변은 맞는 말이지만, 진보의 입지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진보정치는 권력투쟁에 불과하지 않은 형태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믿음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권력투쟁의 지평을 넘어서 질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정치는 단일주제정치에 머무르는 안목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진보정치는 인간적 가치를 구현하는 도덕적으로 향상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데, 이때 인간적 가치란 주관적으로 포착된 이념의 재가만 받으면 되는 항목이 아니라 공론의 심사숙고를 통해 마음들이 영혼들이 결합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영혼은 바람몰이나 협박으로는 결합하지 않고, 설득과 공감이 있어야 결합한다. 설득과 공감은 이치와 감동에서 나올 때 가장 순수하지만, 여건이 그다지 순수하지 못할 때에는 흥정과 타협과 협상과 거래를 통해 나올 수도 있다. 조금 불순물이 섞인 형태, 오래지 않아 무산될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설득과 공감이라고 해도, 그것이 당장 얻을 수 있는 최선이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도 이치와 감동이 서식하기 때문이다.

강노심유가 신당을 창당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다. 지금까지 시도했던 "신당"들보다 조금이라도 발전한 당이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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