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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도 맞고 늦게 씻어도 맞고…이런 곳,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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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도 맞고 늦게 씻어도 맞고…이런 곳, 언제까지?

[26년, 형제복지원] <10> 생존자들이 더 증언할 수 있도록 여건 갖춰야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26년, 형제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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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결코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박태길 소장이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 규명 및 해결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형제복지원에 대한 기억의 제목이다. 1984년 당시 14세이던 그는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파란색 군용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을 차에 태우더니 파출소를 거쳐 형제복지원에 수용했다고 했다. 어려서 신분증이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없다고 그를 가뒀다. 형제복지원에 갇힌 많은 사람이 술주정을 했다는 이유로, 역에서 잠들었다는 여러 이유로 대부분 납치되듯이 수용되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폭행과 기합'을 받아야 했다.

때리는 이유는 갖다 붙이면 다 이유가 되었다. 밥 먹으면서 떠들었거나 세면을 빨리 끝내지 못했거나 빨리 대답을 하지 않았거나, 모든 것이 이유가 되었다. 중대장, 소대장, 서무 선도부 등의 군대식 호칭과 위계에서 폭력은 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성폭력도 존재했다. 비슷한 진술은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인 한종선 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형제복지원의 경험은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는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무색하게 한다. 현실에서는 '존엄성이 인정된 자와 존엄하지 않은 자'로 구분되고 분리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물론 형제복지원 인권 침해 사건은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극단적 사례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작성과 채택 배경은 사실 나치의 제노사이드 경험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치의 학살 경험처럼, 1980년대 형제복지원에서 부랑아들을 짐승처럼 사육하고 죽였던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 형제복지원 수감 시절,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한종선 씨 모습. ⓒ한종선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는 폭력의 경험

이렇듯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서 '모든'이 삭제되는 순간, 존엄하지 않거나 존엄이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고 간주되는 자들의 권리는 제한되고, 인권은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부인된다. 존엄성을 가진 동일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취급받으며 고문과 학대 등의 인권 침해가 잇따른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는 일은 이유를 묻지 않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성을 그/녀의 가치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철학적 쟁점을 검토한 메테 레베히(Mette Lebech)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인간 특질만큼이나 다양하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재가 어떠하기에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이거나, 신의 특성과 닮았거나, 이성적 존재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하는 특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는 개별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 단순히 본성, 신념, 이성 또는 지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 관계 속에서 한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공동체이든 존중받고 사랑받은 경험은 그/녀에게 자존감을 느끼게 하고 나도 타인과 동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타인도 그러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대우해야 함을 깨닫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경험으로 개별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의 인간적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사람들이 경험한 인간 존엄성 박탈의 경험은 심각하다. 형제복지원에서 그/녀들은 존엄하지 않은 인간으로 재탄생되었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식 위계 구조를 복지원 운영의 주요한 방식으로 삼았고, 그 위계는 일상적인 폭력과 훈육의 근거가 되었다.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받은 같은 수용자들인 소대장·중대장들은 다른 수용자들에게 폭력과 모욕을 가했고, 일반 수용자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자율적 주체가 아닌 명령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맞지 않으려면 복종해야 하기에 무조건 따랐다.

그 과정에서 일반 수용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형제복지원의 소대장·중대장들의 존엄성도 상실된다.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는 타인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판단을 할 수 없는 타율적 존재로서 '존엄성을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개개인에 대한 존엄과 자율성의 부여는 외부자를 존엄한 존재로 만들지만, 타인을(에게) 존중하지(받지) 않은 경험은 존엄을 모든 인간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경험이다. 부랑자이든 가출한 청소년이든 기계나 짐승처럼 다뤄졌던 그/녀들은 더 힘 있는 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거나 그에게 잘 보이는 것으로 잔인한 먹이사슬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한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관료주의와 시설

원주에 있는 사회 복지 시설에서 시설 장애인을 폭행하고 기초수급비 착복을 했다거나 제천에 있는 영육아원에서 아동들을 학대했다는 등의 소식을 우리는 아직도 접한다. 이러한 시설에서는 인권 침해가, 민주화되고 문명화되었다는 2013년에도 현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설이 존재하는 한 인권 침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엇이 시설을 만들도록 부추기는지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추김의 밑바닥에서 관료주의를 보게 된다.

관료주의는 문제의 효율적 해결을 위해 시설을 선호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했듯이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현대성의 정수, 다시 말해 합리화와 객관성으로 포장된 도덕적 무관심, 관료주의와 합작되면서 가능했던 사태"였다. 당시에 유대인 학살은 일상적인 관료주의 절차 중에 하나였기에 이들은 합리적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고 수지를 맞추기도 하고 규칙도 정했다.

형제복지원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장애인 시설이든, 보육 시설이든 간에 시설의 탄생은 관료주의적 합리성을 주요 요건으로 한다. 시설이 국가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는 언제든 '합리적'인 시설 내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아니 시설 자체가 폭력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기준으로 특정 집단이나 특정 성질을 분리해내서 소환하고 모으는 것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술을 자주 많이 먹기 때문에, 그/녀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노숙인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집단화하고 특정 정체화하는 분리와 구분은 격리와 배제와 그리 멀지 않다. 과거 소록도에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을 강제 수용하여 사회로부터 격리한 국가의 합리적 폭력이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특정 집단을 시설에 모아서 관리한다면 국가는 더 이상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으며, 장애인이든 부랑인이든 탈가정 청소년이든 술에 취한 사람이든 간에 그/녀들과 일일이 만나 항의나 요청을 받지 않아도 된다. 시설에 있으면 인력과 재정을 추가로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이유로 관료주의적 합리성은 시설을 포기하지 못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원생의 시신을 병원에 팔아서 돈을 벌었던 것이 가능했던 것은 원장의 탐욕만이 아니라 부랑아로 대표되는 빈민들을 한곳에 가두어 관리할 수 있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국가 관료주의의 시설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탈시설 정책은 국가의 관료주의적 폭력성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 1980년대, 끔찍한 인권 유린이 있었던 형제복지원 '수용 시설'의 모습. ⓒ연합뉴스

함께 존엄성을 회복하기

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 침해가 세상에 알려지고 복지원에 있던 사람들이 복지원을 탈출하였지만 그/녀들은 다시 또 다른 시설에 들어가거나 사회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했다. 복지원에 있었다는 경험만으로 사회는 '복지원에 있었던 사람이니 위험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낙인을 찍었기에 그/녀들은 피해의 경험조차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폭력을 당한 경험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결여되었고 또한 그것을 방어할 수단이 부족했다는 사실로 인지돼 개개인의 마음과 몸을 다치게 한다. 나아가 인간임을, 존엄성을 무시당한 경험은 자기 존중감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 그러나 그/녀들은 말할 수 없었다. 증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종선 씨가 만난 많은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은 그 '경험'이 내 삶의 고통으로 오롯이 남아 있음을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숨길 수 없음을 한탄했다.

<품위 있는 사회>의 저자 아비샤이 마가릿의 말처럼, 자기 존중은 존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태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태도에 의존한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의 생존자들이 자기 존중과 존엄성을 회복하려면 존중받고 있다는 '사회적 확인'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 많이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생존자들이 더 많이 말할 수 있도록 여건(소통의 공간, 말하기의 장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존자 한종선 씨가 <살아남은 아이>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최근 실험극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에 출연한 일은 한종선 씨를 비롯한 생존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방조하고 외면하며 잃어버렸던 우리의 존엄성을 '함께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한종선 씨만이 아니라 더 많은 생존자들이 증언하고 기록하고 말할 수 있게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더 많이 들을 수 있도록 기획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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