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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대 동원해 시민 짓밟고 엉터리 한일협정 추진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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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대 동원해 시민 짓밟고 엉터리 한일협정 추진 ⑧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⑧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9) 지금까지는 일단 중요한 쟁점과 역사에 대해 좀 알게 되었으니, 14년 동안의 한일회담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되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싶네요.

우선 시기로 보면 3차례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1차에서 4차까지 1단계, 그리고 중간의 장면 정권 때의 5차로 2단계, 그 이후 3단계는 박정희 집권시기의 6차에서 7차까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면정권은 단명해서 크게 보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기로 두 묶음이 됩니다.

(9-1) 연도별로도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우선 이승만 정권 시기를 연도로 정리하면

1차 (1952년 2월 15일~1952년 4월 21일)
2차 (1953년 4월 15일-1953년 7월 23일)
3차 (1953년 10월 6일~1953년 10월 21일)
4차 (1958년 4월 15일~1960년 4월 15일)까지입니다.

날짜를 보면 아시겠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과 한국전쟁 시기가 겹치는 시기부터 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 직전까지였습니다.

3차에서 4차까지 시간이 4년 반이나 걸린 까닭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다”라는 구보타의 망언 때문에 3차 회담이 중단된 결과였습니다.

4차 회담이 2년째 접어들어 한참 진행되던 1960년 4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어 회담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다.

(9-2) 1단계 한일회담의 주요 논점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일본은 재일 한인들의 법적 지위 문제와 어업문제에만 국한해서 회담을 진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 두 나라의 기본관계, 2. 청구권 3. 어업문제, 4. 재일한인들의 법적 지위, 5. 문화재 반환 문제 등 이후 한일 회담이 다루게 된 문제의 기본 골격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회담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큰 쟁점이 되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문제가 제기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9-3) 그 이후는 한일협정 타결과정으로 들어가는 시기가 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형식상 타결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한일협정 타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회담 과정과 협정 내용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협정체결 과정 또한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어떤 정권이 될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반대세력을 무력진압으로 억압해서 정치를 하는 정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5차 회담(1960년 10월 25일~1961년 5월 15일)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장면정권이 무너져 중단됩니다.

6차는 1961년 10월 20일에서 1964년 4월까지 이르는 기간이었고 이 시기에 대대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3년 가까운 시기는 군사 쿠데타 세력의 민정이양(民政移讓) 약속 불이행, 이어지는 박정희의 공식적인 집권, 한일회담 내용에 대한 국내적 비판 등으로 정세가 불안정해져 회담 진행 자체가 간단치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1962년 10월 “김종필-오히라*”의 밀담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일본 외상) 한일협정 타결의 가닥이 잡힙니다. 이는 이후 그 내용이 알려져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 김종필-오히라 메모
▲김종필과 오히라

(9-4) 그 이전에도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이승만과 장면 정권 시기에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의 대일 협상 자세에 문제가 드러났고 그에 대해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4.19 혁명의 주체였던 학생세대의 문제의식이 날카로워졌던 것입니다.

반대운동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반대운동을 진압하게 됩니다.

1965년 한일협정 내용을 정리한 7차는 1964년 12월 3일에서 1965년 6월 22일까지입니다. 여기서 1965년 6월 22일은 한국과 일본이 조약을 조인한 날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에서 이 조약을 8월 14일 비준 통과시킵니다. 공화당 1당이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날치기 통과를 한 겁니다.

비준 통과 이후에도 반대운동이 거세어지자 1965년 8월 26일에는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역시 군대를 동원해 반대운동을 탄압했으며 대학은 휴교령 조처를 취했지요.

(9-5) 한일회담의 다른 한 축인 일본의 정권은 어떤 흐름이었나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역청구권” 논리가 회담을 난항에 이르게 한 시기, 이를 철회하고 식민지 관계 청산은 뒤로 한 채 경제협력에 중점을 두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정책 전환 시기,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시기의 소극적 대응,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의 친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다시 경제협력 개념을 중심으로 한 협정타결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9-6) 일본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가 없었나요?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과의 군사관계를 강화하는 신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안보투쟁(安保鬪爭)”이었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이 하나로 엮어지는 군사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였지요.

게다가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진출해서 일본 내에서 저임금 구조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9-7)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는 제기되지 못했군요.

그렇습니다. 일본 내 안보투쟁의 한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논쟁과 책임추궁,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일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의 문제는 소멸해버리고 미국의 냉전체제에 한국과 일본이 하부구조로 결합하면서 경제적 관계를 수직적으로 수립하는 것에 역점을 두는 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9-8) 미국의 역할은 어땠나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만 여기서 미국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라는 점,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세계정책에 하위체계로 연동되어 있다는 점, 이걸 돌파하지 않고서는 정상적 관계를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민족적 위상을 제대로 만들어낼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체제의 해소는 진정한 한일관계의 정상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韓日協定、何が問題なのか】⑧

(9)今までは一応重要な争点と歴史について少し理解できたので、14年の間の韓日会談がどのような流れで進んできたのか大枠でわかっておきたいですね。

ーまず時期で見ると、3つの段階があります。

李承晩政権時期の1次から4次までの1段階、
そして中間の張勉政権時期の5次の2段階、
その次の3段階は、朴正熙執権時期の6次から7次までに整理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しかし張勉政権は短命だったので、大きくは李承晩と朴正熙政権の2つの時期と見ることができます。

(9-1)年度別に整理して頂いてよろしいでしょうか?

ーまず李承晩政権時期を年度別に整理すると
1次 (1952年2月15日~1952年4月21日)
2次 (1953年4月15日~1953年7月23日)
3次 (1953年10月6日~1953年10月21日)
4次 (1958年4月15日~1960年4月15日)までです。

日程を見るとおわかり頂けますが、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締結と韓国戦争時期が重なる時期から1960年4月19日学生革命の直前の時期まででした。

3次から4次まで4年半もかかった理由は、すでに述べたように”日本の韓国支配は、韓国に恩恵を与えたものだ”という久保田妄言のために3次会談が中断される結果に至りました。

4次会談が2年目に差し掛かり、しばらく経過した1960年4月には、李承晩政権が崩壊し会談は中断するしかなかったのです。

(9-2)1段階の韓日会談の主要論点はどのような内容だったのですか?

ー重要な質問です。
日本は在日韓国人たちの法的地位問題と漁業問題にだけ限局して、会談を進めたいようでした。
しかし結局
1. 2国間の基本関係
2. 請求権
3. 漁業問題
4. 在日韓国人たちの法的地位
5. 文化財返還問題等
以降の韓日会談が取り扱う問題の基本骨格が定められていきました。

そして14年の間、会談中から現在に到るまで最大の争点になる植民地支配の不法性問題が、提起される意味を持つようになってきます。

(9-3)それ以降韓日協定の妥結過程に入っていくのですね?

ーえぇ、そうです。
形式上、妥結ということになるんですが、新しい問題の始まりとなりました。韓日協定妥結がどのように評価されるかという問題が前面に台頭する時期だったからです。

会談過程と協定内容について膨大な批判が殺到しました。協定締結過程もやはり民主的ではなかったのです。この過程はそれ以降の朴正熙政権がどのような政権になるかを見せつけるようなものでもありました。反対勢力を武力鎮圧で抑圧して政治を行う政府の姿をそっくりそのまま見せつけてくれるようなものでした。

5次会談(1960年10月25日~1961年5月15日)は、1961年5月16日の朴正熙の軍事クーデターで張勉政権が崩壊し会談は中断されます。

6次会談は1961年10月20日から1964年4月までの期間であり、この時期に大々的な韓日会談反対運動が起こりました。

この3年近くは、軍事クーデター勢力の民政移譲の約束の不履行、続く朴正熙政権の公式的執権、韓日会談の内容に対する国内の批判等により、情勢が不安定化し、会談をすること自体が簡単ではなかったのです。

この渦中の1962年10月「金鐘泌ー大平(大平正芳:当時の日本の外相)」密談が行われ韓日協定妥結の糸口をつかみます。
これはその後その内容が広がると、非常に大きな波紋を呼び起こします。

(9-4)その前にも韓日会談に対する反対運動があったのですか?

ーいいえ、李承晩と張勉政権の時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に朴正熙政権の対日交渉姿勢に問題があることが露呈し、それに対する知識人たちを始めとする4.19革命の主体であった学生世代の問題意識が鋭くなっていったのでした。

反対運動に直面した朴正熙政権は、1964年6月3日非常戒厳令を宣布して、軍隊を動員して反対運動を鎮圧するようになります。

1965年韓日協定の内容を整理した7次は、1964年12月3日から1965年6月22日までです。この1965年6月22日が、韓国と日本が韓日条約を調印した日となります。

朴正熙政権は国会で、この条約を8月14日に批准通過させます。共和党1党が野党が不参加のまま性急に通過させたのです。

批准通過以降でも反対運動が激しくなると、1965年8月26日には衛戌令を発動して、ここでも軍隊を動員して反対運動を弾圧し、大学は休学令により休学という処置を取ったのです。

(9-5)韓日会談の相手側の日本の政権はどういう流れだったのですか?

ー吉田茂の「逆請求権」論理が会談を難航させた時期から、これを撤回し植民地関係精算は後回しにしたまま経済協力に重点をおく岸信介の政策転換時期、そして池田勇人時期の消極的な対応、岸信介の弟の佐藤栄作が再び経済協力概念を中心とした協定妥結時期へと進みました。

(9-6)日本では韓日運動に対する反対運動は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ー60年代当時日本では、アメリカとの軍事関係を強化する新安保条約締結に反対する運動が大々的に広がっていました。いわゆる”安保闘争”でした。アメリカ、日本、韓国が一つになる軍事体制に対する批判と反対運動だったのです。その運動の延長線上にベトナム戦争反対まで重なって韓日会談に対する激しい拒否感情がありました。

そのうえ日本の独占資本が韓国に進出して、日本の国内で低賃金構造が深まることに対する憂慮がありました。

(9-7)従って、日本の植民地支配問題が提起さ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ね。

ーそうです。日本国内の安保闘争の限界だと言えます。
植民地支配に対する歴史的論争と責任追及、犠牲者たちに対する謝罪と反省は見られませんでした。

結局このような現実の下、韓日協定での植民地支配による歴史的清算の問題は消滅してしまい、アメリカの冷戦体制に韓国と日本が下部構造として結合しながら、経済的関係を垂直的に樹立することに力点を置く方向へ行ってしまいました。

(9-8)アメリカの役割はどうでしたか?

ー後でもう少し詳細に説明しますが、ここでアメリカの役割が非常に決定的だという点を覚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

韓日関係はその時から今まで、アメリカの世界政策の下位構造に連動しているという点、これを突破しないことには正常な関係を築くのは非常に難しいのです。

従って、私たちの民族的位相を正しいものに作るためにも韓半島の冷戦と分断体制の解消は、真の韓日関係を正常化と東北アジアの平和のために極めて重要なことになるのです。

(번역 : 재일교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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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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