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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로 뒤덮인 성당에서 삶의 의미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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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로 뒤덮인 성당에서 삶의 의미를 돌아보다 [손호철의 포르투갈 여행기] 11. 에보라 :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
"리스본에서 에보라(Evora)를 방문하는 많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에 참여하지 마라." 여행을 떠나기 전 포르투갈에 정통한 한 여행가이드에서 이 같은 제목을 읽었다.

"에보라가 별 볼 일 없으니 가지 말라는 거니,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읽어 봤다. 정반대로, 여행사들의 에보라 프로그램은 당일치기 방문인데 에보라는 그렇게 볼 만만한 곳이 아니니 최소한 1박은 하라는 이야기였다.

리스본에서 동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에보라는 또 다른 성곽도시이다. 그러나 리스본에서 북서쪽에 있는 오비두스와는 다르다. 마을에 다가가면 높게 솟은 성채가 "나는 성곽도시오"라고 뽐내는 오비두스와 달리, 에보라에는 성채가 보이지 않는다. 도시를 감싼 성벽만이 다소곳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오비두스가 아름다운 집들과 꽃들이 볼거리인 성곽도시라면, 에보라는 로마의 신전과 오래된 성프란시스코 교회 등 역사와 종교의 유적이 주된 볼거리인 성곽도시다. 그 덕분에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이다. 인구도 오비두스가 1만 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라면 에보라는 6만 명에 가깝다.

▲ '에보라에도 성곽이 있네'하고 보니 성곽이 아니라 성당이었다. ⓒ 손호철

성 바로 밖에 있는 숙소에 차를 대려고 보니 바로 옆에 나지막하지만 낡은 성이 하나 있었다. "성이 남아있긴 있구나"하고 가까이 가서 설명을 읽어 보니 성이 아니라 성당이었다. 성당을 성같이 짓다니, 특이한 일이다.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건너려는데 가운데 작은 광장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높은 기단 위에 날개를 단 천사가 한 손에는 월계수관을, 다른 한손에는 칼을 거꾸로 든 조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밑의 양쪽 끝에는 대포 포탄을 세워 놨다. 이상한 조각이라 글을 읽어보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에보라의 자식들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었다. 전몰용사기념비였다.

어느 나라나 순국용사기념비는 있으니,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 데 옆면에 '프랑스, 1917~1918'이라고 쓰여 있었다. 1차 대전 참전 희생을 기념한 것이었다. 반대쪽에 뭐가 있나 보니, "아이고, 젠장!"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프리카, 1914~1918'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아프리카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 교토에 갔는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교토자식들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고 옆면에 '조선, 1910~1945'라고 써 놓은 동상을 봤다면, 우리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 에보라 전몰용사추모비. 아프리카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다 죽은 포르투갈 청년들을 기리는 것이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손호철

물론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이들도 '애국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고 아직도 식민주의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동상이다, 2차 대전의 전범들을 합장한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그 같은 이유에서이다, 현재의 에보라 시 정부가 공산당과 녹색당 연합정부라는데, 이런 것부터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곽 안으로 들어가자 '에보라'라고 강한 빨간 글씨로 만든 커다란 설치물이 나타났고 그 뒤로 아름다운 흰 색 건물들이 이어졌다. '에보라 도시 빌리지(Evora Urban Village)'라는 또 다른 선전물에는 다양한 공연예술가들의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그중 동양인도 한명 있었는데 한류 스타는 아닌 것 같았다. 오른쪽을 보니 이 도시의 제일의 볼거리라는 성프란치스코 성당이 있었다. 도시 안내지도를 보고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제일 안쪽에 있는 로마신전서부터 본 뒤 나오면서 도시 구경을 하고 입구에 있는 성당은 제일 마지막에 보기로 했다.

▲ 강렬한 에보라시 선전 간판 ⓒ 손호철

로마는 기원전 57년 이 지역을 정복해 성을 쌓아 에보라를 성곽도시로 건설했다. 로마가 이 근방에서 금을 채굴해 실어간 금이란 단어로부터 에보라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벌을 지휘했던 줄리어스 시저는 이 도시를 '리버랄리타스 줄리아(liberalitas julia, 줄리어스의 관용)'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마을 뒤쪽에 위치한 로마 신전은 이곳이 로마의 식민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성당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신전은 지금으로부터 1900여 년 전인 1세기 경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념해서 세운 '달의 신' 디아나 신전으로, 5세기 골족 침공 때 부서졌다. 이후 부서진 석재를 다른 공사에 사용하는 등 엉망이 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현재는 코린트식 기둥이 세 면만이 남아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에서 이와 같은 형식의 로마 신전을 봐 왔다. 그러나 에보라에서 본 이 신전이 로마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유럽의 서쪽 끝인 포르투갈에까지 와서 식민지를 만들고 신전을 만들었으니, 로마가 얼마나 멀리까지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 이곳이 로마의 식민지였음을 보여주는 에보라의 디아나신전. 아마도 가장 서쪽에 위치한 로마의 신전일 것이다. ⓒ 손호철

오비두스가 흰색에 짙은 아랍식 청색을 칠한 건물들이 특징이라면, 에보라는 흰색에 노란색으로 테를 두르는 등 노란 악센트를 준 것이 특징이다. 노란 색은 오비두스의 청색만큼 깊은 느낌은 없었지만 독특한 맛이 있어, 에보라의 골목을 걷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아랍은 715년 에보라를 점령해 1165년 알폰소 1세가 해방시킬 때까지 이 도시를 지배했다. 알폰소 1세가 에보라를 해방시킨 뒤 에보라는 제1, 제2 왕국의 예술과 학문 중심도시로 발전해 15~16세기에 황금기를 누렸다고 한다. 특히 에보라에는 1559년 건립되어 포르투갈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에보라대학이 있다. 1559년이면 임진왜란 이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유서 깊은 대학을 둘러봤다.

▲ 노란색 악센트가 나름 멋이 있는 에보라의 골목길 ⓒ 손호철

에보라의 황금기는 포르투갈의 황금기였던 대탐험 시절이었다. 대탐험 시대에는 노예들이 넘쳐나 '노예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이곳을 방문했던 한 방문기는 에보라에는 "가는 곳마다 아프리카로부터 끌려온 흑인노예들이 넘쳐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리아라는 여자가 트리스탄 차이나라는 남자 노예를 소유했다는 1540년대 기록도 남아있다. 차이나라는 성으로 보아 노예가 중국에서 여기까지 끌려왔던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원정 성공 후 결혼해서 은퇴하고 살던 곳도 바로 여기다. 이곳에서 잘 살던 그는 3차 원정에 불려나가 인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혹시 임진왜란 때 왜군에 포로가 되어 포르투갈에 끌려 왔던 조선의 노예들이 에보라까지 끌어왔던 것은 아닌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이 에보라에서 나를 스쳐갔던 사람들 중에 혹 조선 노예의 자손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지난해의 쿠바 여행에서 쿠바혁명의 주역 중의 한 명이 20세기 초에 살기 위해 멕시코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애니깽 노동자들의 후손 중 한 명인 헤르니모 임(임은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이번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인 노예들이 유럽까지 팔려왔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좁고, 골목치고는 큰 '골목광장'에 야외식당거리가 나타났다. 마음은 그렇고 분위기도 좋아서 대낮부터 강한 포르투 와인을 한잔 시켜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가다듬었다.

▲ 골목광장의 야외 식당거리 ⓒ 손호철

해가 지기 전에 성프란치스코 성당을 봐야 할 것 같아 서둘렀다. 성 프란치스코 신도들은 성프란치스코 교파의 창시자인 아사시가 살아있던 1224년 이미 에보라에 도착해 성 밖에 허름한 교회를 짓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포르투갈 왕실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1376년 성당을 건설했다고 한다. 성당은 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성당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박물관이었다.

▲ 에보라와 역사를 같이한 성프란시스코 성당 ⓒ 손호철

박물관은 성프란치스코 성당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성프란치스코 성당이 다른 교회들과 달리 가난과 청빈을 강조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고 아주 좋아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도 성프란시스코 수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관심을 가졌었다. 이번 기회에 그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1808년 프랑스가 포르투갈 침공하면서 에보라 성당을 약탈해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로마, 아랍에 이어 프랑스까지 이곳을 쳐들어 왔던 것이다. 이후 여러 계기로 망가진 성당을 1895년 한 독지가가 나서 재건한 것이 현재의 성당이라고 한다. 박물관 제일 안쪽에 있는 엣 성당의 서까래 사진이 파란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 옛 성당의 서까래 사진 ⓒ 손호철

▲ 성당 발코니에서 바라다본 에보라시의 주택가 ⓒ 손호철

성당 뒤로 돌아가자 꽤나 넓은 방 같은 것이 나타났다. 정면 가운데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로 가는 양 벽과 아치 모양의 천장을 받친 기둥들이 모두 회색이었는데, 염료로 칠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작은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느 것은 가늘고 긴 막대기 같은 것이고 어느 것은 작고 둥근 것이었다. 자세히 가서 보니, 사람들의 뼈였다! 아니 이게 뭐지? 입장권을 살 때 준 책자를 꺼내 읽어 보니, 'Capela dos Ossos', 직역을 하면 '뼈들의 성당', 의역을 하면 '유골 성당'이었다.

▲ 사람의 뼈로 장식을 한 '뼈들의 성당' ⓒ 손호철

유학에서 돌아와 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대 초, 유럽과 아시아 일주를 한 적이 있다. 공부하던 미국 빼놓고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라 신이 났다. 게다가 유럽의 행선지가 스페인, 프랑스, 독일, 헝가리, 체코 등 평소 가고 싶은 곳이었다. 헌데 가서 본 것은 다른 것들이 아니고 주로 무덤들이었다! 5.18 유가족 둥 관계자들과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사업에 참고하기 위해 외국의 민주화운동 기념물들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파리에 가서 본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파리코뮨 당시에 죽은 희생자들을 안치한 지하묘소인 카타콤이다. 양옆으로 뼈와 해골들을 보기 좋게 정돈해 놓은 지하묘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묘소는 양옆으로 뼈와 해골들을 정돈해 놓은,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의 통로를 몇 십분 동안 걸아가야 한다. 평생 이렇게 많은 해골과 사람의 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덜덜 떨면서 이 지하묘소를 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파리 시내 지하에도 프랑스대혁명 등에 사망한 사람들의 뼈를 모아 놓은 지하묘소가 있다. ⓒ 손호철

이 성당은 지하가 아니고 밝은 곳에 설치해 놓아서 파리 카타콤처럼 음침하고 으스스하지는 않다. 그래도 수백 개의 뼈와 해골들을 보고 있는데 숙연해지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파리는 그냥 뼈들을 쌓아 놓았다면, 여기는 뼈들로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 장식을 해 놓았다. 우리가 죽음을 종종 접하고 무덤에도 가지만 시신이 지하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는 뼈를 첩첩이 쌓아 놓아 죽음을 생생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충격에 싸여 뼈들의 성당을 빠져 나왔다, 이 유골성당을 나오자마자 바로 정면의 벽에 무언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무슨 그림인가 자세히 보니, 즐겁게 가족들이 뛰어 노는 그림들이다. 옆에 작은 해설이 붙어 있었다, 삶과 죽음을 대비시켜 삶의 소중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왼쪽은 아버지 요셉의 보호 아래 마리아가 예수를 돌보고 있는 그림이고 오른쪽은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하늘로 쳐들고 놀고 있는 그림이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유골 성당'은 17세기 유행하던 스타일로 삶의 덧없음을 상기시키고 기독교 신앙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목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 죽음에 대비시켜 현세의 즐거움을 형상화한 벽화 ⓒ 손호철

그러나 뼈와 해골들 이상으로 정말 충격적인 것이 따로 있었다. 성당으로 들어갈 때는 못 봤는데 나와서 보니 '뼈들의 성당'으로 들어가는 둥근 문 위에 무언가 쓰여 있었다.

Nos Ossos Que Aqui Estamos Pelos Vossos Esperamos.

사전을 찾아보니 그 뜻이 충격적이었다. "여기 뼈들 속에서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읽는 순간,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도 머지않아 저 뼈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과연 나는 웃으면서 저 뼈들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는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뼈들 속으로 돌아갈 때 웃으면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살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성당을 뼈져 나오면서도 이 같은 자문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에보라 여행이었다.

▲ 성프란시스코 성당 내부 ⓒ 손호철

▲ 뼈들의 성당의 기둥도 뼈들로 이루어져 있다. ⓒ 손호철

▲ 성당 박물관 내부 모습 ⓒ 손호철

▲ 성프란시스코 성당 박물관 전시물들 ⓒ 손호철

▲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포르투갈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에보라대학이다. ⓒ 손호철

▲ 에보라시의 지도는 에보라가 아직도 완전히 성으로 싸여있는 성곽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다. ⓒ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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