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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가 다국적기업 장비검사에 사용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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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가 다국적기업 장비검사에 사용됐다고? 해당기업 年 수백억 사업 독식…복지부 "감사라도 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헌혈을 했는데 그 피가 내 허락도 없이 기업의 새로운 검사장비의 성능을 알아보는 데 사용됐다면? 더구나 그 결과가 버젓이 논문으로 작성돼 학술지에 기고까지 됐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진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프레시안>은 최근 대한적십자사가 도입을 추진하려는 '혈액검사 자동화 시스템'과 관련된 적십자사 내부 문건을 입수했다. 이 '자동화 시스템'은 기존의 혈액검사 방식을 반자동 시스템에서 완전자동 시스템으로 개선하기 위해 적십자사가 2004년부터 도입을 추진 중인 새로운 장비를 일컫는다.

이 장비는 전국의 모든 적십자사 검사 시설에 투입될 예정이어서 기존의 혈액 안전 검사 체계에 전면적 변화를 가져올 대형 사업이다.

적십자사는 이 새 장비의 성능을 확인하는 임상시험에 2004년 12월부터 3개월 간 서울 동부 혈액원에서 시민 1만8268명으로부터 채혈한 혈액을 제공해 B·C형 간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대한 검사를 실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물론 이런 임상시험에 제공된 혈액은 시민으로부터 동의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됐다.

현행 혈액관리법은 헌혈자의 혈액을 수혈 또는 혈액제제의 제조에만 사용하도록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적십자사는 단지 그 혈액이 수혈용 또는 혈액제제 용으로 적합한지 검사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다국적 기업이 장비 임상시험 제안…시민 1만8000여 명 혈액 무단 사용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시민의 소중한 헌혈 혈액을 무단으로 사용한 이 임상시험의 최초 제안자는 자사의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적십자사에 납품하려던 한 다국적 기업 A사였다. 적십자사의 내부 문건에 따르면 2004년 8월 25일 A사는 자사 장비의 성능을 평가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적십자사에 최초 제안했다.

적십자사는 A사의 제안을 받은 후 국내외의 다른 의료기기 제조업체에도 임상시험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서둘러 2004년 12월 동부혈액원에서 시민 1만8268명의 혈액을 무단으로 사용해 A사의 장비를 시험 가동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적십자사는 시험가동을 위한 인력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임상시험을 진행한 적십자사는 불과 수개월 뒤인 2005년 4월 본격적으로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선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비 선정에 나섰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 4월 17일 적십자사는 결국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A사의 장비로 '잠정' 선정했다.

A사가 최초로 제안한 지 2년이 채 안 되어 해당사의 장비가 선정된 것이다. 이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는 장비 구입에 159억 원, 시설 공사비에 73억 원의 국민 혈세가 투입될 예정이다. A사는 이 돈뿐만 아니라 연간 수백억 원 상당의 시약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게 됐다.

적십자사 고위 간부 "해당 장비 우수하다"…검사 결과 학술지에 발표

한편 적십자사는 시민의 헌혈 혈액을 무단으로 임상시험에 사용한데 이어 그 결과를 정리해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오덕자 중앙혈액원장, 서동희 혈액관리본부 혈액안전국장 등 적십자사 간부들은 2005년 <대한수혈학회지>(제16권 1호)에 수록된 '헌혈 혈액 선별 검사용 화학발광면역검사기기 Prism 평가'라는 소논문(포스터)에서 "2004년 12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총 1만8268건의 헌혈자 혈액 검체에 대한 검사를 실시한 결과 Prism은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됐다"고 보고했다.

이 논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Prism'은 바로 A사가 임상시험을 의뢰한 새로운 검사 장비를 일컫는다. 적십자사 간부들이 A사로부터 의뢰를 받아 시민의 헌혈 혈액을 무단 사용해 임상시험을 실시한 데 이어 아예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됐다"고 A사의 장비의 우수성까지 홍보하고 나선 셈이다.

더구나 논문 저자들 가운데 오덕자 중앙혈액원장은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2005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1년간 운영된 '검사 시스템 개선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또 서동희 혈액안전국장은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최종 선정하기 위해 지난 3월 구성된 선정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선정도 하기 전에 특정업체의 장비에 대해 "성능이 우수하다"고 지적한 이들이 선정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검사비 2450원 인상 불가피…저렴한 타사 제품은 '외면'

최종적으로 선정된 A사의 장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현행 1인당 1500원 가량의 검사 비용이 3950원으로 오르게 된다. 검사비만 2450원의 인상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십자사는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하려는 것일까? 결국 혈액이 꼭 필요한 환자들 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현재 400㎖ 혈액을 수혈 받을 경우 4만4520원이 든다. 만약 이 A사의 검사 장비를 도입할 경우 2450원의 인상이 불가피해 혈액수가는 4만6970원으로 인상되게 된다. 이미 복지부는 2005년 2월에도 혈액수가를 9130원 인상한 적이 있다. 이 혈액수가 가운데 80%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부담하고 환자는 20%를 부담하고 있다.

그렇다면 뒤늦게 A사의 장비와의 경쟁에 뛰어들었던 다른 장비의 경우는 어떨까? <프레시안>이 확인한 결과 또 다른 기업 B사는 검사 비용으로 3400원을, C사는 1500원을 제시했다. 만약 적십자사가 순수하게 가격만을 고려해서 C사를 선택했다면 혈액수가를 별도로 인상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가격 차이는 검사할 때마다 필요한 시약에서 비롯된다. A사는 검사 때마다 필요한 시약을 전량 수입하기 때문에 가격이 높은 반면 C사의 '검사 자동화 시스템'은 기존 국산 시약과 호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존 검사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C사의 것을 쓰면 적십자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산 시약 생산 공장들이 계속 가동할 수 있는 과외의 장점도 있다.

2003년에는 '가격'이 최우선…2006년에는 '성능'이 최우선?

A사의 장비는 이런 여러 가지 가격과 관련된 단점을 무시할 정도로 성능이 좋은 것일까? 일단 적십자사의 평가 자료는 A사의 장비가 B, C사의 것보다 특히 B형 간염 검사에서 우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적십자사가 현재 AIDS, C형간염의 검사를 위해 도입한 핵산증폭검사(NAT) 장비를 B형간염의 검사를 위해서도 도입할 경우 이런 A사 장비의 상대적 우수성은 별반 돋보일 게 없게 된다. 현재 적십자사는 NAT를 B형간염으로 확대할지를 검토 중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2003년으로 기억을 되돌려보자. 적십자사는 2003년 NAT 장비 도입을 결정하면서 적십자사 일부 직원조차 성능이 더 우수하다고 판단했던 다른 업체의 장비 대신 유지비가 싸다는 이유로 다국적 기업 R사의 장비를 주계약자로 선정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검사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할 때는 유지비가 제일 비싼 다국적 기업 A사의 장비를 이제 '성능이 좋다'는 이유로 선정한 것이다.

적십자사는 또 2003년 NAT 장비를 도입할 때는 '예비'를 확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경쟁사를 부계약자로 선정해 전체 검사량의 30%를 할당했었다. 하지만 A사의 장비의 경우에는 시약을 전량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NAT 장비 도입 때 보였던 '예비'를 확보하는 것과 같은 대책도 취하지 않고 있다. 만약 A사가 시약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국내 혈액안전 관리에 일대 '혼란'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도대체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여기 그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2005년 6월 30일 적십자사 강당 4층에서는 '검사 자동화 시스템' 도입과 관련된 설명회가 개최됐다. 이 설명회에서 당시 조한익 혈액사업본부장은 "이 검사 자동화 시스템 도입과 관련해 혈액수가 인상은 있을 수 없다"며 업체들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불과 5개월 전에 9130원이나 혈액수가를 인상한 상황을 염두에 둔 당부였다.

복지부 "절차, 타당성 검토에 문제 많아…감사라도 해야 할 상황"

하지만 결과적으로 국민건강보험 재정과 환자들의 부담을 염두에 둔 조한익 본부장의 당부는 헛된 것이 됐다. 대신 A사와 적십자사는 쾌재를 부르게 됐다.

A사는 '혈액수가 인상'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검사 자동화 시스템' 공급업체로 최종 선정돼 연간 수백억 원의 수익을 올리게 됐다. 재정 적자 등을 이유로 기회만 닿으면 혈액수가 16% 인상 등을 주장해 온 적십자사도 1년 6개월 만에 또 다른 혈액수가 인상의 기회를 갖게 됐다.

이와 관련해 <프레시안>은 적십자사에 각종 의문에 대한 이메일 질의서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적십자사는 공식 답변을 거부했다. 다만 "1만8000명의 헌혈자에게 공식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헌혈자들로부터 구두로 동의를 얻었다"며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 적십자사 관계자는 "A사의 장비가 선정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최종 선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복지부도 이 사안 때문에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21일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선정 절차나 장비 도입의 타당성과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계속 검토 중"이라며 "혈액검사 체계 전반을 변경하는 사업이라서 검토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적십자사에게 맡겨 놓았더니 허술한 점이 아주 많아 복지부도 여러 가지 고민이 많다"고 답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이 사업과 관련해 감사라도 하고 싶은데 '사전' 감사가 유래가 없어서…"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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