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금융, 문화, 교육, 의료 등의 서비스 분야는 미래 성장산업의 핵심이다. 이들 산업분야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들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보건의료 분야는 전체 GNP의 18%를 차지하고 있고, 이 비중이 2010년에는 22%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1990년대 이후 가장 많은 연구개발 투자가 이루어져온 영역이기도 하다.
무지에 근거한 과잉기대
이들 미래 성장산업 분야는 IT 집약적인 산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높은 노동집약적인 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산업성장과 함께 고용확대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수 있는 영역이다. 바로 이런 점은 미국이나 유럽연합(EU) 국가 등 선진국들이 지식기반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이 지닌 경쟁력의 원천은 이들 미래 성장산업 분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은 나노 기술과 바이오 기술의 융합에 의한 화학산업의 근본적 재편을 통해 친환경, 저에너지, 고기능의 소재 및 재료 분야에서도 압도적인 기술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최근 인지과학기술(Cognitive Technology) 분야의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앞으로 지식서비스 산업 부문에서 미국의 기술경쟁력이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미국의 압도적인 국제경쟁력 우위야말로 정부와 청와대가 한미 FTA를 통해 지식서비스 분야의 메이저 기업들을 국내에 유치함으로써 경쟁력을 국내에 이식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개방을 통해 미국의 경쟁력을 국내에 이식할 수 있다"는 정부와 청와대의 주장은 아주 위험천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은 지식서비스 산업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 의의, 사회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방-유치-이식-확산을 통한 경쟁력의 국내 확보"론은 지식서비스 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조건들과 해당 산업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그야말로 무지에 근거한 과잉기대일 뿐이다.
여기서는 미국의 지식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게 된 조건을 지식기반 산업의 기술적 특성과 관련해 검토한 다음 한미 FTA 체결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식은 정보와 달라서 맥락 의존적이며 이전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하루에도 수만 건의 논문이나 책을 통해 지식의 내용이 발표되고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그 내용이 전달될 수는 있으나, 문자나 기호의 전달과 지식의 이전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해당 지식의 구조적, 환경적 맥락(structural-environmental context)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당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흡수역량이 없다면 지식이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이 명시적인(codified)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지식의 생산과 운용, 확산은 대개 암묵적(tacit)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식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연구조사가 필요하고, 충분한 지식역량도 확보돼야 하며, 고객들에게 맞춤형의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학제적 융합과 팀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러다보니 지식서비스의 공급가격은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고, 손익분기점이 높아짐에 따라 투자의 회임기간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지식산업은 진입장벽이 그 어느 산업보다 높다는 얘기다.
특히 지식서비스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기반을 확보하는 데는 아주 다양하고 폭넓은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 가령 인문사회과학적 지식기반이야말로 지식서비스 산업의 필수불가결한 공급 측 전제조건이다. 또한 지식형성의 어려움과 그 누적적인 성격으로 인해 초기의 진입장벽은 높은 대신 규모수익 체증 현상이 존재한다. 규모수익 체증 현상이란 일단 필요한 초기자본과 지식기반이 형성되고 나면 사업규모가 커짐에 따라 투자수익이 더 빠른 속도로 커진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점들로 인해 지식서비스 산업에는 성장 초기에 세계적 차원의 시장수요를 확보하는 것이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수요 측 조건). 미국이 지식서비스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전 세계로의 시장수요를 확보할 수 있었던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지식기반의 미국화만 촉진될 것
지식서비스 산업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영역은 비즈니스 지식서비스, 즉 경영컨설팅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경영컨설팅의 경우 서비스의 품질 결정에 관건이 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경영 관련 이론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얻어진 전략적 기획역량이다. 그리고 기획역량이 생성되는 기반(capability landscape)은 구체적으로 파악 가능한 사례들과 동원 가능한 자원들의 범위 안에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 컨설팅 서비스와 관련된 미국의 경쟁우위는 미국이라는 사회가 갖고 있는 높은 수준의 기초과학 및 인문사회과학 기반, 풍부한 인적 및 물적 자원, 다양하고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들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서비스 분야에서는 어느 나라든 외국자본에 대해 자연적인 진입장벽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즉 시장이 개방된다고 해서 외국자본의 진입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공교육, 보건의료(특히 의료요양), 전통문화 산업과 같은 분야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들 영역의 경우 미국자본이 국내에 진출한다 해도 그 자본이 쉽게 국내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없으며, 바로 같은 논리에 의해 미국자본의 국내진출 의사가 상대적으로 낮은 분야이기도 하다. 국내 교육시장에 진출한 외국자본이 대개 이공학과 경영 부문에 국한돼 있는 것도 이러한 지식서비스 산업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특히 맥락 의존성이 높고 사회적 내재성이 가장 큰 분야인 인문사회과학의 경우는 지식서비스라는 상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배후거점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분야의 지식기반 구축 없이는 경쟁력 있는 지식서비스 상품을 생산하고 개발하기가 어렵다. 결국 지식서비스 산업의 대미 시장개방은 내생적인 경쟁력의 원천인 맥락 의존적, 사회 내재적인 인문사회과학 기반의 구축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미국의 경쟁우위가 그대로 국내에 관철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 편익이 미국식 지식기반을 이용할 수 있는 분야에만 편중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내생적인 지식기반 경쟁력을 육성할 수 있는 길이 오히려 가로막히게 된다.
이에 반해 더 많은 해외수요를 확보한 미국은 여기에서 얻어진 수익을 기반으로 자국 내의 기초과학, 인문사회과학 분야로 연결되는 지식서비스 산업의 후방연관, 즉 지식기반 공급체인을 더욱 확장시키고 강화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미국과 한국 사이에 지식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격차가 더욱 확대재생산될 것이다.
앞에서 지식기반 산업의 발전을 위한 공급 측 조건과 수요 측 조건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은 인위적으로 육성되지 않는다. 공급 측 조건과 수요 측 조건이 모두 충족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성숙과 분화로 가치의 다양성과 일정한 지식생산 역량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지식서비스 산업은 경쟁력 이식이 가장 힘든 분야이다. 우리는 다음 글을 통해 '개방=경쟁'을 통한 경쟁력 강화라는 단순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며 우리나라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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