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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혀 죽게 될 국내 지식산업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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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짓밟혀 죽게 될 국내 지식산업 기반

[FTA 대안은 있다(6)] '외부 충격'이 불러올 죽음

기업 단위 경쟁력의 원천은 생산과정과 제품, 판매, 자원에 대한 관리 등을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데 있고, 기업 단위 지식기반이란 이러한 설계를 할 능력 그 자체다. 이에 반해 국가 단위에서는 경제의 각 부문과 산업연관 구조의 중심 고리와 노동시장, 금융시장, 기술시장 등을 효과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 그리고 기업 단위이든 국가 단위이든 이러한 설계를 하는 능력의 핵심 요소는 지식이다.

지식서비스 시장 개방은 통제돼야 한다

따라서 정부와 청와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선진 미국의 지식서비스 산업을 국내에 유치하게 될 경우 낮은 비용에 보다 질 높은 서비스를 받게 됨으로써 기업 단위의 경영 효율성 제고, 거래비용의 저하, 새로운 가치 창출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 지식서비스 산업을 뒷받침할 만한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임을 고려한다면, 시장개방과 외국자본의 국내진출 확대에 따라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경쟁력은 단기적으로는 올라갈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단기적인 이익만을 위해 시장을 개방해도 좋은 것일까? 사실 비즈니스 서비스란 기업 차원에서 보자면 종합기획조정실의 역할을 외부 전문기관이 수행하는 것이며, 국가 차원에서 보자면 국책연구소나 과거에 경제기획원에서 수행하던 전략기획 기능을 민간기업이 제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분업의 전문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해당 정부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놓고는 견해가 상반될 수 있다. 언론은 종종 정부조직의 관료적 특성을 비효율성의 주범으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정부조직이 수행해야 할 공공성과 사회적 이해관계 조정의 필요성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경제 전체 차원의 전략기획 기능이란 장기 전략과 단기 전략의 적절한 조화, 부문 간의 균형,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의 구현, 혁신과 변화의 선도 등을 추구하는 것이지 단기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문에서의 경쟁력 평가를 전적으로 시장가치 기준으로 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식서비스 분야의 시장개방이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또한 지식서비스 산업은 공급 측 성장동력과 수요 측 성장동력이 된다는 점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공급 측 성장동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식서비스 산업은 문화와 교육을 포함한 인문사회과학 및 기초과학 등과 같은 배후거점을 필요로 하며, 산업 전체에 대한 전방연계 효과가 대단히 포괄적이고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지식은 경제 전체를 조정, 통합, 운용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지식은 모든 산업에 대해 경쟁력의 핵심 원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조정과 통합의 핵심적 매개고리이기도 하다.

이번엔 수요 측 성장동력의 관점에서 지식서비스 산업의 특징을 이야기해보자. 어느 한 사회 안에 형성돼 있는 지식과 문화는 사회적, 개인적 가치를 창조하거나 다양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그리고 새롭게 창조되거나 다양화된 사회적, 개인적 가치는 과거의 가치를 대체하거나 분화시킴으로써 확장된 범위에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더 큰 규모의 기대수요를 만들어내고, 이런 기대수요가 그 사회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도록 하는 강력한 유인동기로 작용한다.

이처럼 지식은 그 자체가 공급 측 성장동력인 동시에 수요 측 성장동력이 된다. 지식이 갖는 이러한 특성은 지식기반 경제체제의 성장 잠재력이 과거의 다른 경제체제의 성장 잠재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일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 핵심적 근거다. 하지만 경쟁력의 원천으로서의 지식을 가치혁신으로 연결해 선순환시키기 위해서는 분배라는 매개고리를 통과해야만 한다. 분배의 불평등은 지식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맥락을 단절시키고, 지식과 가치창조 간의 연관고리를 약하게 만든다. 그 결과로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간에 나타날 수 있는 가치의 극단적인 분리는 지식기반 경제의 역동성에 대한 기대에 근거한 낙관적 미래전망을 단숨에 허물어뜨릴 수 있다.

특히 앞(4회)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미 FTA로 인해 자동차와 IT 최종재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 최종재 부문과 고용창출 효과가 큰 부품소재 부문의 국내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경우 지식과 가치혁신을 매개해주는 분배구조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부작용은 뒤(7회)에 살펴볼 '아시아 금융허브'의 거시경제적 효과와 맞물릴 경우 더욱 위험해진다. 해외자본이 대거 국내로 유입된다면 그것은 원화 가치를 상승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하여 한국 제조업의 수출경쟁력 상실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청와대와 정부는 지식서비스 부문의 개방을 추진하면서 지식이 갖고 있는 공급 측 조건에만 주목하고 있으며, 그것도 지식 생산의 원천을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지식서비스 부문의 개방은 아메리칸 스탠더드와 기업 차원의 이윤 극대화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것이며, 이 부문에서 미국이 갖고 있는 압도적인 경쟁우위에 비추어 코리안 스탠더드를 세우려는 시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요즘 들어 글로벌 스탠더드에, 아니 사실은 아메리칸 스탠더드에 적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스탠더드라는 것이 어떤 사회체제를 작동시키는 기본원리, 제도, 법규범 등을 일컫는 말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특정 스탠더드와 해당 사회의 병리적 현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세계최고 수준의 양극화 사회인 미국사회의 병리적 현상도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지식서비스 산업은 그것이 내포한 광범위한 전방연계 효과로 인해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우리나라에 이식하는 첨병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개방→경쟁→혁신→경쟁력 육성'론의 허구성

다음으로 지식서비스 부문에서 '시장개방을 통한 국내 경쟁력 육성'론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주장인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서비스 산업은 2001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50.9%를 차지하고 있어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수준(미국 66%, EU 70%)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2001년 현재 우리나라의 서비스 산업에서 도소매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8.8%이며, 이어 부동산 및 임대업 15.3%, 금융 및 보험 12.6%, 교육 서비스 8%, 비즈니스 서비스 3.2%, 문화산업 3.6%, 보건 및 복지 2%다.

중요한 쟁점 분야로 부각되고 있는 비즈니스 서비스 산업(국내)의 구성을 매출액 비중으로 살펴보면 IT 서비스 38.9%, 건축 및 엔지니어링 16.3%, 인력파견 10.5%, 법무 및 회계 9.8%, 광고 8.2%, R&D 및 기술 서비스 5.4%, 리서치 및 컨설팅 2.8%다. 여기서 지식집약적인 부문일수록 비중이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장 지식집약적인 부문인 R&D와 컨설팅 부문은 모두 합쳐봐야 비즈니스 서비스 산업 전체의 8.2% 수준에 불과하며, 이를 GDP에 비교하면 0.13%도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국내 컨설팅 시장의 경우 외국계 회사들의 점유율이 50%를 넘으며 국내기업들의 대부분(비중 0.06%)이 외국계 회사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점까지 감안하면 고부가가치 비즈니스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R&D와 컨설팅 부문에서 순수한 국내 자본이 올리는 매출액은 GDP의 0.0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종사자 1인당 매출액 규모로 보면 우리나라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컨설팅 기업인 맥킨지의 1인당 연간 매출액은 5억3천만 원인 데 비해 우리나라 컨설팅 기업의 1인당 연간 매출액은 7천만 원 정도에 그치고 있다. 또 세계 최대의 컨설팅 기업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ricewaterhousecoopers)의 2000년도 매출액은 215억 달러였는데, 이는 같은 해 우리나라 컨설팅 산업 매출액 전체의 20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적어도 지식서비스 산업의 경우 미국과 우리나라의 격차는 다윗과 골리앗 정도가 아니라 사람과 개미 정도라고 봐야 한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개방→경쟁→혁신→경쟁력 육성'이라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까? 방금 살펴본 미국과 한국의 지식서비스 산업 비교는 시장가치만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이다. 지식서비스 산업의 배후거점인 인문사회과학의 현실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나라를 미국에 비교하려는 시도조차 아예 포기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미국의 지식자본들에 국내 시장을 개방한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국내 인문사회과학에 투자하고, 이를 통해 국내 지식자본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까?

여기서 정부와 청와대는 교육시장 개방을 통해 외국의 유수한 대학들의 국내진출을 유도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근거 없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직수입되는 다양한 학문적 조류들이 10년도 버티지 못하고 거듭 물갈이되고 있으며, 대학교수들은 기껏해야 해외 이론을 수입하는 중개상 역할에 머물고 있다. 이런 판에 외국대학이 국내시장에 진출한다고 해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이 육성될까?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의 지식서비스 산업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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